‘평택이 판소리의 고장이다’ 라고 한다면 거개의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판소리사에서 평택이란 곳은 그냥 지나 칠 수가 없는 곳이다. 평택이 판소리사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 이 곳은 판소리와 함께 예술적으로 뛰어난 경기시나위의 한 류파가 발생을 한 곳이며 풍물의 본거지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 전통문화의 전승에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던 평택이기에 자연 많은 소리와 민속이 전승이 되었으며 그만큼 지금까지도 많은 민속이 전승이 되고 있기도 하다.

 

평양 능라도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명창 모흥갑의 그림 - 적벽가에 능한 모흥갑은 덜미소리를 내면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초기명창 모흥갑의 고장 평택

 

소리의 고장 평택. 일찍 우리는 조선 판소리사에서 평택 출신의 명창인 모흥갑을 만날 수 있다. 모흥갑(1822~1890)은 진위 출신으로 조선조 순조, 헌종, 철종 삼대에 걸쳐 전국의 소리판을 풍미한 명창이다. 모흥갑의 소리는 흔히 통상성이라고 하여서 고음처리가 그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강산제와 춘향가, 적벽가 등에 능하였다.

 

평양 모란정에서 덜미소리 한번을 내어 1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며 모흥갑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적벽가를 부르지 못했다고 하니 당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중고제(中高制)는 판소리에서, 조선 헌종 때의 명창 모흥갑(牟興甲)·염계달(廉季達)·김성옥(金成玉)의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를 말한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적 성격을 띠며, 첫소리를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을 다시 낮추어 끊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성행하였다.

 

우표로도 발행이 된 모흥갑의 판소리그림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신위의 『관극시』, 송만재의 『관우희』,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 등에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춘향가’나 ‘무숙이타령’ 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당대에 명성을 떨쳤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림속에 남아있는 모흥갑

 

모흥갑은 소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는 능라도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소리하는 광대가 모흥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하도 유명해서 판소리학회지인 『판소리연구』 표지를 위시해서 여러 판소리 관계 문헌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그림이 소리하는 광경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른 시기에 명창들이 야외에서 소리를 할 때 어떻게 했는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모흥갑이 어디 사람인지조차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경기도 진위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주 난전면 귀동(지금의 구이 부근)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모흥갑은 고음으로 이름을 날렸던 모양이다.

 

 

 

소리꾼들은 득음을 얻기위해 폭포독공이나 동굴독공 등 힘든 학습에 열중했다. 남원 운봉에 있는 '국악의 성지'에는 동굴독공을 익힐 수 있도록 조성을 해놓았다. 겉으로 본 동굴독공 학습장(위) 입구(가운데) 북 등이 놓여있는 동굴 안 학습장소(아래) 

 

그래서 모흥갑의 소리는 학이나 봉황의 울음소리에 비유되었다. 다만 모흥갑의 덜미소리나 그 청이 동, 서편제보다는 당대의 전해지는 중고제의 명창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모흥갑은 평택 진위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신재효는 그의 ‘광대가’에서 모흥갑의 소리를 ‘설상에 진저리친 듯’하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모흥갑이 고음을 잘 내어 그것으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모흥갑은 ‘적벽가’를 잘했다고 하나,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하는 이별가 한 대목이다. 지금도 조상현이나 성창순 등이 부르는 보성소리 ‘춘향가’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는데,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를 반복하면서 점점 음정을 높여, 마지막에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평택은 명창들과 인연이 있는 고장

 

더욱 평택은 조선조 말 명창 이동백(충남 서천군 종천면 출생)이 이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다가 영면한 곳이다. 이동백은 판소리사에서 ‘전무후무한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록 광대의 족건을 완벽하게 갖춘 소리꾼이었다. 처가인 평택의 한 야산에 올라 소리를 한 후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동백명창.

 

이렇듯이 평택은 우리나라 판소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경기 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의 초기 대명창과 말기 대명창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영면을 했다는 것은 평택이 우리소리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에 평택 진위에 모흥갑 기념비라도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판소리를 하는 명창들의 이야기는 참 우리로서는 상상을 초월하게 만든다. 소리를 얻는 것을 ‘득음(得音)’이라 하지만, 그 득음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노력은 가히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혼자 소리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우리는 ‘독공(獨功)’이라고 한다.

 독공의 과정은 정말 이야기만 들어도 아찔하다. 전공을 국악을 했기 때문에 고 박동진 명창을 스승으로 모셨었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박동진 명창과 몇 날을 함께 방송제작을 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러면서 들은 이야기가 바로 명창들의 득음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동백 명창이 득음을 했다는 동굴이 있는 흐리산

‘독공(獨功)’은 ‘독공(毒恐)’이라니.

대개 독공을 하고자 하는 소리꾼들은 동굴이나 폭포를 찾아간다. 동굴 속에 들어가면 2~3년을 동굴을 막아버리고, 겨우 음식물이나 변기 정도가 드나들 구멍 하나만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리를 얻어, 그 동굴을 막아 놓은 것이 무너져야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명창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폭포 독공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권삼득 명창이 콩 서 말을 들고 남원 용담폭포로 가서, 소리 한 바탕을 할 때마다 콩알 하나씩을 폭포의 소에 던졌다는 이야기도 맥락을 같이한다.

“독공이란 것은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아. 그래서 목에서 피가 넘어오지. 터진목에 예닐곱 번은 그렇게 터지고 아물어야 혀”

얼마나 그 독공이란 것이 힘이 들었을까? 그렇게 십년 가까이 소리공부를 마친 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서 소리 한 대목을 한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하면 ‘귀명창’들에게 시험을 보는 과정이다. 그 소리판에서 명창 반열에 들지 못하면, 다시 독공을 시작해야 한다니. 독공이란 것이 과연 독을 마시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 있을 만도 하다.



흐리산 중턱에서 소리가 들려

이동백 명창은 ‘전무후무한 대명창’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생긴 것이 준수하고 소리의 성음이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동백 선생님이 소리를 할 때면 객석에서 난리가 나지. 서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고. 그래서 소리를 할 때 선생님은 항상 맨 뒤에 순서를 맡았어. 선생님이 일찍 순서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이 다 가버렸거든.”

얼마나 그 생김새가 준수했는지, 지금의 인터넷 등에서 검색을 할 수 있는 자료를 보아도 알만하다. 이동백 명창은 어렸을 때는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소리에만 전념을 하다가, 서천 장항 빗금내에 있는 김문의 소리꾼인 김정근 문하로 들어간다. 무숙이타령의 대가라고 하는 김정근 명창은, 김창룡 명창과 김창진 명창의 부친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김세종 문하로 들어간 이동백 명창은 고향인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로 돌아온다. 그곳 흐리산(희이산) 중턱의 동굴 앞에 나무를 엮어 초가를 짓는다. 멀리 장항으로 나가는 길목이 보이는 이곳에서 2년간 동굴독공을 한다. ‘그 2년 동안 북채가 10다발은 끊어졌다’고 후세 사람들은 즐겨 이야기를 한다.

“정말 잘났지. 새색시 때도 힐금거리며 보았으니까?”

벌써 20년이 지났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이동백 명창의 생가마을을 찾았었다. 그곳에서 평소 이동백 명창을 보았다는 김부월 할머니(당시 93세였던 것 같다)는 이동백 명창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말 잘났지. 논둑길을 걸어오면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대장부였어. 새색시였었는데 옆에 시아주버님도 계셨지만 곁눈질로 보았으니까”

아마도 당시로 치면 지금의 인기가수 뺨칠 정도였는가 보다. 그렇게 흐리산 중턱 동굴에서 독공을 마친 이동백 명창은, 어전에 나아가 소리 한 대목으로 벼슬을 얻는다. 당상관인 통정대부를 제수 받았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소리였나 보다. 신재효의 ‘광대가’의 첫 머리는 바로 이동백 명창을 기준으로 삼았을 정도라는 소문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동굴독공. KBS 다큐멘터리 '중고제'장면 캡쳐

흉내 낼 수 없는 소리 ‘새타령’

이동백 명창의 소리는 일본 빅타레코드사에서 취입을 한 것을, ‘서울음반’에서 CD로 복각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그 중 압권은 당연 새타령이다. 뻐꾸기 울음소리 대목으로 가면, 정말로 뻐꾸기가 우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이다. 오랜 독공에서 얻은 명창이라는 칭호가 명불허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제는 소리로만 기억할 수 있는 이동백 명창. 1993년에 들려본 후 15년 만인 2008년 9월 9일 생가터를 찾아갔을 때는, 예전의 집이 아닌 잘 지어진 가옥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마당에는 철을 알리는 코스모스가 한껏 자태를 자랑하고. 저 뒤편에 보이는 흐리산 자락에서는, 금방이라도 새타령 한 대목을 부르며 논둑길을 걸어오는 명창의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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