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시간은 이미 오후 4시를 지나 5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라 금방이라도 날이 어두워질 것만 같다. 지리산 둘레길 중 한 곳인 남원시 주천면 구룡폭포를 찾았다. 비가 뿌리는데도 사람들은 주말을 맞아 둘레길을 걷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1박 2일이 지나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둘레길을 걷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주천의 절경 중 한곳이라는 구룡폭포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 위치한 육모정계곡은 용호구곡, 또는 구룡폭포라고도 한다. 옛날 음력 4월 8일이 되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곳의 폭포에, 용 한 마리씩 자리를 잡아 노닐다 다시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기 때문이다. 이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다가 승천 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구룡폭포. 그 모습이 궁금해서다.


첩첩산중에 쏟아지는 폭포

구룡폭포를 가려면 남원에서 운봉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운봉을 가는 길은 산길을 돌고 또 돌아야 한다. 승용차로 15여분 정도를 그렇게 산길을 돌아가면, 구룡폭포 이정표가 나온다. 그곳을 따라 들어가면 구룡사라는 절이 있다. 구룡사를 들어가기 전에 길이 갈라진다. 소나무가 늘어선 흙길을 따라 걸어보면, 감촉이 그만이다. 이곳 구룡사가 한 구간의 끝이 된다고 한다.

나뭇가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 간 표시가 있다. 산악회 등에서 걸어놓은 표시들이다. 울긋불긋 가지에 걸린 안내표지가, 마치 철 늦은 단풍이라도 되는 듯하다. 그 밑으로는 폭포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이 있다. 비가 오고 있어 축축이 젖은 가파른 길. 지난번에 빗길에 넘어지면서 아까운 렌즈 하나를 버린 적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둘레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남긴 흔적(위), 비가 오는데도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가운데) 그리고 폭포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

 
암반을 타고 흐르는 구룡폭포

줄을 잡고 기어 내려가듯 밑으로 내려갔다. 경사가 45도는 될 듯하다. 밑으로 내려가니 육모정으로 간다는 길목에 출렁다리가 걸려있다. 다리 앞으로 가니 암반을 타고 경사지게 흐르는 구룡폭포의 물길이 보인다. 주변에는 가을철에 떨어진 단풍들이 바위에 붙어, 마치 붉은 바위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폭포를 관람할 수 있는 계단이 폭포 위까지 놓여있다. 철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본다. 맨 위로 올라가니 산자락에 걸린 듯한 곳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 물이 소를 만들고 다시 옆으로 흘러 또 소를 만든다. 그리고는 밑으로 빠르게 흘러 내려간다. 맑은 물과 오랜 세월 물살에 깎여 반들거리는 바위. 어느 곳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었던 것일까? 아마 이 구룡폭포에서 시작을 해 육모정까지 흐르는 용호구곡 여기저기서 용들이 놀았던가 보다.



폭포를 관람하기 위해 오르는 계단(위) 폭포의 맨 위 소와(가운데) 오른쪽으로 꺾인 두번 째 소

구룡폭포는 모두 3단으로 나뉘어 흐른다. 처음 떨어지는 곳에 소를 만들고, 그 밑에 바로 우측으로 꺾이어 또 하나의 소를 만든다. 이 두 개의 소들은 폭포의 위편에 있다. 그리고 경사진 암반을 따라 길게 흘러내린다. 그 밑에 출렁다리를 지나 또 하나의 소를 만들고 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구룡폭포를 보고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둘레길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갈 길 바쁜 일정에 비까지 오는데, 언제 이 길을 다 가려는지 걱정이다. 구룡폭포 물길을 따라 함께 흘러내리는 색 바랜 단풍이 더 쓸쓸해 보이는 것도 계절 탓인가 보다.


떨어진 단풍잎으로 붉게 변한 암벽과(위) 둘레길을 돌다가 폭포 앞에 멈춘 사람들.


전북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지리산 기슭에 있는 춘향묘. 그 앞을 흐르는 냇가에는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육모정이라 부르는 이 정자는 최근에 새로 지었지만, 원래는 400년 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육모정 뒤로는 용소라 불리는 소가 있다. 이 소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던 곳이라 하였으며, 이곳에 넓은 바위가 있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 넓은 바위 위에 6각형의 정자를 지어 육모정이라 이름을 붙이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었다. 1960년 큰 비로 인해 정자가 유실 된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을 한 것이다. 육모정 뒤편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그 물이 맑은 것에 반해서일까? 한 사람의 명창이 이곳에서 목을 트였다고 한다.



명창 권삼득의 설렁제가 만들어진 곳

명창 권삼득. 명창들이 득음을 할 때는 동굴독공이나 폭포독공을 한다. 동굴독공은 동굴 안에 들어가 소리를 얻을 때까지 혼자 외로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이고, 폭포독공이란 폭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소리를 얻는 것이다. 그 폭포 독공이라는 것은 목에서 피를 몇 말을 쏟아야 얻을 수 있다고 하니, 그 득음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이곳에 구룡폭포가 있어 권삼득이 소리를 얻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이 줄어 예전의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용소로 떨어지는 물이 상당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권삼득 명창은 전라북도 완주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양반가의 사람이다. 예전에는 양반이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 권삼득 명창의 소리공부는 당연히 집안에서 쫓겨 날만한 일이다.


육모정 앞에 있는 춘향묘와(위) 물가에 서있는 권삼득 명창의 득음장소를 알리는 비
 
권삼득 명창은 판소리의 효시로 알려진 하한담에게서 소리를 배웠다고 했으니 판소리 초기의 명창이다. 조선조 영조 47년인 1771년에 완주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소리에 재질을 보였다. 혼자 이곳 용소 앞 넓은 바위를 찾은 권삼득 명창은, 이곳에서 소리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을 보냈을까? 지금은 작은 비 하나가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칠이 벗겨져 알아 볼 수도 없다.

설렁제를 만들어 낸 권삼득 명창

더늠이란 소리의 명창들이 오랫동안 소리공부를 하다가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을 만들어 내는데, 그 소리를 말한다. 권삼득 명창의 설렁제는 흥보가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의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이 바로 이 설렁제이다. 지금도 이 대목은 권삼득 명창의 설렁제로 부른다는 것을 말하고 설렁제로 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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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정자가 서 있었다는 바위와 물길

설렁제는 높은 소리를 길게 질러 씩씩하고 경쾌하다. 듣기에도 시원한 창법이라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가조를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했다. 그렇기에 권삼득을 '가중호걸'이라 불렀다. 육모정 뒤편 물이 흐르는 곳에 있는 용소, 바위틈으로 물이 얼마나 오랜 시간 흐른 것일까? 암반이 파여 있다. 그 아래 소가 푸른색을 띠고 맑은 물을 받아들인다.

선비들이 지었다는 육모정. 그리고 그 곳에서 소리를 하여 득음을 한 권삼득 명창. 양반가의 자손이니 이곳 정자에 와 그 경치에 반해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용소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왠지 소리 한 대목으로 들리는 것도, 이곳에서 소리를 한 한 명창의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게 무심한 세월만 흘러버렸다.

아홉마리의 용이 놀았다는 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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