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군 금사면 외평리 454-1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호인 포초골 미륵좌불상. 이 불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있는 높이 1.7m의 석조미륵좌상이다.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좌불상은, 현재는 사찰 안 용화전에 자리하고 있다.

 

포초골 미륵좌불을 찾아본 것은 벌써 서너 번은 되었는가 보다. 처음에 찾아갔을 때는 전각에 단청도 하지 않은 채로 만났는데, 그 뒤에는 용화전에 단청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난 해인가 찾아갔을 때는 먼저는 보지 못한 광배를 찾았다고 했다. 이렇게 갈 때마다 달라진 모습을 보인 포초골 석조미륵좌불이다. 문화재는 찾을 때마다 이렇게 다른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머리에 갓을 쓴 석조 미륵좌불상

 

여주 금사면의 미륵좌불상은 민머리에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으며, 네모진 얼굴에는 반쯤 감은 눈, 오똑한 코, 풍만한 양 볼과 짧은 귀가 표현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어깨의 주름과 가슴에 묶인 띠 매듭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둔탁한 편이다.

 

무릎은 신체에 비해 크게 조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양 발목 사이에는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안정감이 있고 육중한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석조 불상은 고려시대의 거대 석조불상의 형태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중대석에 보살상을 새긴 연화대좌

 

일반적으로 미륵입상이나 좌상을 모신 전각을 용화전이라고 한다. 이 포초골 미륵좌불상이 소재하고 있는 절은 그 동안 상당히 불사를 많이 하였다. 하기에 용화전 주변도 정리가 되어있으며, 절 경내 곳곳에는 아직도 불사를 계속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포초골 미륵좌불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꽃잎이 큼지막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중대석에는 8각의 각 면에 보살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이렇게 보살입상을 새겨 넣은 연화대좌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는 것에서 이 미륵좌불상의 독특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뒤늦게 발견이 된 광배

 

연화대좌의 하대에는 커다랗게 앙화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이 불상을 보면 4각형의 원만한 얼굴에 넓고 당당한 어깨, 그리고 둔탁한 옷주름의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 볼 수 없었던 광배는 나중에 주변을 정리하다가 땅 속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광배응 몸 전체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큰 편이며, 윗 부분이 배의 선미처럼 휘어져 있다. 광배에는 위편에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원을 중심으로 하여 각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고려 시대에 조성된 포초골 석조미륵좌불상. 4월 26일 오후에 찾아간 절집에서 만난 석불좌상은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을 마음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1006번지. 금산읍에서 금산인삼장이 열리는 앞을 지나 제원면으로 들어가, 제원대교를 건너면서 좌측으로 보면 전각이 하나 보인다. 이 전각 안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산천내리용호석’ 중 ‘용석(龍石)’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100m 정도를 천변 둑을 타고 가다가 우측 농로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전각이 보인다. 그 안에는 용호석 중 ‘호석(虎石)이 있다. 천내리 마을 서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돌로 만든 동물상 2기인 천내리 용호석. 과연 이 2기의 석물로 조각된 용호석의 실체는 무엇일까?



공민왕이 두고 갔다는 용호석

공민왕은 고려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충목왕 즉위 원년인 1344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충정왕 1년인 1349년 원으로 건너가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았다. 충정왕 3년인 1351년 충정왕이 폐위되자 원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귀족회의인 ‘정방’을 폐지하는 등 많은 개혁정치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이 1360년 홍건적이 침입을 하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신을 내려갔단다. 그곳에서 자신의 능묘의 위치를 정해놓고 필요한 석물을 준비하였는데, 이 용호석이 바로 그 석물이라는 것이다.


위 사진들은 용호석 중 용석의 모습이다. 용은 돌기를 만들고 그 돌기사이네 용을 조각하였다


왕은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는데, 이 용호석은 그곳에 그냥 두고 갔다는 것. 만일 이러한 설이 맞는다고 하면 이 용호석은 제작된 지가 700년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 이 용호석은 천내리 강변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용호석의 설을 받침 하는 공민왕묘

공민왕의 릉인 ’헌릉은 개풍군 해선리에 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묻은 능침은 봉명산의 무선봉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서쪽 것이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이며,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이다. 1365년 왕비인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공민왕 지신이 직접 주관하여 9년이란 세월에 걸쳐 무덤공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금산 천내리의 호석은 꼬리를 앞발 사이로 넣어 앞다리에 걸친 모습이다. 민속화 등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로 앉아있다.


이 무덤은 고려의 모든 천문지리, 석조건축, 조형예술이 집대성되었다고 본다. 맨 위에는 봉분을 구성하고 3개의 층단과 맨 아래는 경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층단에는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치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공민왕의 무덤에 바로 금산 천내리 용호석 중 호석과 흡사한 호석 한기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금산에서 조각한 용호석을 가져가지 못한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죽고 난 후 능침을 조성하면서 이 석물로 조각한 호석을 만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호석의 형태가 흡사하다는 것을 보면, 천내리 용호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낭설은 아니란 생각이다.

아래는 공민왕 무덤의 호석 / 인터넷 검색자료

조각기법이 퇴화한 고려 후기의 조각

금산 천내리의 용호석은 그 모습이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석은 여러 개의 돌기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를 조각하였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는 아가미와 수염이 묘사되어 있다. 발톱은 우리나라 용의 네 발가락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비늘은 두텁게 표현을 하였다.

호석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바로 이 모습이 공민왕 능침 앞에 있는 호석의 형태와 동일하다. 천내리 호석은 몸은 서쪽, 머리는 북쪽을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털 문양은 두툼하게 솟은 곡선과 동그라미를 교대로 조각하여 표현되었다. 호석의 꼬리는 앞발 사이로 감아 한편으로 조각하였다.

호랑이나 용의 특징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나, 전체적으로 조각기법이 투박하고 퇴화한 점 등으로 보아, 이 용호석은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시기적인 것이나, 공민왕의 능침에 있는 호석 등으로 추론할 때, 이 용호석은 공민왕이 자신의 무덤에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을 했을 것이란 설에 공감이 간다.

공민왕과의 관계설도 그럴 것이라고 공감을 하지만, 용석은 동쪽을 바라보고 호석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용호석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듯도 하다. 700년 세월을 천내리 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용호석. 언제까지라도 주인을 기다릴 듯한 자세로, 오늘도 길가를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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