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농다리. 많은 사람들이 농다리를 찾는다. 그리고 글을 쓴다. 농다리에 대한 글은 많다. 그런데도 농다리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함이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농다리는 과학이요. 우리의 사상을 지난 다리'라는 점이다. 

중부고속도로 청주에서 안성쪽으로 오르는 상행선을 가다가 보면, 버스 안에서도 볼 수 있는 다리가 있다. 그 유명한 진천 농다리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세금천에 놓여진 이 농다리는 고려 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농다리를 축조했다는 임장군은 누구인가?

1932년도에 발행된 <상산지(常山誌)>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장군은 고려 때의 무신으로 농다리를 그의 전성기에 고향마을에 쌓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바로 임연 장군이다. 고려 때의 임연 장군은 고려 말의 무신이다. 임연은 고려 원종 때의 무신으로(? ~ 1270(원종 11년)) 몽고군을 물리친 장수이다.

임장군이 전성기에 농다리를 고향마을에 축조했다고 한다. 임연 장군이 전성기라고 하면, 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인 공로로 위사공신의 칭호를 받았을 때일 것이다. 당시는 고종 45년인 1258년이니 750년 전이다.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고려 초기의 임 장군과 고려 말의 무신인 임연이 동일인물 인가가 정확지가 않다. 상산지에는 고려 초기에 축조한 다리라고 하면 천년 세월을 버티고 있다는 것이고, 고려 말의 무장 임연 장군이 쌓았다고 하면 750년이 지났다.



결국 그 차이가 300년 정도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가 없지만, 진천 농다리를 축조한 '임장군'은, 고려 말의 무장인 임연 장군과는 별개의 인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농다리의 실제 길이는 108m였을까?

농다리는 원래 28수(宿)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중 세칸이 유실되고, 지금은 25칸만이 남아 있으며, 길이는 93.6m에 이르고 있다. 교각의 폭은 4m 내지 6m 정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지 않고 있다. 이 농다리의 처음 길이는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현재 남아있는 93.6m를 남은 25칸으로 나누면 3.75m 정도가 된다. 이것을 원래 28수로 곱하면 약 105m 정도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이 농다리의 교각의 폭이 일정치가 않고 4m에서 6m 정도였다면, 혹 이 농다리의 원래 길이는 108m 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고려 때는 불교가 성행하였다. 아마도 이런 종교적인 사고를 지닌 다리는 아니었을까 하는도 든다.  


농다리는 과학이다.

농다리는 똑 바로 축조가 되지 않았다. 마치 지네발처럼 구불구불하다. 이런 농다리는 사력암질의 붉은 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들었다. 상판석은 특이하게  중앙에만 쌓아, 좌우로 날개를 단 듯 축조된 돌로 쌓은 기둥의 힘을 배분했다. 교각의 축조방법은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흙 등으로 채우지 않고,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 농다리를 돌만으로 축조한 것도 알고보면 이유가 있다. 그 쌓아 올린 교각의 돌틈으로 물이 빠져나가게 한 것이다. 그만큼 흐르는 물로 인해 받는 저항을 약화시켰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놓여진 다리라는 것이다. 장마철에 물에 잠기는 농다리. 물속에서도 어떻게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고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물이 흐르는 방향의 농다리의 앞을 보면 교각보다 넓게 조성이 되었다. 석축의 끝은 좁고 상판을 올린 부분은 넓게 만들었다. 이는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아, 교각에 무리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교각 사이로 흘러 들어온 물살은 갑자기 유속이 빨라진다. 마치 무엇이 잡아 끌기라도 하는 듯하다. 이렇게 물살이 빠르게 교각 사이를 빠져 나가면, 교각에 무리를 주지 않고 유속만 빨라지게 된다.


돌과 돌 사이로 흘러 들어온 물은 흐름이 늦어진다. 교각 사이를 좁게 한 대신 깊이를 조절해 물이 흐름의 속도를 늦추기 위함인 것 같다. 


좁은 통로를 지나는 물은 갑자기 빠르게 빠져나간다. 교각의 후미를 경사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완급의 조절을 한 것은 물이 교각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농다리가 과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지네발 모양의 축조방식이다. 교각을 일렬로 쌓지 않고 구불거리게 놓아, 물의 흐름을 적당히 배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축조된 농다리. 천년 세월을 버틴 것이 결토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조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경상북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소재한,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한 곳인 통도사 관음전 앞에는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이 석등은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는 팔각의 받침돌을 삼단으로 쌓았다.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고 있는 이 석등은, 현재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0호이다.

석등의 용도는 절 안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 누리에 비추어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등불은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는 등에서 나간 불빛이 고루 퍼져나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양구 중에서도 으뜸인 등불

석등은 언제나 석탑과 함께 전각의 앞에 자리한다. 이는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중에서도 등불 공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갖가지 형태의 많은 석등이 현재까지도 자리하고 있으며, 폐사지 등에도 석등이 남아있는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석등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도사 관음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은, 그 조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석등은 둥근 형태의 연꽃받침인 연화대 두 개를 아래 위로 놓고, 그 가운데를 팔각의 간주석을 세웠다. 그 윗부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석등의 구성형태는 거의가 이런 형태로 꾸며진다.



연화대가 상징하고 있는 뜻은?

이 통도사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귀꽃 양식 등이 세밀하지 않다는 점을 보아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아래받침돌인 연화대의 옆면에는 안상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이 아래에 있는 연꽃받침은 물속에 있는 탁한 진흙과 같은 세상을 뜻한다. 아래 위 연화대 가운데에 있는 간주석인 기둥은 중앙에 세 줄의 테를 둘렀다.

이 세 줄은 천, 지, 인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불가에서 부처님의 목에 난 삼도와 같은 의미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세 줄에 대한 정확한 풀이는 알 수가 없다. 이 팔각의 기둥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불교의 올바른 길인 팔정도를 상징한다.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인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말한다.



간주석 위에 있는 윗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위로 향한 연꽃을 조각한 연화대는, 광명, 청정, 부처, 보살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렇듯 석등 하나가 갖는 뜻은 상당히 깊은 것이다.

흔치 않은 부등변 팔각석등

4개의 커다란 불창이 있는 화사석은, 파손이 된 것을 후에 새로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석등의 조화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등은 언뜻 보면 4각처럼 보이지만, 부등변 팔각석등으로 우리나라 석등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화사석의 위에 얹은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인 귀꽃을 달았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놓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석등. 크고 작은 모형의 이 석등을 볼 때마다 더욱 그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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