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와 서원, 모두 예전 교육기관이다. 개인이 운영을 하는 교육기관이냐, 아니면 국가에서 하는 기관이냐의 차이라고 보면 간단하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으로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 운영된 교육기관이다. 당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교육기관인 향교는 지방의 수령이 책임을 맡았으며 중앙의 재정적 지원도 받았다.

 

이와는 달리 서원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거나,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하던 곳이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의 명칭으로, 서원은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지역에서 선비들이 자의적인 모임을 이어가기 위해 구성원들을 모아 꾸려나가던 곳이다.

 

 

서원은 지방사림세역의 구심점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중앙에 있는 성균관과 사부학당, 그리고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 한 관학이 교육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의 사학도 인정되었으며 국가에서 그러한 사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중종 38년인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서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재의 성격이 단순히 유자의 안거강학의 장소였던 데 반해,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를 가지고 있었다. 서원은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모처럼 대성전 문을 개방한 수원향교

 

수원시 팔달구 향교로 107-9 (교동)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호인 수원 항교. 향교는 일년 중 춘추에 벌어지는 석전제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성전의 문을 개방하지 않는다. 대개의 향교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으로 되어있는 향교는 명륜당 앞 외삼문과, 명륜당 뒤 대성전으로 오르는 내삼문이 있다.

 

향교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신위를 모시고 있는 41018현을 제사지내는 의식을 치루는 일 이외는 대성전을 거의 개방하지 않는다. 그런 수원 향교가 모처럼 향교를 개방해 일반인들도 대성전 등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수원 향교는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었다. 정조 19년인 1795년경 정조의 명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원 향교 역시 앞쪽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편으로 계단위로 올라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향교의 기본 형식을 충실히 따른 수원 향교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학의 공간인 명륜당이 자리한다. 명륜당은 정면 5,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이다. 정면 가운데 3칸은 문을 달았으며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양편의 두 칸이 막힌 것은 이 곳은 온돌방으로 마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명륜당 뒤편 좌우측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마련되어 있다.

 

명륜당 뒤편에 높게 계단을 놓고 그 위에 내삼문이 마련되어 있다. 모두 세 칸으로 된 삼문은 대성전에 출입을 할 때는 우측 문으로 들어가고, 대성전에서 제향을 마치고 나올 때는 좌측 문을 이용한다. 수원 행교 대성전은 정면 5, 측면 3칸 규모이다. 좌우에 마련한 동무와 서무는 정면 3, 측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모처럼 문을 개방해 돌아볼 수 있었던 수원 향교.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 지역의 문화재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경남 통영시 명정동에 소재한 사적 제236호인 충렬사. 이순신 장군의 제를 지내기 위해서 선조의 명에 의해, 1606년에 제7대 통제사인 이운룡이 세운 사당이다. 지난 10월 13일 아침 찾아간 충렬사.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들어가면서부터 행복을 느낀 곳이다.

 

우선 충렬사의 입구를 들어서면 정당으로 올라가는 우측에 몇 그루의 동백나무가 보인다. 이 동백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나무로, 수령이 4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일 년 간의 어업의 안녕을 위해 풍신제(風神祭)를 지냈다고 한다,

 

 

 

강한루에서 아픔을 느끼다

 

정당으로 오르는 길에 이층 누각 한 채가 서 있다. 앞에서 보면 ‘강한루’요, 뒤로 올라가면 ‘영모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강위는 강한루에 올라 다음과 같이 이곳의 풍광을 읊었다.

 

물길 거슬러 신선의 꿈 어렸더니

강한루 다시 올라 흉금을 활쫙연다

외로운 달 먼 하늘 떠가고

개울물 모두 흘러 깊은 바다로 가는 구나

사람 만나서 옛 땅 물어보고

술 나누는 첫 마음 아련도 하여라

여기 충렬사 있어

찾아온 지 벌써 두 번째렸다.

 

 

 

강한루 누마루 밑으로 난 통로를 지나 계단을 지나야 정당으로 오를 수가 있다. 그런데 계단으로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강한루의 지붕에 기와들이 많이 흐트러져 있다. 아마도 이 일대를 강하게 휩쓸고 간 태풍 때, 저리 기와가 제 자리에서 벗어났는가 보다. 그 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저렇게 볼썽사납게 놓아둔 것인지.

 

적어도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인데 좀 심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문화재의 보수는 절차를 거쳐서 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기왓장들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도, 어찌 정리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런 모양새를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파온다.

 

장군께 향을 올리다

 

강한루를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서 좌우측을 보면 충렬묘비명을 비롯한 몇 기의 비석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제111대 통제사 이언상 사적비, 충무공 이후로 덕수 이씨 후손들 중에서 12명의 통제사가 있었는데, 그 중 121대 통제사 이태상, 138대 이한창, 143대 이한풍, 167대 이항권, 172대 통제사인 이승권 등 5명의 공적비 등이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 위에 내삼문이 서 있다. 내삼문에는 문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인 활주는 육각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였는데, 그 밑에 해태상을 조각해 놓아 특별하다. 통용문인 양편에 협문을 낮게 만든 것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 또한 선조들의 마음자세를 배워야 할 듯.

 

 

 

정당은 충렬사이다. 이춤무공의 영정을 모셔놓은 곳으로 선조의 명에 의해 1606년에 지어져, 300년이란 긴 시간동안 역대 통제사들이 봄, 가을로 제향을 모시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정당의 지붕 용마루에는, 주역의 팔괘를 기와로 그려내었다. 아마도 이런 충렬사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큰지도 모르겠다.

 

 

 

사당 앞에 향이 놓여있다. 장군께 향을 올린다. 뒤에서는 해설사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들어올 때 본 강한루의 망가진 지붕이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벌써 이곳을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는데, 이제는 말끔히 수리가 되었길 속으로 빌어본다.

향교는 조선시대 국가 교육기관으로 설립한 곳으로 교학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다. 현재의 중,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향교는, 양민이상이면 입학할 수 있었다. 향교에서는 학문을 배우는 외에도 대성전을 두고 있어, 선현들에게 제를 지내고 있다. 향교에 학생은 정원을 두었는데 대개는 군에서는 50명, 현에서는 30명 정도의 학생들을 수용하였다.

정형에서 벗어난 무주향교의 건물배치

향교는 일반적으로 전국 어디를 가나 동일한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학생들의 묵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두고, 그 중앙 뒤편으로 명륜당이 있다. 그리고 명륜당의 뒤 높은 곳에는 내삼문 안으로 공자와, 공자의 제자 및 우리나라의 현인들을 모시는 동무와 서무를 배치한다. ‘전학후묘(前學後廟=앞에는 배움터, 뒤편으로는 제각)’의 형태가 향교의 일반적인 배치이다.


그런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와는 동떨어진 모습으로 건물 배치를 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전북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에 소재하고 있는 무주향교이다. 무주향교는 외삼문의 우측 담벼락에 붙여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의 전면은 담장에 붙어있고, 후면이 대성전으로 향하는 마당이 된다.

이러한 다른 형태의 건물배치는 앞으로 난 도로로 인하여, 담장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명륜당의 전면이 담장에 붙어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는 명륜당의 뒤편으로 출입을 해야 한다. 명륜당의 뒤편에 있는 건물이 기숙사로 사용했던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명륜당을 한편으로 비켜서 내삼문을 지나면 동무와 서무가 있고, 그 안쪽에 대성전이 있다.




호환으로 자리를 옮긴 무주향교

일반적인 향교는 낮은 산을 이용해 층이 지게 건물배열을 한다. 즉 외삼문을 지나면 다시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들어가게 하는 형식이다. 정면에서 보면 외삼문, 동재와 서재, 명륜당을 두고, 그 뒤편에 축대를 쌓아 높은 곳에 내삼문, 동무와 서무, 그리고 대성전의 형태로 조성이 되면서 전체적으로는 비스듬한 비탈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무주향교는 평지에 축대를 쌓고 돌계단을 오르도록 대성전을 두었다. 이렇게 조금은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와 달리 조성된 무주향교. 그런 획일적이지 않은 배치가 어쩌면 딱딱한 향교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여유로움까지 갖게 만든다.



원래 무주향교의 건물배치가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무주 관아 동편에 있던 무주향교가 호랑이의 행패가 심하여, 조선 숙종 18년인 1692년에 김몽신이 향로산 서쪽으로 옮겼다가, 그곳이 땅이 습하다고 하여서 조선조 순조 32년인 183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결국 무주향교는 두 번이나 자리를 옮기면서 향교의 건물배치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불망비가 나란히 서 있다. 역대 관찰사 등의 선정을 기리는 이 비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향교 경내에 관찰사 등의 불망비나 선정비 등이 있다는 것도 특이하다. 아마 이 비군은 후일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호환으로 인해 자리를 옮겼다는 무주향교. 그런 와중에 향교의 기본적인 건물배치를 벗어났지만, 그런 배치가 오히려 향교의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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