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마 통 장대비가 내리는 날 미치지 않고서야 무슨 문화재 답사람?”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난 거의 어김없이 문화재 답사를 떠난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거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그런 날 꼭 문화재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장대비가 내리는 날 문화재를 보아야만 할까? 남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비를 맞은 문화재들은 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선명하게 드러난 문화재들을 잘 살피다가 보면,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샅샅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맛비에 찾아간 고달사지

 

7월 12일(금) 중부지방에는 정말로 장대비가 내렸다. 그 빗속에 찾아간 고달사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를 찾은 것이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 아직도 발굴 중인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이 소재해 있는 옛 절터이다.

 

혜목산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 처음에 절이 창건된 지 벌써 1250년이 지난 옛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굵은 빗줄기 속에 희뿌옇게 모습을 보이는 고달사지. 그 안쪽 한편에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탑비는 없이 귀부 위에 이수만 얹힌 모습이다.

 

바람이 날 것 같은 콧구멍과 왕방울 눈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59년에 태어났다. 90세인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인근 원주의 거돈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고 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몸돌은 깨어져 딴 곳으로 옮겼으며, 비 몸돌에는 가문과 출생, 행적 등이 적혀있다고 한다.

 

 

몇 번이나 들린 고달사지이다. 그러나 갈 때마다 이 귀부를 보면 딴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이 귀부에 마음이 가는 것은 귀부의 모습 때문이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난 이 귀부를 볼 때마다 알 수없는 힘을 느낀다. 마치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딛을 것만 같은 발. 격동적인 발은 발톱까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장맛비에 들어난 조각, 정말 장관일세

 

머릿돌인 이수에는 명문에 혜목산 고달선원 원종대사의 비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이 원종대사 탑비의 이수에는 용들이 용틀임을 하고 있는데, 비를 맞은 용의 비늘이 장관이다. 돌에 새겨놓은 비늘이 바로 꿈틀거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장관을 보기 위해 비속을 뚫고 답사를 다닌다.

 

 

발을 본다. 두려움이 느껴진다. 비에 젖은 앞발이 힘 있게 대지를 움켜잡은 모습이다. 어떻게 저렇게 표현을 했을까? 탑비의 뒤편으로 돌아가 웃음을 터트린다. 힘이 넘치는 앞모습과는 달리, 뒤편에 말려 올라간 꼬리가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라야 이러한 것들이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래도 비가 오는 날 답사를 나간다고 난리를 칠 것이여?”

미쳤다고 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비가 오는 날, 그것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답사를 해보지 않은 분들은 그 멋을 모르니 말이다.

(창) 강쇠란 놈의 거동봐라 저 강쇠란 놈의 거동봐요. 삼십명 나뭇꾼 앞세우고 납작지게를 걸머지고 도끼는 갈아 꽁무니차고 우줄 우줄 넘어간다. 거들거리며 넘어간다. 이산을 넘고 저산 넘어 산돌아 들고 물돌아 들어 죽림 산천을 돌아들어 원근 산천을 바라보니 오색초목이 무성하다.

마주섰다고 향자목 입마추면 쪽나무요. 방구 꾸며는 뽕나무요. 일편단심에 노간주며 부처님 전에는 회양목 양반은 죽어서 괴목나무 상놈을 불러라 상나무 십리 절반에 오리목 한다리 절뚝 전나무요. 오동지신이 경자로다 원산은 첩첩 태산은 층층 기암은 주춤 낙수는 잔잔 이 골물이 출렁 저 골물이 솰솰 열에 열두골 물이 합수되어 저 건너 병풍석 마주치니 흐르나니 물결이요 뛰노나니 고기로구나. 백구편편 강상비요 낙락장송은 벽상치라


(아니리) 여봐라 하 이 변강쇠란 놈이 나무를 나가 나무는 못하고 사면팔방 돌아다니다가 길가에선 큰 장승을 패다 불을 땠더니 아 이 장승이 또 무슨 죄로 남의 집 아궁이 귀신이 되겠느냐 말이지.

변강쇠타령에서 장승이 강쇠에게 굴욕을 당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강쇠는 잘 마른 장승만 패다가 불을 놓았다고. 전국에 장승들이 비상이 걸렸다. 노들 대방장승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더니, 장승들이 각각 강쇠녀석의 몸에 병균을 하나씩 심었겠다. 결국 강쇠란 놈은 오만잡동사니 병이 다 들어 죽고 만다.

장승은 성기숭배사상에서 기인했을까?

장승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세워진 것일까? 가장 오랜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은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창성탑비>의 ‘비명(碑銘)’에 적혀있다. 통일신라시대인 759년 장생표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당시 장승의 기능은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장승’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의 기록은 1085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석표’이며,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의 국장생과 황장생, 1689년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석장생, 1725년의 전라북도 남원군 실상사의 석장승 등이 보인다. <용재총화>와 <해동가요> 등의 옛 문헌에도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장승은 어떻게 세우게 되었을까? 가장 많은 학설은 ‘남근숭배’와 사찰의 경계표시에서 나왔다는 ‘장생고표지설’ 등이다. 또한 솟대나 선돌, 서낭 등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속기원설‘도 있다. 그러나 장승이 언제 무슨 연유로 최초로 세워졌는가에 대한 것은 정확하지가 않다.

장승은 그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장승, 행로에 서서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 마을의 입구에 서 있는 축귀장승, 성문이나 병영, 해창(海倉) 등에 서 있는 공공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내비게이션도 모르는 영은사지 석장승을 찾아가다

함양 백전면 백운리에는 석장승이 서 있다. 이 장승이 서 있는 곳은 예전 신라시대 영은조사가 개창했다고 전해지는 ‘영은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6일 밤새도록 심하게 토사를 한 덕에 답사를 하지 못할 것 같아 망설이다가 길을 나섰다. 비가 억수로 쏟아 붓는데도, 답사를 떠난 것이다. 백운면에 들어서 마을 주민에게 장승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모르겠단다.

내비게이션을 켰다. 요즘 내비게이션은 웬만한 문화재는 다 안내를 해준다. 그러나 정작 영은사지 석장승은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빗길에서 물어물어 찾아가는 수밖에. 겨우 장승을 찾아냈다. 백운암으로 오르는 산길 입구 양편에 두 기가 서 있다. 그런데 이 영은사지 석장승은 딴 곳의 장승과는 다르다. 양편에 서 있는 장승의 형태와 크기가 전혀 다른 것이다.

두 장승이 같은 목적을 갖고 제작이 되었다는 것은 복판에 음각된 ‘우호대장군’과 ‘좌호대장군’이란 글씨 때문이다. 이 장승은 각종 악한 기운을 막아내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호법장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변강쇠도 도망갈 험상궂은 모습

산으로 오르는 좌측의 장승은 키가 작다. 복판에 글씨를 보니, 밑 부분이 땅에 많이 묻힌 듯하다. 원형에 가까운 돌을 위를 잘라 관처럼 만들고, 이마에는 굵은 주름을 새겼다. 눈은 양쪽으로 치켜져 올랐으며, 코는 주먹코이다. 입은 아랫입술이 두터우며 이빨이 듬성듬성 나있다. 복판에는 좌호대장군을 음각했는데 ‘좌호’만 보인다.

길 우측에 있는 석장승은 네모난 돌의 윗부분을 뾰족하게 조성하였다. 흡사 고깔을 뒤집어 쓴 듯한 형상이다. 눈썹은 굵게 표현했으며, 눈은 왕방울 눈이다. 코는 좌우로 퍼졌으며, 입은 두툼하고 이빨이 굵게 옥수수 알처럼 조각이 되었다. 복판에는 우호대장군이라 음각을 하였다. 이 영은사지 석장승은 좌호대장군의 오른쪽 아래에 영조 41년인 1765년을 표시하는, ‘건륭 30년 을유 윤2월’이라고 적혀있다.


비가 쏟아지는데 찾아간 영은사지 석장승. 입가에는 수염이 여러 가닥 있어 더욱 험상궂게 보인다. 아마도 이 영은사지 장승을 변강쇠가 만났다면,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는다. 빗속에 서 있는 장승을 뒤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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