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서 중요한 시설물 중 하나는 아마도 북수문인 화홍문과 더불어 물길을 지켜낼 수 있는 남수문이었을 것이다. 남수문은 1846년의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는데, 1922년의 대홍수 때 또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그런데 북수문이 일곱 개의 수문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아홉 개의 수문을 낸 것일까?

 

 

90년만에 복원 된 세계문화유산 화성 남수문의 성밖(위)과 성안(아래)

 

왕권의 상징이었을 남수문

 

아마도 남수문에 아홉 개의 문을 낸 것은 왕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9는 양수 중에서 가장 큰 수이며, 꽉 찬 것을 의미한다. 왕의 복장 중 가장 품격이 높은 것이 ‘구장복’이고 보면 남수문은 왕권을 상징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북수문은 상류의 물이 유입되는 곳이지만, 남수문은 팔달산 등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합쳐지기 때문에, 그만큼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공간확보가 더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북수문과 남수문은 1794년 2월 28일에 장안문, 팔달문과 동시에 터를 닦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의 남수문(위)와 1920년도에 촬영한 남수문(아래)

 

"남북 수문의 터는 동서로 38보, 남북으로 51보를 파내서 터를 닦고 땅을 14척 깊이로 판다. 모래에 진흙을 섞어서 다져서 쌓은 후 전을 2중으로 깔았다. 다리의 안팎에도 넓게 고기비늘처럼 전을 깔고 그 끝에 장대석을 물리어 굳혔다."

 

난공불락의 조형물이었던 남수문

 

남수문은 화강석으로 수문을 쌓고 쇠살문을 달았으며, 수문 위의 구멍을 통해 쇠사슬로 수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9개의 수문 구간 위에는 다리의 넓이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에는 사람을 통행하게 하고, 다리의 길이인 동서 약 28.6m에 남북 3.6m의 검은색 벽돌로 꾸민 ‘포사(舖舍)’를 길게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포사에는 세 개의 문을 내어 짧은 시간에 많은 군사들이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장을 검은색 벽돌로 쌓아 57개의 총안을 내었다. 이 총포의 구멍이 수문을 향해 공격을 하는 적을 향하고 있으니,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이다. 여장 역시 구간수문의 아치형에 어울리게 무지개형으로 조성하였다.

 

 

 

 일몰시간의 남수문 조명. 그 앞에 분수대만 있었더라면 정말 아름다웠을 것을...

 

또 하나의 명물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남수문 주변이 홍수로 떠내려 간 뒤 90년이 지난 올해 복원이 되었다. 물론 그 복원의 의미를 갖고 글을 쓰기도 했지만, 어차피 지어진 남수문이 다시는 홍수피해의 아픔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2차적인 것은 해당부서와 담당자들이 알아서 옛 남수문의 기능을 다시 되살리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6월 25일(월) 일몰시간이 지난 다음에 남수문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구간에서 아름다운 조명이 남수문을 화려하게 만든다.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잠시 동안 촬영을 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의 조형미술이라는 화성, 그 중에서도 과거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한 곳이었던 남수문의 야경이다.

 

 

촬영을 하다가 불현 듯 생각을 한다. 만일 저 앞에 분수라도 설치를 해서 그 분수에 조명과 함께 어우러진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참 막힘이 없이 자연스러운가 보다.

성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용 진지를 말한다. 흙이나 돌로 쌓아 적과의 교전시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고,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구조물이다. 우리나라는 전국에 걸쳐 수많은 성곽이 있다.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 소재한 보령성곽은 평지에 구축한 상으로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성곽 일부만 남은 보령성

 

보령성은 세종 12년인 1430년 기존에 있던 성을 보강하여 쌓은 성이다. 원래 이 성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봉당성(고남산성)의 동쪽으로 약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쌓았다. 현재 이 보령성은 남문인 해산루와, 해산루에 붙은 성벽 70m, 그리고 북쪽 성벽이 남아 있다.

 

 

현재 남문터에 남아 있는 보령성을 보면, 평지에 성을 축성한 관계로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성을 쌓았다. 남문 부근을 제외한 남은 부분은 바깥 부분만 돌로 쌓았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630m에 성곽의 높이는 3.5m 정도라고 한다. 처음 이 성을 지었을 때는 성벽을 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적대가 8개소, 남문과 북문, 동문 등 문루가 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1432년에 성을 축조할 당시에는 제민당, 공아, 병기고 등 140여 칸의 간물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우물이 3개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들의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지면서 모두가 다 소실되고, 현재는 남문인 해산루와 성곽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남아있는 일부 구간의 성벽과 성벽을 타오르는 담장이

 

조선왕조의 상징이었던 해산루

 

현재 충남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보령성의 남문인 해산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누각이다. 해산루는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양편을 성곽에 걸쳐 조성하였다. 예전에는 이 성곽 양편에 걸친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현재는 그러한 자취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 해산루는 당시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을 상징하기 위해 전국에 걸쳐 같은 형식으로 조성한 관아문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누각은 상벽 위에 마련한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 누각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 이 곳에서 밀려드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전략을 짰을 것이다. 남문 누각 정면에 걸려 있는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역사의 흔적엔 초여름의 뙤약볕만 남아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린다. 성벽에는 담장이 넝쿨이 타고 올라가 고풍스런 멋을 보인다. 남문 뒤편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점심시간이라도 되는가 보다. 천천히 길지 않게 남은 성곽을 둘러보고 해산루에 올라본다. 그저 흔히 보아오던 누각이지만 이곳의 정취가 남다르다. 앞으로 펼쳐진 시골 작은 마을의 가지런히 뻗은 길에는 차 한 대가 보이질 않는다.

 

보령현은 고려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부터 현감이 파견되었고, 효종 3년인 1652년에는 보령부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읍성은 세종 12년인 1430년에 현감 박효성 등이 축성을 하였고, 세종 14년인 1432년에는 현감 정대가 140여 칸의 관아건물을 완성했다고 한다.

 

 

영의정 이산해가 썼다는 해산루 편액의 글씨(위)

 

처음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이 되었다는 성곽이다. 임진왜란과 의병들의 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이 되었다는 관아와 성곽. 그저 역사가 어떠한 형태로 뒤바뀌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남은 해산루 인근을 보면 담장이가 타고 올라간 모습만 모아도 이 성의 오랜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뙤약볕으로 인해 흐르는 땀을 해산루에 올라 추슬러본다. 또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마져도 존재할 수가 있으려나. 괜한 걱정을 하며 또 다른 길을 걷는다.

 

 

오랜 세월에 흐릿환 흔적의 편액과 해산루 위에서 바라다 본 한가한 모습의 보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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