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송광사를 찾아 가다가 보면, 26번 도로에 명덕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좌회전을 하여 명덕교를 지나면서 보면, 산에 굴을 파고 지은 듯 한 전각이 보인다. 그 밑으로는 인법당이 있는데, 이 절은 대한불교 조계종 김제 금산사의 말사인 단암사라는 절이다.

 

700년 전에 세운 인법당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688번지에 해당하는 단암사.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어 주변 경관이 그럴 듯하다. 이 단암사는 고려 말에 서암이 창건을 하였다고 하니, 벌써 700년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단암사에도, 전북 지역의 모든 사찰을 중건하였다는 일옥 진묵스님이 주석했다고 한다.

 

단암사는 '다남사(多男寺)'라고 했었다는데, 언제 단암사로 고쳐 불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말 그대로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잘 낳았는가 보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법당 뒤, 새로 조성한 미륵전 뒤편 바위 굴 안에 미륵입상이 있기 때문이다. 말은 미륵이라고 하지만, 그 형태는 미륵인가는 분명치가 않다.

 

미륵굴 안에 조성한 미륵입상. 7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색을 입혀 놓았다.

지금은 철재 계단을 조성해 놓앗다. 예전에는 이 계단이 가파라 줄을 잡고 오르내렸다.

 

지금은 굴 앞으로 새롭게 미륵전을 조성하고 뒤편을 유리로 막아놓았다. 적멸보궁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는데, 뒤편 바위 위에 조성한 미륵은 색을 입혀 놓았다. 지금은 미륵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조성했지만, 예전에는 가파른 바위계단을 줄을 잡고 올라 다닌 흔적이 보인다.

       

많은 전설이 전하는 미륵굴

 

이 단암사 뒤편 미륵전은 깊지 않은 굴처럼 조성이 되었다. 그런데 이 굴에는 전설이 전한다. 예전 이 굴에서는 절의 식구들이 먹을 만큼 쌀이 나왔다. 절에 사람이 많으면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양이 나오고, 식구가 줄면 그 숫자만큼 먹을 수 있도록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절에서 일을 하는 공양주가 욕심이, 나서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굴을 찔러댔더니 쌀이 안 나오고 피가 흘렀다는 것이다.

 

그 뒤 굴 속에서 나오던 쌀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이 단암사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말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버리는 것이었다. 왜병의 장수가 이상히 여겨 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굴 안에는 서연이 가득하고 미륵불이 현신해 있었다는 것이다. 왜장과 병사들은 하루 동안 그 곳에서 정성을 드리고 나서야 말이 움직였다고 한다.

 

전설이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들을 많이 낳는다는 '다남사'라고 불렀던 점이나, 이곳에서 쌀이 나왔나는 전설 등은 모두 이 절이 영험한 도량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한창 불사를 하고 있는 단암사. 그런데 그 불사를 보는 순간,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미륵전은 굴 앞쪽에 새롭게 조성하였다. 흡사 인법당 지붕 위에 지은 듯하다.

 

새롭게 조성하는 불사로 인해 유명해질까?

 

지난 4월 30일, 송광사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절벽 안에 있는 미륵전을 보고 단암사로 발길을 돌렸다. 밖에서 볼 때는 한창 불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막상 절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기가 막힌다. 새롭게 조성하고 있는 전각은 목재로 지은 집이 아니다. 커다란 트레일러 적재함 외벽을 방수목으로 둘러 목재집인 듯 보였던 것이다.

 

미륵전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주지스님인 대명스님이 나오신다. 일을 하는 목수들과 다를 바가 없다. 허리에는 연장 띠를 두르고, 허름한 옷을 입고 불사에 동참을 하고 계시다. 아니, 동참 정도가 아니라 직접 목수 일을 하신다. 트레일러 밑에는 커다란 바퀴들이 그냥 달려있는 대로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안과 밖을 목재로 마감을 하고 계시다.

 

"이 건물을 전시실로도 사용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모임도 가지려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나요?"

"어쩌다보니까. 하하. 이거 유명해질 것 같아요?"

 

목재로 조성하고 있는 전시실

가까이 가서보니 트레일러다. 바퀴도 그냥 달려있는데, 단암사의 새로운 전각으로 바뀌고 있다.

 

조성이 다 끝나면 어떻게 변해있을까?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트레일러 전각이니, 생긴 그대로 유명해질 것 같다. 큰 돈 안들이고 전시장과 방, 그리고 창고까지 해결이 되었다고 호탕하게 웃으시는 대명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이란 참 별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불사를 마치는 날은 필히 다시 한 번 찾아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린다. 아마 단암사는 전설과 함께, 색다른 모습으로도 유명해지지 않을까?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고찰 송광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송광사동종 (松廣寺銅鐘)’이 자리한다.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한다. 범종의 ‘범(梵)’이란 범어에서 ‘브라만(brahman)’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청정’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 하는 범종은 은은하게 울려 우리의 마음속에 잇는 모든 번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범종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울려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부처님에게로 이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

 

 

중생의 번뇌를 가시게 하는 범종

 

절에서 종을 칠 때는 그저 치는 것이 아니다. 새벽예불 때는 28번, 저녁예불 때는 33번을 친다.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욕계(慾界)’의 6천과 ‘색계(色界)’의 18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을 합한 것이다. 즉 온 세상에 범종 소리가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저녁에 33번을 울리는 것은 도솔천 내의 모든 곳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지옥까지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이나 범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종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 종소리를 듣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지옥에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안성 청룡사의 종에는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범종의 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

 

 

크지 않은 송광사 동종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조성된 보물인 종루가 있다. 그 종루 한편에 자리를 하고 있는 송광사 동종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크지 않은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다.

 

동종의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殿牌)가 있다.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조선조 숙종 때 만들어진 동종

 

현재 송광사의 동종은 사용을 하지는 않는다. 종루에 그대로 보관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동종에 쓰여 있는 글을 통해서 이 범종은 숙종 42년인 1716년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영조 45년인 1769년에 이 범종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전국에 있는 범종을 보면 참으로 놀랄만하다. 어떻게 종의 겉부분에 이렇게 아름답게 조형을 한 것이라? 종의 거는 부분인 용뉴는 대개 용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많은 글자와 보살상, 비천인, 유두, 넝쿨무늬 등을 어떻게 조각을 한 것일까? 한꺼번에 조형을 해야 하는 범종이다. 그 범종에 이런 다양한 것들을 새겼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장비를 갖고 조형을 한 것이 아니다. 거푸집을 만들어 그 안에 쇳물을 부어넣어 만들어 낸 범종이다. 물론 나름 정리를 했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형태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어 낸 것일까?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범종, 그 종소리가 듣고 싶다. 오늘은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예불시간에 맞춰 찾아가 종소리라도 듣고 싶은 날이다.

‘비가비’란 말이 있다. 비가비란 양반가의 사람으로 소리꾼이 된 사람을 말한다. 이 비가비는 우리 창극사를 통 털어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가중호걸’이라 불리는 권삼득 명창이다. 권삼득명창은 조선조 영조 47년인 1771년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태어났다.

 

판소리가 처음으로 생긴 후 정조, 숙종 때 활약을 한 권삼득 명창은 전기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권삼득명창에 판소리 일대기에 기억할만한 소리꾼이다. 그러나 오래전의 명창인지라, 그 명성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몇몇 마디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한 서책에는

 

 

권마성(勸馬聲) 소리제를 응용하여 ‘판소리 설렁제’라는 특이한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제는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 내는 성음인데 〈흥보가〉에서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에서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 여러 대목에 쓰이고 있는바 권마성과 같이 매우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권삼득명창

 

옛적에 권삼득(權三得)이라는 명창이 있었는디, 그 사람은 상사람이 아녀, 향반(鄕班)의 자제니께로, 그러니께 비가비구머잉. 그 양반이 유시적부텀 허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창극조에 미치니 부모는 수삼 그걸 버리라 권유혔든 기여.

아 생각혀보더라고? 양반 허는 일이간디? 그래도 듣질 않은게로 가문에 수치라 문중에서 모여갖고 직이기로 의논이 됐던 기여.

그 양반도 죽기로 작정을 허고서 거적을 썼는디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 소청이 있노라 허드랑게. 그게 뭔고 허니 가조 일곡을 부르고 죽겄노라 허는 거 아니겄어?

기왕지사 직이기로 작정은 혔이니 죽는 사람 소원 하나 못 풀어주랴 허락을 허고 모두 빙 둘러서 듣는디 거적 밑에서 새나오는 가조 일곡이 그만 사람으 오만간장을 다 녹이지 않았더라고? 울음바다가 됐당게로. 그래 하도 가긍허여 문중이 다시 의논을 혔지야.

족보에서 활적하고 내쫓기로 혔다이. 참말이제, 장혀. 대장부여. 목심을 버맀이믄 버맀지 창극은 안 버맀인게로. 말이 쉽지. 그런게로 천하의 명창이 된 거 아니더라고?

 

 

박경리의 『토지』(솔출판사, 1993)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곳에서도 권삼득명창을 책에 기술할 만큼 뛰어난 소리꾼이다.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소리조를 보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를 했다. 그를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 부른 것도 권삼득명창의 소리가 우렁차기 때문이다.

 

권삼득명창은 하한담(하은담)과 최선달에게서 소리를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소리꾼들은 초기소리를 한 명창들로, 우리 초기 판소리는 장원을 한 사람의 사당에 가서 축원을 하는 <홍패고사>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하한담, 최선달, 우춘대 등 초기명창을 지난 후 가장 연배가 높은 권삼득명창도 이런 초기소리를 했을 것이다.

 

 

권삼득명창의 흔적을 찾아가다.

 

완주군 용진면 면소재지에서 지방도를 따라 소양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에 마을이 보인다. 마을 길 안내판에는 <권삼득명창 출생지>란 작은 안내판에 하나 부착이 되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권삼득명창의 생가터를 알리는 비가 하나 서 있고, 그 안에 일각문이 있다. 일각문 뒤편으로는 ‘충현사’라는 제각이 보인다.

 

철책으로 담장을 친 안에 서 있는 작은 비 한 기. 비에는 <권삼득 선생 출생지>라고 머리말을 쓰고 그 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 명창이신 권삼득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1771년(영조 47년) 안동 권씨 래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41년(헌종 7년)에 별세하였다. 사람, 새, 짐승의 세 소리를 터득했다 하여 삼득(三得)이라 불리웠으며 본명은 정이다. 양반 출신 광대로 창에 천부적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숲속에서 새가 날아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판소리사는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전하는 이야기들이 기록된 문화의 거개이다. 하지만 그 많은 명창들의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이야기가 가감이 되기도 한다. 하기에 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서로 중복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콩 서 말을 지고 용소로 떠나다.

 

권삼득명창은 집에서 광대 짓을 한다고 쫓겨난 후,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향한다. 조선창극사에서 정노식은 초기명창의 이름을 들면서 하한담과 최선달, 우춘대 등에 이어 ‘고송염모’라는 네 명을 지칭한다. 고수관과 송흥록, 염계달과 모흥갑이다. 연배가 높은 권삼득명창을 이 네 명의 이름밖에 놓은 것이다. 권삼득명창이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내려가 득음을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보면, 뒤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소리공부를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권삼득명창은 남원 지리산 자락 춘향이 묘가 자리한 맞은편, 용소폭포에서 득음을 위한 소리공부에 전념을 한 것 같다. 이곳에도 <국창 권삼득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뒤편으로는 육모정이 있고, 앞으로는 용소 푸른 물이 바위를 미끄러져 깊은 소 안으로 자맥질을 한다. 콩 서 말을 짊어지고 이곳에 온 권삼득명창은 소리 한 바탕이 끝날 때마다 콩 한 알을 소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구룡폭포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소리공부에 전념한 권삼득명창. 콩 서 말이 모두 용소로 들어가기에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을까? 대 명창으로서 명성을 얻기 위한 그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하기에는 쉽지가 않다. 오늘 이 두 곳의 소리꾼의 흔적을 돌아보면서, 한 사람의 예인(藝人)이 바로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요즘처럼 반짝이는 스타가 아닌, 진정한 소리꾼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모악산에 오르면 꼭 한 가지 빠트리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전북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대원사 용각 부도를 찾는 일이다.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용각 부도는, 용을 새겨 넣은 조각솜씨로 보아 당 시대의 고승의 부도로 여겨진다. 이 용각 부도를 찾아보는 것은 뛰어난 조각솜씨도 일품이지만, 찾아볼 때마다 조금씩 색다른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다

 

이 용각 부도는 모두 세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기단위에 옥신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았다. 상륜부는 부분적으로 손실이 되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백색 규암으로 조성한 이 부도는 석질이 연약하여 많이 마모가 되었다. 높이 187cm의 크지 않은 이 부도는 대석은 땅에 묻혀있다.

 

부도 옥신의 위아래에는 띠를 두르고 있으며, 하단의 띠 위에는 18개의 겹으로 된 연꽃을 둘러 새겼다. 중앙에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 솜씨는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하다. 섬세하게 하나하나 금방이라도 곧추세울 듯한 비늘이 온몸을 덥고 있는 용. 두 마리의 용은 그렇게 몸을 비틀고 탑신을 감싸고 있다.

 

두 마리의 용이 옥신을 휘감고 있다. 비늘 하나하나도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두 마리의 용은 발톱을 세우고 여의주를 다투고 있다. 

 

머리는 뿔이 나 있으며 입 부분에는 길게 수염이 나 있는데, 이 또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두 마리의 용은 발로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살아 승천을 할 만한 이 두 마리의 용은 몸으로 부도를 감싸고 있다.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대원사 용각 부도. 언제나 들러서 돌아보고는 하지만 늘 그 느낌이 달라진다. 그것은 계절이나 일기에 따라서, 그 용이 보이는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모습이 정말 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늘 이 부도가 달라진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용각 부도의 용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때문인가 보다.

 

 옥신의 아래는 띠를 두르고 18개의 연꽃을 새겨 주위를 둘렀다

 

이것도 용처럼 생겼는데?

 

대원사의 향적당 뒤를 돌아 부도가 있는 산으로 발을 옮겼다. 대원사에는 모두 6기의 부도가 있다. 향적당 뒤편 모악산 중턱에 용각 부도를 비롯해 4기가 있고, 20m 정도 위에 2기가 있다. 부도는 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보호철책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용각 부도를 돌아보다가 보니, 그동안 보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띈다.

 

용각부도 서쪽 하단부에는 흡사 새끼 용으로 보이는 조각이 있다. 머리와 뿔 등이 보인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용처럼 생겼다. 용각 부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한편 용머리가 있는 밑으로 영락없는 작은 용 한 마리가 있는 것 같다. 반대쪽으로 가서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조각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용의 머리에 뿔이 난 듯한 모습이다.

 

옥신의 상부에도 띠를 두르고, 밑으로는 구름을 새겨 넣었다.

 

대원사 용각 부도를 갈 때마다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볼 때마다 무엇인가 다른 점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는 몰라도, 문화재는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 재미를 느낀다. 그래서 하고 한날 온 땅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이런 것을 발견할 때마다 신기해 들여다보고는 하는 것도, 아직은 더 돌아다닐 힘이 남아있기 때문인가 보다.

 

부도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괜히 혼자 헛웃음을 날린다. 참으로 허황된 생각을 혼자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용이 새끼용을 낳았나?' 하는 생각 말이다.


배꽃재’라고도 하고, ‘배꽃고개’ 혹은 ‘배티재’라고도 했다. ‘이치재’는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대둔산 옆 자락을 끼고 넘는 도로의 정상에 있는 고개마루턱이다. 정확히 말을 하자면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을 연결하는 고개를 말한다.

이 이치재는 임진왜란 때 3대 대첩지의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그리고 이치대첩을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는다. 이치전투는 그럴 만큼 적을 완전 섬멸한 승리의 장소이기도 하다.


황진장군의 전승기념비가 서 있는 곳

그 고개마루의 휴게소 앞이 바로 임진와란 때 대승을 거둔 뜻 깊은 장소이다. 지금은 그저 이치대첩지란 비가 서 있고, 후에 세운 ‘황진장군의 이치대첩비’ 가 있다. 그곳에서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 왜군을 맞이하여 대승을 거둔 곳이다. 당시 왜병의 시체가 수 십리에 즐비했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만하다.

왜장 <고바야가와 다카가게>가 이끄는 수만의 왜병은 금산에서 웅치 방어선을 뚫고 호남의 수도라는 전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는 하동을 거쳐 올라온 왜병들과 연합으로 전주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동북현감 황진장군은 남원진에서 급히 전주로 올라와, 안덕원까지 침입한 적을 물리쳤다. 그리고 바로 이치로 자리를 옮겨 휘하의 장수인 공시억, 위대기,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사력을 다하여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금산군 진산면의 어르신들께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아군들의 치는 징 소리가 골짜기를 울려, 떠날 갈 듯 했다는 것이다.

계룡산과 지리산의 산신들의 각축장이 된 대둔산의 전설

예전에 대전KBS에서 방송을 할 때, 책을 내기 위해 이치재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전라북도 완주를 거쳐 금산으로 넘어오다가 진산면에서 들은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치재에서 대둔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전라도 쪽은 기암괴석으로 되어있고, 충청도 쪽은 밋밋한 산이기 때문이다.


왜 대둔산의 형태가 양편이 그리 달라진 것일까?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양도의 산이 달라진 것이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이 들려주신 대둔산의 전설

옛날에 지리산 산신과 계룡산 산신이 만났어. 바로 이 대둔산이 양산의 중간쯤이 되거든. 그래서 두 산신이 음식을 준비해서 이곳에서 만났는데, 지리산과 계룡산의 산신이 둘 다 여자였던 거야. 두 산신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언니, 동생을 정하기로 했지. 그래서 내기를 해서 언지 동생을 정하기로 한거야.

두 산신은 하나, 둘, 셋을 세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대둔산에 있는 돌들을 바람으로 날려 상대 쪽으로 많이 날려 보내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했지. 다음날 아침 두 산신이 하나, 둘을 세었는데, 그런데 계룡산 산신이 셋을 세기 전에 미리 바람을 불어버린 것이야. 그래서 충청도 쪽 돌들이 모두 날아가 전라도 쪽에 쌓였다고 전하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 듯도 하다. 9월 4일 늦게 도착한 대둔산 이치재. 주말 이치재를 넘는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고 있지만,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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