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 위에 적루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오성지(五星池)[<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옹성 문 위에 보면 구멍 5개가 나란히 뚫려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성지로 일종의 소화를 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는 시설이다. 이 오성지는 장안문과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팔달문의 옹성문에도 조성을 했다.

 

이 오성지가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있는데, 왜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에는 없는 것일까? 눈이 쌓인 창룡문을 돌아보면서 그 이유를 나름 생각해본다. 물론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옹성의 형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렬로 선 옹성의 문은 군왕의 위용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은 우리나라의 성문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장안문의 앞으로는 북옹성을 쌓았는데, 그 중앙에 옹성의 문을 달았다. 옹성의 문과 장안문은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이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의 문이, 성문의 문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것은 위용을 보이기 위함이란 생각이다.

 

평산성인 화성에는 해자가 없다. 주변이 모두 논밭이어서 해자가 없어도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오기가 쉽지가 않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으로 이어를 한다거나, 행궁에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인 융건릉으로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행차를 한다면 이렇게 일직선상에 문이 나 있지 않았으면 위용이 있겠는가?

 

 

하기에 그 옹성의 문 위에 적의 공략시에 화재를 대비해 오성지를 조성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꼭 오성지가 없다고 해도 장안문이나 팔달문을 공략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장안문의 양 편에는 적대를 두어 포를 설치하고 있고, 팔달문에도 남포루와 지금은 사라진 남공심돈이 있어 막강한 화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을 튼 창룡문과 화서문

 

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3 척 되는 곳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1척이다.

 

옹의 높이는 9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 14기를 뚫었다. 옹성 위에는 회다짐을 하고, 그 남쪽 끝에는 돌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과 통하게 하였다.

 

 

창룡문의 옹성에 대한 설명이다.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의 옹성에는 성문이 없다. 그리고 한 편을 튼 형태로 조성을 했다. 옹성의 문이 없으니 당연히 오성지도 없다. 그런데 이곳은 왜 문을 달지 않고 한편으로 성을 튼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옹성의 문이 없다면 적의 공략을 막아내는 대는 어렵지 않을까?

 

창룡문과 화서문이 공략하기가 더 어렵다

 

15일 아침. 이른 시간에 화성으로 나갔다. 1박 2일로 여행을 할 계획이었으나 여기저기 취재 요청이 들어오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가 되었다. 눈이 쌓인 화성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줄을 지어 지나간다. 요즈음 화성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창룡문을 꼼꼼히 따져본다. 굳이 오성지를 마련하지 않고, 한편을 튼 상태로 옹성을 축성했는가를.

 

창룡문을 돌아보면서 수긍이 간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은 옹성의 형태가 같다. 창룡문의 앞은 내리막이다. 공성무기를 끌고 올라가기가 쉽지가 않다. 거기다가 파문(破門)을 하기 위해 공성무기를 옮긴다고 해도, 옹성을 거쳐 성문을 깨기란 날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우선은 옹성의 양편이 치와 같이 돌출이 되어있다. 그곳을 통과하는 것만도 어렵다. 어렵게 그곳을 지나 옹성안으로 들어가면,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거기다가 옹성과 성문 사이가 불과 12보 정도이다. 그 안에서 성문을 깰 수 있는 공성무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은 축성과 구조물을 조성한 화성. 그 문 하나에도 일일이 지형과 쓰임새를 보고 축성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옹성을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왔다. 저편 동장대와의 사이에 동북공심돈과 동북노대가 보인다. 창룡문을 취하기 위해서 성문으로 다가간다면, 그곳에서 쏘아대는 화력을 당해내기도 어려울 듯하다. 화서문의 곁에도 서북공심돈이 자리를 하고 있지 않던가? 문루나 옹성에 오성지가 없어 행여 화를 미치지 않을까를 생각해 낸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괜한 걱정 떨쳐내고, 눈길을 걸어 화성의 설경에나 취해보아야겠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축성을 하였을 뿐 아니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화성은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9월에 완공되었다. 28개월 만에 이렇게 거대한 성을 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동원된 모든 인부들에게 적정한 노임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화성을 돌아보는 많은 사람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된 화성

 

화성의 축성시에는 많은 기물이 동우너되었다. 거중기와 녹로 등 신 기재를 특수하게 고안해 사용하였고, 이런 장비를 이용해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은 축성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다. 그 뒤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성의 성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하였다. 성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아직까지 복원이 되지 못한 시설물은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등이다.

 

공사실명제로 축성을 한 화성은 공사를 맡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세세하게 적어놓았다

 

화성을 그냥 돌아보았다니

 

요즈음 들어 날씨가 풀리면서 화성에는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화성을 찾아와 성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 관광객에게 물어보았다, ‘화성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냥 돌아보았노라고.

 

그래서 화성을 좀 더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화성에서 이것들은 꼭 찾아보라고. 1. 공사실명제판 2. 성벽 위에 거대한 연못 3. 장안문의 성혈 4. 성벽에 남긴 야질흔적 5. 성을 지탱하는 적심돌 등이다.

 

화성은 철저하게 실명제에 의해서 축성이 되었다. 공사구간마다 책임자들이 그들의 주도아래 성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성벽에 그곳을 축성한 자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았다. 이 축성실명제의 표시는 화서문과 창룡문 등의 성문의 바깥쪽 벽에 새겨져 있다.

 

장안문의 옹성 위에 마련한 소방시설인 다섯개의 구멍인 오성지 

 

'화성성역의궤'‘<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만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낸다. 오성지를 설치하였는데, 전체 길이는 14, 너비는 5,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라고 적고 있다. 장안문의 북옹성에 설치한 오성지를 설명한 글인데, 팔달문의 남옹성에도 오성지를 설치하였고 그 크기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성지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였는데, 옹성문이 없는 창룡문과 화서문에는 오성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작은 규모지만 중요한 암문 중에서 동암문과 북암문에는 오성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성지 뒤편 위에 커다란 저수통을 만들고, 그곳에 구멍을 다섯 개 뚫어 옹성문 위에 설치한 것이 오성지이다. 적의 화공으로부터 성문을 지키는 한 방법이다.

 

장안문의 기단석에는 많은 성혈이 파여져 있다.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다. 이 장안문은 사실 신앙의 대상물이었다. 장안문이라는 상징성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정조대왕이 한양에서 화성행궁으로 오갈 때 이 장안문을 지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안문의 안쪽 왼편 기단석에 보면 성혈(性穴) 이 보인다. 대개 성혈이란 아주 오래 전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신앙이라고 하지만, 화성은 200년 전에 축성되고 난 후 이 성혈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양에 과거라도 보러 가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이렇게 정성을 다 해 성혈을 조성한 것은 아니었을까?

 

성돌을 쪼개내기 위해 파 놓은 야질의 흔적들

 

화성을 밖으로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돌에 야질의 흔적이 보인다. 야질이란 성을 쌓을 돌을 쪼개낼 때, 커다란 바위의 계획선 위에 띄엄띄엄 원뿔형의 구멍을 정으로 파낸다. 그 다음 바짝 마른 밤나무나 소나무 따위를 그 구멍에 맞게 깎아서 박아 넣은 후에 물을 뿌린다. 물에 불어난 나무가 바위를 쪼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우리말로 야질이라고 하는데 고대로부터 써 오던 기술이다. 이 야질의 흔적이 성벽 곳곳에 남아있다.

 

가운데 큰 돌이 성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돌인 적심돌이다

 

화성은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기울어져 있다. 2~3% 정도 안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매우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 그 성이 단단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성벽의 중간중간에 적심돌을 하나씩 끼워놓는다. 적심돌은 크고 깊게 박혀있는 돌로 그 길이가 5m 정도로 안으로 들어가 있다. 한 마디로 성벽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돌이다. 이 적심돌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있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쏠쏠하다. 하지만 이런 것을 모르고 그냥 걷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다. 앞으로 화성을 걷는 일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진정한 화성을 멋스러움에 취해보기를 바란다.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에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수원성은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았으며,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수원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은 ‘팔달문’이요, 북문은 ‘장안문’이다. ‘팔달(八達)’이란 그야말로 팔방 어느 곳이나 다 통한다는 뜻이요, ‘장안(長安)’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서 있는 문으로 그 건축구조가 특이하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 앞은 ‘성시(成市)’

팔달문은 화성의 남문으로 그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기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곳의 지형을 살핀 것으로 보인다. 이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정하기 위해, 전국의 명당이라는 곳을 직접 다니면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달마동, 용인 등, 능터로 좋다는 곳을 직접 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정조가 직접 거론한 곳이 바로 수원이다. 그리고 이곳에 화성을 축조한 것이다. 아마도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기 전에 미리 한 일은,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들어설 자리에 많은 사람들을 옮겨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거북산당’이라는 당집이 있다. 이 당집은 화성을 축조할 즈음에 생겨난 것이라고 전한다. 아마도 남문 밖에 성시(시장)을 개설하고, 그곳에서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노역자들이 장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으며, 수원 상권의 중심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들어갈 곳이 없는 성문, 아름다운 옹성

팔달문의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는 다포계 양식이며,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헌데 남문과 북문의 옹성을 보면 동문인 창룡문이나, 서문인 화서문과는 또 다른 형태이다.


 

2011년 8월 28일 현재,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보수 공사중이다. 팔달문의 자료는 2004년 8월 24일에 답사한 자료이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를 할 때 고증하여, 화성성역의궤의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크다. 현재 보수 공사 중인 팔달문의 옛 모습을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으려는지, 하루 빨리 성벽의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옹성에 홍예문을 낸 팔달문과 장안문

남문과 북문의 윗부분의 중앙으로는 통행할 수 있도록 용도를 내었다. 옹성의 벽은 양 옆면에 총안과 현안을 둔 ‘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 대문 모두 안쪽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누각을 세웠다.


양 대문의 형태는 같으며, 규모와 건축수법 등이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하다. 화성의 성문은 당시 다른 성문의 장점만을 취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으로 손꼽힌다.

정조의 백성사랑의 근본인 장안문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1794년 2월 28일,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원래 장안문을 세울 자리는, 현재 장안문의 자리가 아니었다. 처음에 정약용이 계획한 화성의 길이는, 3,600보인 4.2km였기 때문이다.



1794년 1월 14일 화성의 공사현장으로 내려 온 정조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깃발이 꽂힌 것을 보았다. 정조가 그 이유를 채제공에게 물었더니,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이주를 할 곳이라는 대답이다. 정조는 즉시 이곳으로 이주를 해온 백성들이 또 이주를 하는 불행을 겪지 않게 성벽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해, 백성들의 민가를 다치지 않게 민가 밖으로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벽의 길이가 길어졌다. 이곳을 보면 성이 몇 번 굴곡져 장안문과 북수문인 화홍문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산 정조의 백성사랑은 이렇게 끔직했다. 이 장안문이 조선의 중심이 되게 해달라는 제문을 보더라도,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중심부에 두고 싶어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북으로 가는 길목인 장안문, 남으로 가는 길목인 팔달문. 그 두 문의 이름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장안문인 북문은 이곳을 기반으로 북으로 한 없이 뻗어나가는, 문물의 중심이 되고 싶은 뜻이 숨어있다는 생각이다. 팔달문 또한 이 땅 어디까지라도 뻗어나가겠다는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아마도 대로인 이 두 곳의 문에서 이산 정조는 적을 섬멸하고, 더 큰 조선을 건설한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장안문의 용도에 서서 장안문의 현판을 바라다보며,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참 백성을 위할 줄 모르는 이 시대에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산 정조를 왜 우리가 ‘정조대왕’이라고 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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