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냥 공원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공존을 하고 있다. 이런 공원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다. 15일 일찍 오산을 찾았다.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일을 보고 난 후 오산시 금암동 산 53번지 일대에 조성한 오산금암리 지석묘군을 찾아보았다.

 

이 고인돌이 있는 금암동 일대는 주변에 여기저기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앞으로는 시원한 도로가 뚫려있지만, 아파트까지 인 듯 길이 막혀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고인돌 공원이라고 명명한 공원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어, 누구나 돌아보기 좋게 조성을 하였다.

 

아무 때나 아이와 함께 이곳을 나와 한 바퀴 돌아보고 갑니다. 공기도 좋고 아이에게 잘 모르는 것이지만 자료를 보고라도 설명을 해 줄 수가 있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기도 하죠. 우선은 역사적인 곳이 마을에 있다는 것도 즐겁고요.”

뒤편 휴먼시아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아무개(, 38)씨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걷다가 하는 말이다.

 

 

개석식 고인돌 9기가 널린 곳

 

경기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금암리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좌우에 길고 넓은 받침돌을 세우고 앞뒤로 조금 좁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는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이 있다.

 

오산시 금암동에 위치한 9기의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땅 위로는 커다란 바위만 노출이 되어있어 흔히 개석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금암리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윗면에 성혈이 있다고 한다. 성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민족의 신앙적인 형태의 하나로 전해진 것이며, 돌에 돌을 이용해 구멍을 파는 것이다. 금암리 고인돌 2호에 파인 성혈은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한다.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기자속(祈子俗)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 고인돌공원

 

고인돌을 촬영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낮은 목책으로 경계를 구분해 놓아 밖에서만 촬영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개석식 고인돌이라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촬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작 외형만 촬영을 할 것을 안으로 들어가 공원은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요즈음 사람들을 그저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런 공원을 와도 카메라 하나를 둘러메고 안으로 들어가 무슨 큰일이나 치르는 양 덮개돌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꼭 저렇게 촬영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3년 전인가 이곳을 왔을 때는 모두 11기의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된다는 덮개석이 있었는데, 이번에 돌아보니 9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잘 꾸며진 산책로와 여기저기 만들어진 정자, 그리고 수로와 시 한편을 읽을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경관 등 참 좋은 공원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오산 금암동 고인돌공원.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배울 수 있는 공원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이 공원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지석묘군을 돌아보다가 만난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 혹 이 바위로 인해 금암리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뒤돌아서면서 초가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오마이뉴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은, 경기도 일원의 각 마을 도당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안과태평을 위한 마을굿이다. 경기도당굿은 한수 이남의 경기도 전역과 현 인천광역시의 섬까지 걸쳐 연희가 되던 마을 제의로, 화랭이라고 하는 세습무들에 의해서 전승이 되어왔다.

 

19901010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이 된 경기도당굿은 보유자인 고 조한춘과 고 오수복이 세상을 떠난 뒤, 아직도 보유자 지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는 경기도당굿보존회에서 모든 행사 및 각 도당의 제의를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전승에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는 경기도당굿 남부지부 승경숙 지부장을 만나보았다.

 

 

처음에는 낯설기 만한 경기도당굿

 

현재 경기도당굿 이수자인 승경숙 지부장은 1986년 내림굿을 받은 후, 주로 한양굿을 배워 굿판에서 나름 잘 불리는 무녀였다. 그러다가 1993년 경기도당굿 보유자인 오수복 선생님의 권유로 경기도당굿의 전수생으로 입문을 하게 된다.

 

“1993년에 처음으로 당시 경기도당굿의 보유자이신 오수복 선생님을 뵙고 도당굿에 첫발을 내딛었어요. 당시는 경기도당굿에 이름만 들어도 내로라하는 분들이 모두 문하생으로 있었죠. 거기서 함께 끄트머리에 서서 무녀제 도당굿의 제차를 배웠어요. 오수복 선생님께서는 도당굿에서 무녀가 맡아하는 부정, 제석, 군웅 등 여자가 할 수 있는 굿거리를 저희들에게 알려주셨죠.”

 

처음에는 경기도당굿이 낯설기만 했다고 한다. 경기도의 판소리인 판배개 창으로 불러대는 도당굿의 소리가 따라 하기조차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힘든 도당굿의 춤사위며 장단, 소리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전수교육조교인 고 방돌근 선생 때문이라고. 고 방돌근 전수교육조교는 이 시대의 마지막 전악이라고 할 만큼 도당굿의 장단과 경기 시나위를 구가하고 있던 악사였다. 할아버지가 경기도의 대금 시나위의 창시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의 유지 받들어야

 

낮에는 오수복 선생님께 도당굿의 굿 제차를 배우고, 저녁에는 방돌근 선생님께 도당굿의 장단과 무가를 배웠어요. 경기도당굿은 신이 나지도 않고 까다로운 장단과 사설로 인해 고통을 받기도 했죠. 배우다가 보니 점점 그 깊이에 빠져들게 되고, 나중에는 도당굿의 소리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어요.”

 

그렇게 경기도당굿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도당굿의 모든 행사에서 거리를 맡아 자신이 가진 재주를 선보였다고 하는 승경숙 지부장. 기획 공연만 해도 50여회에 도당굿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인공연도 2회나 가졌다.

 

선생님들께 그냥 받은 재주잖아요. 열심히 할 수밖에요. 그동안 많은 곳에 공연을 다녔어요. 선생님들과 함께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공연을 했죠. 때로는 박물관에서 때로는 산사에서, 어디든지 도당굿을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달려가서 공연을 했죠. 당시 연세가 많으신 오수복 선생님께서 노구를 이끌고도 도당굿의 전승을 위해 애를 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선생님들이 이젠 한 분도 세상에 있지 않다고. 모두 세상을 떠났다. 고 방돌근 선생은 첫 개인발표회를 며칠 앞두고 세상을 하직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기도. 보유자이신 오수복 선생도 20111217일 세상을 하직했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후,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산의 굿당에서 선생님의 지노귀굿을 해드렸죠. 두 분의 선생님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들께 배운 재주를 널리 퍼트려야 하겠다고. 그래서 오산에 경기도당굿 남부지부를 개설했어요.”

 

 

그동안 50여명의 전수생 키워내

 

20121월부터 6개월 과정으로 경기도당굿의 기본적인 학습을 시작한 전수생들은, 그동안 114, 28, 316, 415명 등 53명에 달한다. 경기도당굿은 그 특성상 일반 굿과는 제차가 다르기 때문에, 6개월 과정으로는 배울 수가 없다. 하기에 꾸준히 학습을 하고 행사에 자주 참석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동안 오산에서 전수생들을 학습시키다가 보니 이동거리가 멀어 전수생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수원 팔달구 인계동 지하에 20여 평 정도 되는 연습실을 마련했어요. 선생님들께 배운 것을 온전히 전수시키고자 마음을 먹었죠. 이달 16일에 전수소를 개소하려고요.”

 

전수소의 개관을 준비하고 있는 인계동 지하에서 만난 승경숙 지부장. 경기도당굿의 온전한 전수 보전을 위해서 앞으로 많은 노력을 하겠다고 한다. 남들은 어렵다고 배우기를 꺼려하지만, 선생님들께 배운 재주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어려움을 참아내야 되지 않겠느냐며 각오를 다진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경기도당굿이 온전히 전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단을 치고 피리를 분다. 사람들은 길게 늘인 흰 소창을 어깨에 메고, 성주지경다지기를 부른다. 지경다지기란 땅을 단단하게 다진다는 뜻이다. 집안의 액을 물리치고 안과태평과, 동티가 나는 것 등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4일 오후 오산시 세교동 모회사에서 벌어진 경기안택굿 보존회(회장 고성주)의 무격들이 주관을 한 재수굿 한마당.

 

오후 5시 경부터 상을 차리기 시작해, 이 회사의 재수를 빌어주는 경기안택굿이 시작을 한 것은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그리고 굿이 끝난 시간은 5일 오전 2시가 조금 안돼서이다. 그 재수굿 중 집안에 성주신(城主神)을 놀리는 성주굿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이날 굿 중 정말 잔치다운 굿거리였다.

 

 

성주신은 가신 중의 으뜸

 

성주굿(혹은 성주거리)은 안택굿 등의 제차에도 나타나지만, 집안의 가장의 나이가 27, 37, 47, 57, 67세 등과 같이 7의 수가 드는 해 10월에 택일하여 별도로 성주굿만 따로 제차를 행하기도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10월에 집집마다 무당을 데려다 성조신(成造神)을 맞이하여, 떡과 과일을 베풀어 놓고 빌어 집안의 편안함을 바란다.’고 적고 있다.

 

성주는 가신 중의 으뜸이다. 어떤 형태의 집이 되었던지 그 집에는 성주가 좌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신 중의 으뜸인 성주는 대개 대들보나 안방의 문설주에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것은 성주를 받을 때의 경우이고, 일반적인 안택굿이나 재수굿 등에서는 성주를 별도로 모시지 않는다.

 

 

열린 축제의 진수 보여주는 성주굿

 

성주굿은 재담과 해학, 춤과 소리, 그리고 신성(神性)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열린 축제의 가장 흥겨운 제차이다. 먼저 성주올리기라고 하여 동쪽으로 뻗은 솔가지를 꺾어, 소지로 묶는다. 그리고 쌀을 담은 그릇에 솔가지 성주대를 꽂아 조무(굿을 도와주는 무당) 한 사람이 그 자리를 붙들고 앉는다. 주무는 징을 치면서 성주신은 청배한다.

 

성주가 내리면 성주대가 움직인다. 성주대는 성주가 뜬다고 하는 경우에는 밖으로 뛰쳐나간다. 집안에 좌정해야 할 성주가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그 성주를 모셔 집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애를 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날은 마침 성주가 바로 회사의 이층으로 올라가 대표 권아무개(, 46)의 집무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신탁인 공수를 주고 난 후, 다시 굿청에서 내려와 권대표와 함께 신바람 나게 춤을 춘다. 성주굿의 재미는 바로 이런 놀이판에 있다. 우리 굿은 그냥 축원을 하고 신탁인 공수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질펀한 춤과 소리, 그리고 놀이가 함께하기 때문에 열린 축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주굿의 백미 지경다지기

 

성주굿의 백미는 성주지경다지기이다. 집안의 대들보에 흰 소창을 길게 묶어 내리지만, 이날은 회사의 공장과 사무실을 겸한 곳에서 굿이 이루어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에 소창을 묶고 길게 늘여놓았다. 그리고 고성주회장과 무녀들이 그 끈을 어깨에 메고 지경다지기를 했다.

 

지경다지기는 성주축원을 한 다음에 경기 창으로 소리를 한다. 소리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흥겹다. 절로 춤이 나온다. 그렇게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땅을 밟는 것이다. 춤을 추면서 땅을 밟는 행위는 기본이 잘 다져져 회사가 잘 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한 시간 여를 그렇게 소리를 하고 난 뒤, 성주상에 실타래와 함께 묶어 놓았던 북어를 집안의 높은 곳에 모셔놓는다.

 

성주굿이 끝났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다. 그래도 누구하나 피곤한 기색이 없다. 또 이야기보따리가 열렸다. 굿판은 웃음과 해학이 넘친다. 그런 열린 축제 마당인 굿이 있어 경기안택굿은 전승이 되어야 한다. 그 마지막 제차를 혼자 지켜가고 있는 고성주회장의 존재가, 굿판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산시 수청동 332-4에 소재한 물향기 수목원. 수목원이란 공원이나 유원지와는 달리 다양한 식물 유전자원을 수집, 증식, 보존, 관리 등을 하고 그 자원화를 위한 학술적, 산업적 연구를 위한 시실이다. 경기도립인 물향기 수목원은 200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하여, 20065월에 개원하였다.

 

이 물향기 수목원에서 오산시가 주최하고 오산문호재단이 주관을 한 ‘2013 오산 뷰티 힐링축제가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열렸다. 다양한 체험과 공연 등을 관람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뷰티 힐링축제는 화장품 산업의 중심지로 오산시를 부각시켜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수목원에 설치한 설치미술

 

이 뷰티 힐링축제에 남다른 볼거리가 있다. 바로 21명의 작가들이 마련한 설치미술이다. 국민대 행정대학원 미술관박물관학과 김연희 주임교수가 기획을 한 이 설치미술전은 홍재주, 오순미, 윤희경, 배동호, 이재순 작가 등 21명이 참여하였다. 수목원이라는 특성상 설치미술을 전시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된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13일 오전에 개장을 하자마자 사람들은 수목원으로 몰려들었다. 각종 체험 중에 천연화장품 만들기 등 미용에 고나한 체험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여성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 설치미술전은 만경원부터 중앙광장, 수생식물원에서 흐르는 물줄기 양편에 중점적으로 설치가 되었다.

 

 

축제 메인

 

행사인 아트 인 오산(Art in Osan) 설치미술제는 자연 그리고 자연스러움이란 주제와 같이 전시작품을 통해 자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자연의 평안함과 자유를 경험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내면의 치유를 위해서 기획되었다는 기획자인 김연희 교수의 말이다. 이어서 수목원이라는 장소적 특성과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참여 작가들은 자연과 인간의 소통하는 작품을 구상하였다. 특히 이번 축제의 키워드인 뷰티와 힐링의 진정한 의미가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시작됨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전한다.

 

다양한 작품들 선보여

 

만경원 터널의 첫 작품은 홍제주 작가의 축제였다. 홍제주 작가는 중앙대 서양학과를 졸업한 후 국민대 행정대학원 미술관박물관학 전공을 수료했다. 이번 작품의 제목은 축제였으며, 2013 수성화성연극제 공공예술 프로젝트인 ‘3(some)'총괄코디네이터 등을 담당하기도 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포도형태의 조형물은 풍성함과 축제의 즐거움을 돋보이게 한다고 한다.

 

 

로마신화의 박카스, 그리스 신화속의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 포도주를 관장하는 술의 신이다. 아테네의 민주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6세기경, 디오니소스 축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디오니소스 축제는 본능적이고, 사람을 끝없이 취하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었다. 또한 전통문양에서의 포도의 의미는 장수, 다복, 부귀, 풍요와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조선후기에는 연속된 넝쿨포도가 수태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넝쿨손은 용의 수염을 닮았다고 하여, 큰 인물의 잉태를 의미하였다. 기븜, 박애, 자선의 꽃말 역시 힐링 용어이다라고 말한다.

 

소녀-하늘보기라는 설치미술을 전시한 작가 염시권은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조소전공을 하였다. 이탈리아 국립까라라 미술원조각과를 졸업한 작가는 작품 설명에서 소녀들은 맑고 투명한 순수한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계단은 시간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색채는 자연이 계절마다 만들어내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을 이야기한다.’고 설명한다.

 

 

훼손으로 애를 먹기도

 

전시기간 동안 작품설명 등을 위해 전시장을 지킨 기획자인 김연희 교수는 관람객들이 작품에 손을 대거나, 작품들을 손을 뻗어 따가기도 하는 등, 작품에 대한 소중함을 제대로 몰라 애를 먹었다. 작품 전시를 하면서 손에 떨어진 작품을 붙이느라 접착제를 아예 들고 다녔다고 어려움을 이야기하기도.

 

이 작품들은 전시를 마친 후 오산문화재단 문화공장오산(오산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야외전시로 상시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오산을 들려 물향기 수목원도 돌아보고, 오산미술관 야외 전시장을 찾아가 설치미술전도 돌아보기를 권유한다.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62-1 외에 소재하고 있는 사적 제140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독산성은 다른 이름으로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독산성은 선조 25년인 1592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이 곳에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원래 백제 때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한다. 후에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중요한 거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조 27년인 1594년에는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인 1602년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였다. 그 후 정조 16년인 1792년과 20년인 1796년에도 다시 공사를 하였다.

 

 

전통사찰인 보적사가 성내에 있어

 

독산성의 성내에는 전통사찰로 등록된 보적사가 자리하고 있다. 옛 암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해탈문이라는 작은 간판을 걸어놓은 곳으로 들어가면 보적사 경내가 되고, 그 뒤편에는 세마대지가 보인다. 지금은 세마대라는 누각 한 채를 지어놓았다. 보적사는 삼국시대 독산성을 축성한 후 현재의 터에 전승을 위해서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을 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조 22대 정조가 용주사를 건립할 때 재건되었을 것으로 전하는 약사전과 요사 3동이 있었다. 1987년 사적의 경관에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증, 개축하였다.

 

 

독산성의 성 둘레는 3,240m이고 문도 4개소이나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이 곳에는 세마대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 권율 장군이 산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이다.

 

독산성을 뒤덮은 잡풀

 

13일 오후, 독산성을 찾았다. 보적사를 둘러보고 난 뒤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독산성은 산 위에 축성을 한 산성이라 그런지 성벽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성은 가파른 벼랑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낮은 성벽으로 쌓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인지 모르지만 낮은 성벽으로 인해 사람들이 성벽을 타고 오를락 거리기도 한다.

 

 

사진을 촬영하면서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독산성이다. 성은 지형에 따라 대문지와 암문, 그리고 치가 여기저기 보인다. 그런데 성벽 위로 걸으면서 보니, 성벽이 보이지 않는 곳이 상당부분이 있다. 도대체 어디가 성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성벽 주변으로는 넝쿨로 자란 잡풀이 무성하고, 그 넝쿨식물들이 성벽으로 타고 올라 성을 모두 덮어버리고 있다.

 

암문 앞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그나마 암문 입구에는 나무까지 자라고 있다. 암문을 접근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명색이 사적으로 지정이 된 문화재인데, 어찌 이렇게 방치를 한 것일까? 성이 낮아 사람들의 손으로 성벽을 가득 덮은 잡풀을 얼마든지 정리를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성벽에 가득한 잡풀 걷어내고 관리해야

 

여기저기 쓰인 우리 모두 문화재를 보호합시다-오산시라는 푯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것은 성이 아니고 잡풀더미라고 표현을 해야 맞을 듯하다. 여름철에 비가 내려 잔뜩 자라버린 잡풀들이, 온통 성벽을 타고 올라 성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보적사가 자리한 주변에만 성이 깨끗하게 보인다. 높지도 않은 성벽에 가득한 잡풀들. “이렇게 문화재를 관리하면서 무슨 문화재를 보호하자고 하지”, 성을 돌던 관람객의 푸념어린 소리이다. 한 곳의 치에는 누군가 휴지까지 버려 볼썽사납다. 말로만 하는 문화재 사랑. 이런 모습으로 휴일을 맞아 독산성을 찾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과연 문화재를 보호하자고 할 수가 있을까? 관련 지자체의 반성이 아쉽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