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성주사지석등 (聖住寺址石燈)’. 성주사지 내에 소재한 보물 제19호인 성주사지 오층석탑 앞에 놓여있는 8각 석등이다. 이 석등은 석탑 앞에 각 부분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 석탑을 수리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 둔 것이다.

 

불교중앙박물관 관장이자 문화재위원인 흥선 스님은 절 안에 놓는 석등에는 불타, 진리, 지혜의 상징, 공양물 등 어둠을 밝힌다는 의미와 기능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고 했다. 사찰마다 만나볼 수 있는 석등은 대개 대웅전이나 탑 앞에 자리하고 있다. 성주사지의 석등은 중문 터를 들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석등의 형태는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성주사지의 석등 역시 머릿돌 아래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두고, 그 밑에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간주석과 받침돌로 이루어졌다.

 

성주사지의 석등은 하나의 돌로 다듬어 놓은 바닥돌과, 받침의 아랫부분은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아무런 조각이 없는 가운데기둥인 간주석은 가늘고 긴 편이다. 위 받침돌은 맨 아래의 받침을 거꾸로 놓은 듯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팔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면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1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다.

 

 

단아한 자태를 지녀

 

높이 220cm 정도인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사석에 마련된 창의 주변에 창문을 걸기 위한 구멍의 흔적이 없는 점이나, 가운데기둥이 가늘고 길어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단아한 자태로 조성이 되어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부담이 없게 조성되었다.

 

106일에 찾아간 보령시. 그 첫 번째로 만난 성주사지의 석등은 마음 편하게 답사를 할 수 있는 문화재였다. 여러모로 따져보기 위해 고민을 할 필요도,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화재였다는 생각이다. 한 가지 이 석등의 시기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아쉽다. 보령시의 석등 안내판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문화재청 안내판에는 뒤편의 오층석탑 보다 조성시기가 늦은 조선조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문화재청 안내자료까지 오류를 범해

 

그런데 문화재청의 자료에 오류가 보인다.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라고 기술하고, 설명에는 조선조의 것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문화재를 보호, 관리해야 하는 최고의 기관이다. 당연히 모든 문화재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고, 그것을 관리, 감독할 의무를 지닌 곳이다.

 

그런 문화재청의 자료에서부터 오류가 발생한다면, 도대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는 누가 지켜가야 하는 것일까? 많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보면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지정 문화재 안내 하나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한다면, 굳이 문화재청이라는 존재가 필요는 한 것일까? 철 지난 자료사진, 설명의 오류, 준비 중에 있다는 메시지. 우리 문화재청의 현주소이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문화재청의 홈페이지 성주사지 석증에 관한 문화재 설명이다. 분류에는 시대가 통일신라로 표기되어 있는데 설명은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성주사지 안내판에는 통일신라로 되어있다.  


절 있는 산을 돌아온 곳(퇴촌)인데

바람에 연기는 상방으로 접하는 구나

옛날에 놀던 곳은 뒤섞이어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은 본래 많이 바쁘다

 

고요한 방에 중과 이야기하기 아주 알맞으며

가을 등불 밝은데 빗소리에 밤은 깊어지는 구나

이어 생각하여도 보진자만 생각하니

밝은 시대였는데 역시 깊이 숨어 살았구나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세심정에 남긴 글이다. 이식은 본관 덕수이며, 자는 여고, 호가 택당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광해군 2년인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후일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벼슬은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정구, 신흠, 장유와 더불어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맡아 하였으며, 저서로는 <택당집(澤堂集)>과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세심정은 양평군 지평에서 341번 도로를 따라 용계계곡 방향으로 가다가, 덕촌리에서 좌측으로 들어간다. 마을에는 펜션들이 들어서 있으며, 다리를 건너 우측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양평군 항토유적 제2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137번지에 해당한다.

 

눈이 내리는 날 찾은 세심정

 

육각형으로 지어진 세심정, 2평 남짓한 세심정은 49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이다.

세심정에 걸린 현판. 용문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날이 잔뜩 흐리더니,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길에서 몇 번이나 혼이 난 적이 있는지라, 답사를 포기할까도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미 세심정이 가까운 곳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여기저기 길을 물어보지만, 세심정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다. 몇 번을 물은 끝에 겨우 세심정으로 향했다.

 

급기야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저만큼 정자가 하나 보인다. 세심정이다. 주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서 있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다리를 건너 세심정을 올려다본다, 눈발이 점점 세차진다. 마음이 바빠 낙엽 쌓인 돌계단을 오른다. 벌써 낙엽 위로 쌓인 눈이 미끄럽다. 세심정 위로 올라 정자를 본다. 이렇게 작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난세에 찌든 마음을 씻어냈을 정자 주인의 마음을 읽어본다.

 

490년 전에 지어진 작은 정자 세심정

 

처마를 길게 빼낸 세심정은, 육각형의 기둥으로 처마를 받쳤다


세심정은 명종 16년인 1521년 조선조 중종과 명종 때의 학자이며 정암 조광조의 수제자로 명성을 얻은 조욱(1498 ~ 1557)이, 기묘사화로 정암과 그 문하들이 화를 당할 때 화를 면하고 낙항하여 지은 정자라고 한다. 조욱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용문산중에 복거하여 그 마을 이름을 퇴촌(退村)이라 하고, 이 정자를 지어 세심정이라 이름하고, 당호를 스스로 '세심당'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정자는 6각형으로 지어졌으며, 선생의 마음을 닮은 것인지 고졸하다. 이곳에 은거한 후로 사람들은 조욱을 '용문선생'이라 칭했다고 한다. 야산 기슭에 이 세심정을 지어놓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는 조욱. 세심정 안에는 현판이 몇 개 걸려있다. 아마 선생의 평소 학문을 그리던 나그네들이 지어놓은 글일 것 같다.

 

정자 안에는 <세심정 기>를 비롯한 몇기의 게판이 걸려있다.


연당과 아우러진 세심정의 조화

 

세심정은 육각형의 정자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일곱 개의 주추 위에 육각의 기둥을 세우고, 정자의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난간 밖으로 다시 툇마루를 깔았다는 점이다. 따로 입구를 내지 않고, 여섯 면 모두 난간을 둘렀다는 점도 특이하다. 정자는 야산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노송과 고목들이 정자를 쌓고 있다. 그리고 앞쪽 계단 밑으로는 연당이라 부르는 연못이 있다.

 

연당은 석축으로 주위를 쌓았다. 정방형으로 조성한 연당은 정면이 16m에 측면은 11,5m 정도의 연못이다. 가운데는 섬을 만들고 그 위에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지금은 주변이 온통 펜션들로 들어찼지만, 처음 이 세심정이 지어졌을 때는 앞면이 트여있어 경관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세심정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눈이 점점 함박눈으로 변했다. 마음이 급해 더 이상은 지체를 하지 못하고, 정자를 내려와 돌아가려다가 안내판을 본다. 안내판에 이상한 점이 있다.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두른 후, 다시 툇마루를 내었다

세심정의 앞에 자리한 연당. 중앙에는 섬을 만들고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조욱은 1498년 8월 21일에 태어나, 1557년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경양, 호는 우암이며 본관은 평양이다.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를 하고도 벼슬에 나아기지 않고, 용문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조욱의 높은 학식과 인격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를 '용문선생'이라 불렀다. 후일 명종 때 현사로 뽑혀 벼슬을 하면서, 이황, 서경덕과도 가깝게 지냈다. 시와 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용문집>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내판에 적힌 연대가 맞질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이런 일이 허다하다. 글자가 틀린 안내판, 연대가 맞질 않는 안내판. 찢기고 더럽혀진 안내판, 외국어로 번역을 해 놓았는데 내용이 안맞는 안내판, 딴 때 같으면 한 마디 하겠지만 세심정에 올라 마음을 씼었는데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저 허~ 웃고 떠날 수 밖에.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사에도 이런 제목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나름 꽤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소재한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 안에 서 있는 비석 때문이다.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조 때 초급교육기관이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을 받은 서원을 말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하사한다. 사액서원은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함께 하사를 받게 되며, 사액서원의 시초는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비롯하였다.


낙동강 좌측은 안동, 우측은 함양에서 인재가 나온다.

남계서원은 조선조 오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명종 7년인 1552년 지방의 유생들이 세운 서원이다. 소수서원이 명종 5년인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계서원이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보다 17년 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앞에 정문인 누각을 세우고 강당 및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워, 일반적인 사원의 구조와 같다. 그러나 그 전각의 형태 등은 남다르다. 경내의 건물들이 위엄을 보이고 있고, 예사 서원과는 그 품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동강 좌측으로는 안동에서, 우측으로는 함양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정여창 선생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이 된 것이다.



명종 때 하사받은 편액은 남계와 서원이란 두개의 현판으로 되어있다(위)
입구 양편에 있는 연못과(가운데) 비가 내려 물방을을 머금은 수련(아래)

전각 안에 있는 비석에 채색을

이 곳 남계서원은 정문인 풍영루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 양편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놓았다. 그런 것 하나라도 서원을 꾸밀 때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강당을 향해 좌측 연못의 끝 길가에는 비석을 보호한 전각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계서원의 중수기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석을 보다가 의아한 점이 있다. 비석은 받침돌과 비문을 적은 몸돌, 그리고 지붕돌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이 지붕돌에 채색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비석을 보았지만, 지붕돌에 채색을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무도 아니고 돌에다가 채색을 했다는 것이 색다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비를 보호하는 전각과(위) 이 서원이 사액서원임을 알리는 비문(두번 째) 그리고 머릿돌에 칠한 채색

찬찬히 전각 주변을 돌면서 훑어본다. 머릿돌에 한 채색은 요즈음의 색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채색은 도대체 언제 저렇게 한 것일까? 그리고 지붕돌에 무슨 연유로 채색을 한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채색을 한 머릿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맞지 않는 사적의 문화재 안내판

혹 그런 내용이라도 있는가 싶어 자료로 찍어 온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한참 읽다가보니 혼란만 가미된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람. 사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연도가 잘못 기재가 되어있다. 명종 7년은 1552년이다. 그런데 명종 21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그 해가 1556년이라고 적혀있다. 14년의 차이는 어떻게 났으며, 그 14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안내판에 년도가 잘못 기재가 되었다. 명종 7년인 1552년에 남계서원을 건립했고, 14년 후인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그것을 1556년으로 적어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계산이 맞지 않을 수밖에. 문화재 안내판은 신경을 더 많이 써야한다. 그런데 국가지정 사적의 안내판에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니.


전각 안에 있는 비의 머릿돌 채색과 전각의 단청(위) 그리고 오류가 있는 안내판 

문화재가 너무 많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채색에 대한 궁금증도 풀지 못했는데, 잘못 표기된 안내판으로 인해 귀한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판 답사가 망쳐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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