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 갖가지 음식 먹으며 즐거움 누려

 

벌써 거북시장 음식문화 축제가 9회를 맞이했어요. 그동안 상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와 시장에서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없었을 겁니다.”

 

27일 오후, 장안구 영화동에 소재하고 있는 느림보 거북시장. 시장 통로 양편을 막아놓고 거리에 테이블과 의자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그 많은 자리에 사람들이 앉아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27일부터 29일까지 9회 장안문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가 시작했기 때문이다. 차한규 상인회장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가 벌써 9회를 맞이했다고 한다.

 

이날 오후 630분부터 시작한 개막식에는 수원시 원용덕 경제정책국장을 비롯하여 심언형 지역경제과장, 장안구 영화동 이학보 동장, 경기도의회 이필근 의원, 수원시의회 홍종수 부의장, 강영우 의원, 황경희 의원과 수원시상인연합회 최극렬 회장을 비롯하여 22개 전통시장 상인회장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행사 참가 관계자들 비빔밥도 함께 비벼

 

현 영화동 장안문 거북시장은 과거 영화역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시장이다. 영화역은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 이후 한양의 남쪽 역참의 중심권으로 삼았으며, 화성에 인구를 모으는 방법으로 양재역을 이곳으로 옮겼다. 당시 양재역의 관사와 관원만이 아니라, 역참에 속한 주민들 모두를 이주시켰다.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이날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에는 특별한 행사가 하나 이루어졌다. 과거 영화역에 도착한 정조대왕이 함께 화성행궁으로 행행하는 어가를 호위한 장용영무사들을 위해 술과 음식을 내주었는데 정조대왕의 그런 기록에 의해 행사에 참여한 많은 인사들이 함께 커다란 그릇에 담긴 밥을 비벼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함께 즐기는 장안문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

 

오늘 거북시장을 찾아와 각종 공연도 즐기고 맛있는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정말 즐겁습니다, 그동안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 때 볼 수 없었던 대형 그릇에 비빔밥도 비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이런 퍼포먼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즐겁네요.”

 

가족들과 함께 음식문화축제에 참가했다는 영화동 주민 조아무개(, 43)씨는 비빔밥을 가득 담은 그릇을 보여주면서 환하게 웃는다. 음식문화축제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참가한 인사들이 함께 비빈 비빔밥을 먹을 수 있으니 올해는 좋은 일이 많은 것 같다는 것이다.

 

 

오늘 장안문 거북시장 제9회 음식문화축제가 열린 것을 축하합니다. 요즘 전통시장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면서 즐거움도 나눌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 저희 시에서도 전통시장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수원시 원용덕 경제정책국장은 개막식 행사에서 인사를 통해 전통시장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면서 수원시에서도 전통시장 활성화에 더욱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이날 축사 및 격려사를 한 많은 참석인사들도 전통시장이 활성화 되어야 지역경제가 산다면서 수원시민들이 전통시장을 더욱 이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거북시장은 수원의 22곳의 재래시장 중 그 역사가 가장 오랜 전통시장 중 한곳이다. 예전 거북시장 인근에는 영화역과 객사가 있었다. 이곳은 장용외영 군사들이 묵는 곳이었고, 더구나 정조의 능행차 때도 이곳 영화역에서 가장 먼저 정조를 맞아들인 곳이다. 또한 한양으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장안문을 벗어나 이곳을 거쳐야만 했던 곳이다.

 

이 시장 일대는 영화역에 있는 말들을 키우는 마방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우리나라의 상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 중 한곳이었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 중 한 곳은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 또한 팔달문 앞의 성밖시장과 같이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 평 규모에 말을 키웠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변화한 거북시장의 모습

 

지금 거북시장은 많은 변화를 했다. 전선은 모두 지중화사업으로 인해 사라졌고, 간판과 외벽 등은 모두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저 외형상으로만 본다면 이곳이 전통시장이 아닌 어느 서구의 한 거리를 거닐고 있는 듯하다.

 

우리 장안문 거북시장은 정조대왕의 화성 축성 시, 처음으로 시장을 개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벌써 2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시장이죠. 그런 시장이 수원시에서 경관 등 사업비를 지원해 7개월의 공사시간을 거쳐 이렇게 말끔하게 변화를 했습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 61) 회장의 설명이다. 18일 오후에 찾아간 거북시장. ‘ 차 없는 거리가 진행 중인 시장 한편에는 경인방송에서 전통시장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계차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고, 시간이 가면서 점점 사람들이 발길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새 수막거리의 옛 정경 그리워

 

장안문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새 수막거리였다. 예전에는 여정에 지친 행인들이 국밥 한 그릇에 텁텁한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다. 장안문을 벗어나 이 거리에 들어서면, 손님을 맞이하는 분내 나는 주모의 얼굴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나쳤을 것이고, 그런 행인을 상대로 한 장시도 상당했을 것이다.

 

OBS 방송차량의 첫 손님은 요즈음 오빠야라는 노래로 한창 인기가 치솟고 있는 가수 박주희의 무대였다. 제일먼저 부른 노래는 자기야였다. 이어서 오빠야와 트로트 메들리로 차 없는 거북시장 거리에 모인 관객들을 흥겹게 만들어 주었다. 이날 초대가수에는 소명과 그 아들 소유찬, 진시몬 등이 출연하였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나서 한양으로 올라가곤 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옛 수막거리의 정취는 사라졌다고 해도, 이렇게 달라진 거북시장에서 차 없는 거리까지 운영을 하고 있어, 우리 거북시장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죠.”

 

차 없는 거리에서 만난 한 주민은 사람들이 차 없는 거리 운영을 좋아한다고 전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나왔다고 하면서 연신 휴대폰에 영상을 담고 있는 한 주민은, ‘차라리 시장거리를 상점들이 물건을 받는 시간은 빼고는 차 없는 거리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도.

화성 영화역 복원을 위한 고유제 열려

 

날이 많이 풀렸다고는 하나 아직은 한 겨울이다. 119일 오후 3.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에 소재한 재래시장인 거북시장큰 길에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잠시 후에는 풍물패들이 이곳으로 모여 한바탕 풍물굿판이 벌어졌다. 큰 길을 막아 걸어놓은 현수막에는 거북시장 활성화 및 영화역 복원 기원 고유제란 글씨가 적혀있다.

 

이 고유제는 올해로 3년 째 지내고 있다고 한다. 현 영화동 주민센터 일대는 옛 영화역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이다.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남쪽 역참의 중심인 양재역을 옮겨

 

영화역은 정조의 화성 축성 이후에 한양의 남쪽에 거주하던 남쪽 역참의 중심권으로 삼았으며, 화성에 인구를 모으는 방법으로 양재역을 이곳으로 옮겼다. 당시 양재역의 관사와 관원만이 아니라, 역참에 속한 주민들 모두를 모두 이주시켰다.

 

영화역은 북문인 장안문 밖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역의 건물인 영화관 등을 합해 모두 52칸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 영화역은 물론 역 주변의 마을까지도 19세기 말 역참제도가 시행될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관은 정조의 능행차시 정조를 가장 먼저 맞아들이는 곳이었다.

 

 

지금도 영화초등학교의 뒷산을 마장산, 또는 역마산이라고 한다. 이 곳에 말을 놓아먹이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일대는 장용외영의 무사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영화역 복원을 위한 고유제가 열린 것이다.

 

152억 원의 예산으로 2016년까지 복원

 

당시 역이란 당시의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던 말을 빌리거나 말에게 먹이를 주고, 관원에게 숙박 편의를 제공하며, 관물 및 진상품 운송의 임무를 맡던 곳이다.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영화역은 2016년까지 모두 152억 원의 예산을 들여 복원을 할 계획이다. 이날 고유제에는 초헌관인 차한규 거북시장 상인회장, 아헌관인 박정애 영화동장 등 100여명이 참석을 하였다. 영화역의 복원은 화성과 행궁 복원에 이어 영화역까지 복원을 마친다면, 정조 당시의 화성일대의 구조물들이 대부분 복원이 되는 셈이다. 영화역의 복원에 대한 거북시장 상인들의 마음은 이날 읽은 고유제 축문에 잘 나타나 있다.

 


영화역 복원 기원 고유제 축

 

이제 단군 국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지 4346. 수원화성북문 거북시장 상인회장 차한규는 감히 밝혀 고하옵나이다. 경기도 수원화성을 수호하여 주시는 천지신명이시여, 수원의 역사는 유구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선양하는 고장입니다. 화성의 영화역이 생활현장에서 사라진지 백여 년이 되어 영화관유적복원이 한스러운 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화관 복원! 오호라 이제 천지신명의 가호로 경기도 도정시책으로 영화역 능행로 복원이 실현하게 되었음을 고유하옵니다. 화성이 세계인이 공유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되살리고, 아름다움을 길이 전하고자 합니다.

 

정조임금의 어록을 회고 하옵건데 현륭원 효행 백리길 길목인 영화역을 지나면서 돌아보건대 백성들의 주거환경이 약간은 이루어졌으니 이윤 주공의 도가 사실함께 모이어 역말을 둠직도 하구나. 사행의 수레가 번갈아 달리니 마정의 접응과 가장 큰 관계가 있고, 우호가 구름처럼 모여드니 가히 살림을 경영할 만한 곳을 접하였네. 드디어 거류하는 신하에게 터를 잡도록 명령을 내려 이에 양재도역을 옮기었네. 입암(할미퉁수바위)을 곁에 두고 터를 쌓으니 이곳은 곤빈의 정숙함이 맞추었고, 준성을 항하여 집을 지으니 완연히 천마의 형상을 대하였네. 성문을 떠나 백무쯤 되는 곳은 조금씩 촌락이 이루어지고 영화관 집 50칸을 지으니 날개처럼 세모난 서까래가 번쩍 들렸구나. 관원이 거접하니 모든 역중의 우두머리로다”(이하 하략)


“우리 장안거북시장은 정조대왕의 화성 축성 시, 처음으로 시장을 개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벌써 2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시장이죠. 당시 지금의 거북시장은 모두 영화역에 있던 마방(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옛 장소) 이었다고 합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남, 59세) 회장의 설명이다. 9월 12일 오후에 찾아간 거북시장. 수원에 장시를 열고 있는 22곳의 재래시장 중에서, 넓이로 따지자면 1~2위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현재 거북시장에는 200여개의 점포가 사방으로 뻗은 길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처음에 이 시장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거북시장이란 명칭을 사용 한 것은 40~50년 정도입니다. 당시 이곳이 거의 한 사람의 땅이었는데, 그 분의 별명이 거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북시장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상권을 자랑하던 곳

 

18세기 우리나라의 싱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였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 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는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은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평 규모에 말을 쳤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 우리나라에는 ‘역원(驛院)’이 있었다. 역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말을 바꾸어 타는 곳이고, 원은 공무를 보는 관리들이 묵는 곳이다. 영화역은 당연히 말을 관리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영화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말을 관리를 했을까? 장안문 앞에 있는 영화역에서는 단연히 정조의 능행차에 필요한 말들 수백 마리를 관리를 했을 것이다. 현재 거북시장 인근이 모두 마방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그 규모를 알 수가 있다.

 

52칸이나 되는 영화역과 역마산, 마장산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당시 영화역은 찰방역이었는데 이를 군제에 포함시키고, 북성(화성의 북쪽)의 척후장을 겸직하게 하였다. 한데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1일에 정조는 수원부 유수 조심태에게 지시를 한다. 북문 밖에 역관을 설치하고자 하나 재력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영화역의 규모는 정당 및 삼문이 있는데 모두 남향이며, 내아는 모두 52칸이라고 했다. 지금도 영화초등학교의 뒷산을 마장산, 또는 역마산이라고 한다. 이 곳에 말을 놓아먹이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변화를 시도하는 거북시장

 

장안문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새 수막거리’였다. 여정에 지친 행인들이 국밥 한 그릇에 텁텁한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다. 장안문을 벗어나 이 거리에 들어서면, 웃음 띤 주모의 얼굴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나쳤을 것이고, 그런 행인을 상대로 한 장시도 상당했을 것이다.

 

“저희 거북시장이 1980~90년대 까지는 그래도 상당히 번화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희 시장은 특성이 없는 재래시장으로 변하고 말았죠. 저희들도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관광버스가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거리 정비를 할 생각입니다. 전신주 지중화사업, 간판정리 등의 예산도 확보되었습니다. 현재 용역을 마치고 11월이면 공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거북시장 차한규 상인회장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북시장의 옛 영화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새 수막거리’라는 이름은 날마다 술집이 새로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더구나 정조 당시에는 장안문 밖에 장용외영의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번화한 거리는 새삼 가늠할 수가 있다.

 

수막거리 형성이 거북시장을 살리는 길

 

차한규 회장과 인터뷰를 마치고 시장 길을 돌아본다. 현재 거북시장은 여기저기 온통 먹거리 집들만이 즐비하다. 재래시장의 특성상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특화된 것이 있어야 하는데 비해, 거북시장은 그런 것이 눈에 띠질 않는다. 꼭 이곳을 찾지 않아도 어디서나 쉽게 찾아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옛 수막거리를 돌아본다. 과거 분내 풍기고, 웃음을 팔던 주모들이 있던 곳. 치미자락을 위로 끌어 잡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뭇 남정네들의 마음을 녹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은 그런 특화된 거리가 필요할 때이다. 장안문을 나서 현 수성중학교까지 길에 뻗어 있었다던 새 수막거리. 그 거리가 새삼 그리운 까닭이기도 하다.

 

영화역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북시장 상인회. 아마도 그 꿈이 머지않아 이루어지고, 분내 나는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수막거리를 감도는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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