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의 양편에는 적대라는 구조물이 있다. 이 적대는 장안문을 지키기 위한 시설로 적대에는 홍이포를 설치하였다. ‘홍이포(紅夷砲)’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홍이포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홍이포는 남만대포(男蠻大砲)’라고도 부른다.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으며, 홍이포는 길이 215c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사정거리2 ~ 5km 유효사정거리는 700m 인 전장포이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 사건 때 사용되었다

 

 

강화부의 화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홍이포

 

홍이포가 처음 기록에 보이는 것은 1664년이다. 당시 강도어사 민유중이 병자호란 이후, 강화부의 미곡과 화기에 대한 보유 상황을 조사하는데, 그 목록에 남만대포라는 화기가 등장한다. 당시 강화부의 화기류는 현종개수실록현종56월 계축조에 의하면, 진천뢰 140, 대완구·대포·중포가 65, 소완구 30, 호준포 37, 각 보에는 대포 179, 진천뢰 63, 남만대포 12, 불랑기 244좌 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남만대포 12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남만대포인 홍이포는 12좌로 다른 화기보다 수가 적기는 하였지만, 남만대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기술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전래한 서양포에 대해 일반적으로 불랑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불랑기는 임진왜란 시기에 해당되는 1593년 정월 이후, 명에 의한 평양성 공격을 계기로 본격적인 도입이 모색되었다. 그 당시는 서양 기술이 도입된 대포의 호칭에 대해서 특별한 구분을 두지 않았던 게 일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만대포와 불랑기를 구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랑기와 홍이포는 다른 종류의 대포임을 알 수 있다.

 

화성의 홍이포는 영조 때 우리가 만들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이는 붉은 오랑캐라는 말로 머리털이 붉은 네덜란드인을 뜻한다. 16세기 네덜란드 선교사들에 중국 명에 전해진 서양대포를 말한다고 했고, 17세기 초 정두원이 서양 선교사로부터 받아 조선으로 전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영조79월 신사조에 기록된 훈련도감의 보고 기록에는

본국(훈련도감)에서 새로 마련한 동포(銅砲)50이고, 홍이포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입니다. 동포의 탄환거리는 2천여보이며, 홍이포의 탄환거리는 10여리나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예람하시도록 올리니 강동한 자들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라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홍이포는 박연이나 하멜이 갖고 온 것이지만, 조선 영조 이후에는 홍이포를 직접 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화성에 진설된 홍이포는 순수한 우리기슬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있다. 홍이포는 포탄이 여러 조각으로 폭발하는 산발식이 아니라 둥그런 철환 덩어리들이 목표물을 부수는 형식의 대포이다. 하기에 최대사정거리는 2~5km에 이르는 홍이포가 유호사정거리 700m에서 그 철환들이 갖는 위력은 놀랄 만 할 것으로 보인다.

 

장안문과 팔달문 양편에 적대를 만들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적대에 놓인 홍이포.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유입한 홍이포가 아닌 영조 때 우리기술로 만든 홍이포. 사정거리가 700m에 이르는 이 홍이포의 위력이야말로 화성을 지켜내는 화기 중 가장 강력한 무기였을 것이다.

‘어서각(御書閣)’이라고 하면 듣기에는 생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국에 수많은 어서각이 건립되어 있다. 어서각은 바로 왕이나 왕비 등이 친히 내린 글을 보관하는 곳이다. 왕이 친히 내린 어필은 자손과 신하에게 내린 명령이나 가르침인, 교시(敎示), 훈유(訓諭), 편지, 현판, 시고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어필을 민간에서는 어서각을 세워 봉안하는 것이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118에 위치한 어서각은, 추담 장현경에게 영조가 하사한 친필을 보관하기 위하여 정조 23년인 1799년에 건립된 전각이다. 무주에서 장수를 거쳐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어서각의 표지판을 보고 찾아 들어갔다. 장수의 어서각은 전각을 둘러친 내담이 있고, 그 밖에는 철문으로 막은 외담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잠긴 철문, 알고 보니 열려 있어

 

철문은 잠긴 듯해 밖에서만 촬영을 하다가보니, 안으로 잠근 쇠가 그냥 열게 되어 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까치발을 들고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진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홍살문이 있고, 삼문을 단 벽은 꽃담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어서각을 지었다. 전각의 중앙에는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자물쇠를 걸어놓았다. 한편에는 어서각을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중수기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안에는 영조가 직접 써서 장현경에게 내린 글씨를 보관하고 있다고 하나 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

 

 

 

정조가 친히 어서를 내려

 

장현경(1730∼1805)은 흥덕사람으로 자는 백회, 혹은 사응이며, 호는 추담이다. 영조 28년인 1752년에 정시에 급제한 후, 홍문관박사를 시작으로 춘추관, 기주관, 편수관 등을 역임하였다. 어서각에 보관된 어서는 22㎝× 35㎝의 크기인 홍저지에 쓴 영조의 친필이다.

 

영조 39년인 1763년 겨울 장현경이 사관으로 입직하였을 때, 영조께서 정청에 나오시어 잣죽과 꿩구이를 내리자, 성은에 감복하여 율시를 지어 올리니 대왕께서도 크게 기뻐하시어 어서를 하사하신 것이라고 한다. 장현경은 이 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서각을 짓고 이곳에 보관하였다.

 

 

 

잘 보관된 문화재에도 옥에 티가 있어

 

장수의 어서각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다고 전한다. 넓지 않은 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어서각. 아마 장현경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이곳에 접근하지를 못했을 것이다. 어서각 여기저기에 CC카메라가 달려 있다. 영조의 친필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누군가 어서각을 출입하였는지 마루에 무엇이 놓여있다. 들여다보니 이곳에서 고추를 말렸는가 보다. 하기에 집안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을 테니, 고추인들 말리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감히 임금님의 글씨를 보관한 집인데 말이다. 하기야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 임금의 친필이 무슨 대수가 될까?

 

 

이제는 문화재라는 의미도 사람들에게는 점점 퇴색되는 듯하다. 하기야 누군가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나에게 물은 말이 있다. 참 가슴 아프게 받아들인 말이지만.

 

“문화재가 밥 먹여줍디까?”

예나 지금이나 잘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시쳇말로 백 없고 돈도 없고, 거기다가 줄도 없으면, 그야말로 세상살이가 힘들어진다. 가끔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씁쓸한 때가 있다. 넓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이, 임대주택의 아이들과는 한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소재한 궁집.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아마도 화길옹주가 이곳으로 시집을 왔을 때, 시비들이 이곳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또한 능성위 구민화의 집에도 아랫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궁집 옆으로 초가가 한 채 보인다. 바로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는 집이다.

 

 

신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초가

 

하지만 궁에서 따라 나온 시비들이나, 마름 등은 이 초가에 묵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궁집 안에도 행랑채가 있어, 마름들이나 궁에서 나온 시비들은 그곳에서 생활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 아마도 그보다 신분이 낮은 머슴이나 종들이 살던 집은 아니었을까?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고 전하는 이 초가는, 궁집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집도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이 초가는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옛 고택들 중에서도 특히 초가의 경우 사람이 살지 않으면 퇴락해 버리고 만다. 이 초가 역시 많이 훼손이 되었다.

 

 

 

 

연륜을 알 수 있는 주변의 경관

 

궁집의 하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초가. 주변으로는 꽤 오래 묵은 듯한 나무들이 서 있어, 이 집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초가는 ㄷ 자 형으로 되었다. 앞으로 사랑채를 놓고, 그 중간에 대문을 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ㄴ 자의 꺾인 부분에 대청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드렸다.

 

이 초가는 일반적인 초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꾸며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양편에 방에 불을 때기가 편하도록 깊게 골을 파서 연결하였다. 한 사람이 양편에 불을 한꺼번에 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안으로 들어가면 양편으로는 방을 드렸다. 아마도 초가의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이 초가에 살던 사람들이 신분이 낮았으니, 아랫사람을 두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양편의 방을 일꾼들이 사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의 특이한 구성, 머슴들이 생활한 집인가?

 

사랑채에 비해 안채는 간결하게 꾸며졌다. 사랑채에 붙여 ㄱ 자로 지은 안채는 작은 방 하나를 놓고 부엌과 안방을 드렸다. 안방은 뒤로 물려 앞을 마루를 놓았으며, 꺾인 부분에는 넓은 대청을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을 드렸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이 초가에는 주로 일을 하는 머슴들 위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일반적인 중부지방의 초가와 다름이 없지만, 그 집의 구성으로 볼 때는 상당히 특이한 형태인 초가. 부엌 뒤편으로는 장독을 놓았으며, 사랑채를 맞물려 안채의 뒤편으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담장을 둘렀다.

 

 

 

 

사람이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재신이나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집의 형태. 그런 집들을 돌아보면서 참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신분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7월 17일에 찾아간 남양주시 평내동의 궁집. 그곳에는 또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당연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생부에 의해 ‘뒤주’속에서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어 ‘뒤주세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250년 세월, 그렇게 슬픈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었던 ‘사도세자’기 250년 만에 <장조황제>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수원시 팔달구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화성박물관(관장 이달호) 기획전시실에서는 6월 1일부터 7월 1일까지 수원화성박물관과 용주사효행박물관 공동으로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 특별기획전 ’사도세자‘를 열고 있다. 전시는 크게 4가지 테마로 되어있는데, 생애와 활동, 가족, 원찰 용주사 창건, 그리고 왕세자에서 황제로의 추숭으로 꾸며져 있다.

 

 

2세에 왕세자가 된 선

 

사도세자(1735~1762)는 창경궁의 집복헌에서 조선조 제21대 임금인 영조와 영빈이씨의 왕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선,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영조가 첫 번째 얻은 아들인 효정세자를 잃고 난 뒤, 42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왕자여서 사랑과 기대가 남달랐다. 아마도 그 사랑과 기대가 너무 큰 것이 화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전시실을 들어서면 한 설치벽면을 커다랗게 장식하고 있는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고려대학교박물관)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동궐’은 창경궁과 창덕궁을 함께 호칭한 것이며, 창경궁과 창덕궁의 전체 구조와 배치, 주변의 자연환경 등을 16책의 화첩에 나누어 제작한 궁궐도이다. 이곳 창경궁 집복헌에서 사도세자가 태어나, 삶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지냈다.

 

 국보인 동궐도. 붉은 원안이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이다


사도세자는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세자 수업을 받았다. 15세 때에는 이미 부왕인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에 임하였으나, 1762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와 활동이 전시공간에는 13년 동안 왕세자 수업을 거쳐, 대리청정에 임해 대소신료들과 국사를 논하고 정무를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736년 3월 15일 장조의 왕세자 책봉시 반포한 글을 새긴 ‘장조왕세자 책봉 죽책’이다. 제술관은 윤순이고 시사관은 김취로이다. 죽책은 모두 6폭인데 1폭 당 죽책 5간 씩을 엮어 제작하였으며, 총 30개의 죽간 중에서 28개의 죽간에 글을 새겼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전략) 아 너 원자 선이여 내가 다행히도 늦게 너를 낳았는데 하늘이 꼬 남다른 자질을 주었다. 품 안에 있을 때부터 지각과 사려가 먼저 트여 말은 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것처럼 의젓하였으며, 자세히 보면 기국과 도량이 현저하여 훌륭한 덕을 갖출 조짐이 뚜렷하였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침착하기가 남다르니, 자라서는 총명하고 어질며 효성스러우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삼종(효종, 현종, 숙종)을 계승할 수 있을 것 같아 십년 동안 깊은 밤까지 걱정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팔도의 백성이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니 조정 관원 모두가 세자 책봉의 경사를 기뻐한다.(하략)」

 

‘폐세자반교’에 얽힌 내용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총명하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소신료들과 정사를 논할 수 있는 왕제의 덕목을 갖춘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열 살 무렵부터 사도세자는 책읽기를 싫어하고 말타기나 활쏘기 등을 더 좋아하였다. 그리고는 살이 쪄 몸이 비대해졌다.

 

1749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상황이 악화되었다. 『영조실록』에는 이 무렵부터 사도세자에게 병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자에게 병이 생겨 본성을 잃었다고 했다. 이 본성을 잃었다는 병은 곧 광증인 정신병을 말한다. 그리고 발작을 하면 살인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도세자는 서인이 되어 뒤주에 갇히고 만다.

 

 대리청정시 사도세자가 내린 교지


사도세자를 폐세자로 한다는 ‘페세자반교’의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는 광증이 있었고, 병이 깊어지면서 아랫사람 100여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생모인 영빈이씨까지 죽이려했고, 마침내 영조까지 죽이려하다가 영조의 처분을 받아 죽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세자가 내관,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인데 한도 없이 갖다 썼습니다. 또 장번 내관은 내 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 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 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생모인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아뢴 말이다. 창덕궁으로 사도세자를 찾아 갔을 때 영빈 이씨는 몇 번이나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했다. 이러한 일로 인해 결국 사도세자는 폐세자가 된 후 죽음으로까지 가게 된 것이다.

 

 

 원찰 용주사 상량문과 불설부모은중경 동판


고종 때 황제로 추존되어 명예를 되찾다

 

아마도 이런 폐세자를 실행하게 된 것은 그만큼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죽책의 내용을 보면 영조가 장조 왕세자에게 건 기대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기대가 결국 사도세자의 이른 죽음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을까? 전시실을 한 바퀴 돌아 가족과 원찰 용주사 창건을 지나, 마지막 테마인 ‘왕세자에서 황제로의 추숭’ 편을 돌아본다.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을 하여 왕위를 계승한다. 왕위에 즉위한 정조는 바로 부친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추상하면서 생부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존호의 추상 뿐 아니라 궁묘의 정비와 능원의 조성 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정조의 ‘효(孝)’는 지극하였다.

 

 

 

이런 와중에 정조 16년인 1792년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한 영남만인소는 정조를 한껏 고무시켰고, 이러한 추숭과 현창사업은 후대 왕들에게로 이어졌다. 그 결과 고종 때에 이르러 사도세자는 왕세자에서 왕위를 거쳐 황제위까지 추존되어 명예를 되찾았다.

 

 

 

250년 만에 뒤주에서 우리 곁으로 돌아온 사도세자.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만날 수가 있다. 무예와 예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사도세자. ‘능허관만고’라는 문집을 지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세자가, 광증이 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늘 사도세자를 만나 직접 그 이유를 들어보기를 권한다.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이 된 윤황 선생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이 처음에 지어진 해는 정확하게 전해지지가 않으나, 윤황(1572∼1639) 선생의 6대손인 윤정진이, 조선조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조는 튼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담을 쌓아 안채와 구분을 하고 있으며, 좌측으로는 ㄱ자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l 자형의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우측에는 높게 앉은 사당채가 자리하고 있다. 윤황 선생의 고택은 화려하지 않으며,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선생의 심성을 닮은 사랑채

 

윤황 선생은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인조 때에는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황 선생은 자신이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자처를 할 수 있는 윤황 선생의 고택 앞으로는 - 자형의 사랑채가 6칸으로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다섯 칸이 있고, 좌우측에는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있는데, 사랑채를 바라보며 좌측은 앞으로 돌출이 된 작은 공간이고, 우측은 측면으로 툇마루를 달아낸 누정 방으로 꾸몄다. 중앙 좌측의 두 칸은 온돌방으로 했으며, 이어 두 칸의 대청을 두었다. 대청은 두 칸 다 네 짝 문을 달아냈다.

 

 

 

이 집은 딴 곳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대청의 기둥을 보면 목재를 재활용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청 앞으로 나란히 선 네모난 기둥들의 위편을 보면, 나무를 끼웠던 흔적들이 있다. 당시 파평 윤씨들의 가문에서 이렇게 나무를 다시 활용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도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를 버릴 줄 아는 윤황 선생의 자손답게, 집을 옮겨 지으면서도 절약을 했다는 것이다.

 

낮은 굴뚝에 얽힌 의미

 

뒤편으로 돌아가면 배수로를 내었는데, 연도가 그 배수로를 지나 낮은 굴뚝과 연결이 된다.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드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낮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늘 그 굴뚝처럼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위하라는 뜻이다. 종가집들의 굴뚝이 하나 같이 낮은 이유가 바로 그렇다. 집안에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겸손하라는 것을 일러주는 교훈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방역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대개 한옥에서 소나무나 참나무 등을 이용해 불을 지핀다. 나무를 넣기 전에는 낙엽 등을 이용해서 불씨를 만드는데, 그때는 연기가 많이 나게 된다. 그 연기들이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집안 곳곳에 병충해를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한옥에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안채의 단아함

 

윤황 고택의 안채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분칠을 하지 않은 맨 얼굴처럼 정숙하다. ㄱ자 형으로 꺾인 안채는 좌측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같이 안채의 대청에도 창호를 달았다. 그리고 우측 맨 끝 방은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한데 아궁이를 내었다.

 

 

 

이렇게 높임마루를 놓았을 경우 그 측면에는 낮은 툇마루를 놓기도 하는데, 윤황 선생의 고택은 그 흔한 툇마루마저 없다. 그저 치장을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억제를 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며 보수를 하면서 새로 쌓은 듯한 축대가 있다. 그 축재 한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있는데, 일반적인 종가의 장독대와는 다르다. 그저 평범한 민초의 장독대와 다를 바가 없다. 무엇하나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치장을 하지 않은 집. 그래서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한 것일까? 윤황 선생의 고택이 바로 그러하다.

 

 

 

자연이 녹아있는 사당채와 연못

 

윤황 선생 고택의 사당채는 양편에서 오를 수가 있다. 사랑채 뒤에서 일각문을 통해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제의를 지낼 때 종친들이 사랑채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낸 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은 안채 뒤편 계단을 통해서 사당채로 오르는 길이다. 역시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이 문은 안채에 있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나를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 앉아 좌측 높임마루에서 보면 그 앞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지금은 주변이 정리가 안 돼 연못을 식별하기조차 쉽지가 않지만, 아마 이 연못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들이 유영을 했을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닮은 집. 그리고 자연을 위한 집. 논산 윤황 선생의 고택은 집 안에 그렇게 자연이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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