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번지에 소재한, 신라 때의 절터로 추정되는 사적으로 지정된 영암사지. 비가 내리는 지난 8월 20일 찾아간 영암사지는, 정말 사지 중의 최고였다는 기억이다. 우선 주변 경관이 뛰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엄청난 넓이의 전각 터를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영암사지의 맨 위쪽이 자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법당터. 그곳에는 보물 제489호로 지정이 된, 합천 영암사지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동서로 나누어 자리하고 있는 이 귀부 2기는, 영암사 터 내의 법당터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한 기씩이 자리하고 있다. 영암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어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와 머릿돌은 사라지고 받침인 귀부만 남아

원래 비는 받침돌인 귀부와 몸돌인 비석, 그리고 머릿돌인 이수가 위에 얹혀 있다. 그러나 현재 영암사지 법당 터에는 받침돌인 귀부만 양편에 남아있다. 양편에 남아있는 귀부는 기단의 형태가 달라, 동시대에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세운 것으로 보인다.

법당 터 앞에는 석등인 듯한 석물이 있다. 받침과 간주석만 있는 이 석물은 간주석, 중간이 잘려져 있다. 숱한 세월을 지내오면서 많은 아픔을 당한 증거이다. 영암사가 언제 창건이 되었는지, 언제 소멸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터에서 발굴되는 많은 석조물들이 신라 때의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때 창건이 된 절로만 추정하고 있다.



동서편의 귀부가 각각 특징을 지녀

석등인 듯한 석조물의 뒤편으로는 석축으로 쌓은 기단이 있고, 계단이 일부 남아있다. 동쪽의 귀부는 거북의 등 무늬가 6각형이며, 비의 몸돌인 비석을 괴는 네모난 비좌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조로 넘어가면서 보이는 귀부의 특징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비석은 통일신라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쪽에 놓인 귀부 역시, 6각형의 등 무늬인 귀갑문을 배열하였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4면에 안상을 새겨 넣고,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을 새겼다.



서쪽의 귀부는 동쪽의 귀부보다 얇고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졌다. 동쪽의 귀부는 조금 크며 귀갑문을 새긴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는 귀부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누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두 개의 귀부만 남아있는 영암사지 귀부, 도대체 그 비에는 어떤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누구의 비였는지 궁금하다. 영암사지 귀부 2기는 각 부 양식이나 주위의 석조유물 등과 관련지어 볼 때, 9세기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조에 걸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이 된다. 동쪽의 귀부가 시기적으로 조금 이른 듯이 보이는 영암사지 귀부. 그 비문에 적힌 내용이 궁금하다. 말없는 귀부는 눈만 부라리고 있을 뿐이고.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 영암사지에는, 보물 제480호인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높은 축대 안쪽에 서 있는 이 탑은, 쌍사자 석등이 서 있는 금당터 앞에 있다. 영암사지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로 알려져 있다. 절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014년에 ‘적연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 기록으로 보아 영암사는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정비중인 절터에는 석탑을 비롯하여 보물인 쌍사자석등과 귀부 등 각종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황매산의 바위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영암사지는 아직도 정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8월 20일 비를 맞으며 찾아간 영암사지. 그곳에서 삼층석탑을 만났다.




무너져 있던 탑을 복원하다

이 삼층석탑은 영암사지에 탑신부가 무너져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쌍사자석등을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주민들이 막아냈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이 삼층석탑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해체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일제치하 하에서는 이렇게 수많은 문화재들이 해체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1969년에 복원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화강암재로 조성을 하였다. 기단은 상당히 높은 편이며, 몸들은 1층에 비해 2, 3층이 유난히 낮다. 기단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인 우주와 탱주를 새겼으며,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의 모서리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지붕돌 밑면의 층급받침은 4단씩이다. 몸돌의 비례가 정형을 벗어나 있으며, 처마 밑은 수평으로 조성하고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상륜부인 머리장식부분은 모두 없어졌으며, 3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쇠막대인 철주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

간결하고 규모가 작은 영암사지 삼층석탑

비를 맞으며 영암사지의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과거에는 이 영암사라는 절이 얼마나 대단한 가람이었는가를 추정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석등 뒤에 조성한 금당터와 위쪽에 있는 또 하나의 금당터, 그리고 석등과 삼층석탑. 귀부와 각종 석재 등을 보아도 상당한 절이었을 것이다.


그런 영암사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전체적으로 볼 때는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균형을 잃지 않고 있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하다.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이어받고는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의 층급받침수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건립 시기는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보물 제480호인 영암사지 삼층석탑. 기단부와 머릿돌 등이 깨어지긴 했지만, 간결하면서도 나름대로 품위가 엿보인다. 삼층석탑 한편에 미륵형태의 조형물이 있다. 이 석조물은 무엇일까? 혹 이 탑을 조성하면서 공양상으로 함께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석탑의 부재가 여기저기 한편씩 깨어져 있는 것도, 혹 이 석탑을 해체해 운반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비를 맞으면서도 석탑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석탑이 무너져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옛 절터를 찾아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사지(寺址)’에는 절터만 있는 곳도 있지만, 많은 문화재가 함께 있는 곳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지를 들어가면 많게는 5 ~ 6점의 문화재를 함께 답사를 할 수가 있으니,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정말로 횡재를 한 셈이 된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소재한 사적 제131호인 영암사지.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 때의 절터이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지어진 절로 보인다. 고려 현종 5년인 1014년에는 ‘적연선사’가 이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견고한 성을 연상케 하는 사적 제131호 합천 영암사지의 석축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 터

합천 영암사지. 비가 아침부터 줄기차게 쏟아진다. 요즈음은 이상하게 멀쩡하던 날씨가 나만 움직이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요즘 별명이 ‘비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로 바뀌어 버렸다. 이런 별명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한 별명이다. 영암사지에 도착해서도 비는 멈추지를 않는다.

처음 영암사지를 보고 내가 한 행동은 탄성이었다. 이런 곳에 어떻게 이렇게 대규모 사찰을 이룩할 수가 있었을까? 그 당시는 교통도 좋지 않아, 많은 석재를 날아오기도 힘들었을 텐데. 정말로 대단한 절터였다. 지금은 복원을 많이 해 놓아 정비가 되어있긴 하지만, 아직도 한편에는 미쳐 정비를 하지 못한 듯하다.


삼층석탑이 서 있는 축대 아래편의 절터와(위) 금당지로 오르는 중앙계단 


저 곳까지 마저 복원을 마친다면, 얼마나 웅장한 절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암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보인다. 홍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을 보면, 영암사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886년은 신라 정강왕 원년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아마도 신라 헌강왕 이전에 지은 절이란 생각이다.

밀교의 절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영암사지

황매산의 절경인 암벽을 뒤로하고 있는 영암사지는 모두 세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높은 돌로 쌓은 축대는 성벽을 방불케 한다. 발굴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로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과 더 위쪽에 자리한 서금당. 회랑터와 기타 건물터 등이 확인이 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조사된 바로는 금당은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축대 밑으로도 넓은 절터가 조성이 되어있으며, 삼층석탑 부분, 그리고 석등이 있는 곳의 금당터와, 양편에 귀부가 남아있는 곳으로 구분이 된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보물 제353호인 쌍사자석등과, 보물인 삼층석탑, 귀부 등 당시의 건물 받침돌과 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있다.

이곳 영암사지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과, 금당지 연석에 얼굴모양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 후면을 제외한 삼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한 점이다. 이런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 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인다.


금당지 위를 돌아보다가 비에 젖은 잔디에 주저 앉고 말았다. 15cm정도의 석재 같에 돋을새김한 정교한 조각(위)과 금당지 축대 외벽에 조각한 동물상 때문이다.


금당지를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다.

금당터, 석등을 본 후 금당터로 오른다. 중앙에 분리를 시켜 양편으로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을 놓았다. 계단의 남은 석물로 보아, 화려한 조각이 되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은 삼면으로도 층계를 놓았다. 위로 오르니 주춧돌과 함께, 본존불을 모셨을 자리가 있다. 그 한쪽 편을 보고 놀라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낮은 석축 표면에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그 남은 부분에도 이런 비천인인 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비가 오는데도 다리에 힘이 풀린다. 영암사지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눈을 감고 옛 모습을 그려내 본다. 장엄한 영암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황매산을 뒤로하고,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가람이.


아마도 이런 사지는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던 것만 같다. 영암사지, 그 장엄한 절이 언제 소실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마도 두고두고 생각이 날 것만 같은 곳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문화재오적(文化財五賊)’이 생각이 난다. 바로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훼손하고 강탈한, 문화재를 훼손한 족속들이다. 내가 ‘인간’이나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족속’이라고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오적의 첫째는 바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간 일본과 많은 나라들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재를 강탈해 가고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오적 중 수괴이다. 둘째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문화재를 훼손한 ‘종교광신자‘들이다. 이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어찌 보면 외적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문화재를 지켜내지 못하는 관계자들이고, 네 번째는 심심풀이로 낙서를 하는 등 무개념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화재에 무관심한 모든 인간들이다.


일본인들이 들고 가려고 했던 영암사지 석등

8월 20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답사를 강행한 합천 영암사지. 몇 번이고 찾아가 보려고 했던 곳이었기에, 비가와도 이번만은 답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영암사지에 도착했을 때는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암사지에 도착했을 때, 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물론 발굴 후 복원을 하느라 새로운 석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장엄함에 그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암사지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인 보물 제353호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번지, 사적 제131호인 영암사지 안에 자리한다.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한 쌍사자석등은 양편으로 석등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석조층계가 아름답게 자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 뒤가 절의 중심인 본존불을 모셨던 터인 듯하다.





이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도대체 많은 문화재들을 이렇게 약탈당하면서도,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 참 가슴이 아픈 일이다. 이 석등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팔각으로 이루어진 석등

쌍사자석등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국보 제5호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에 견줄만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 지붕돌 위에도 상륜부의 석재가 있었을 텐데, 현재는 지붕돌만 남아있다.



영암사지 석등은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두 마리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위받침돌을 받들었다. 그 두 마리 사자의 다리가 힘이 넘쳐난다. 마치 화사석의 무게를 느끼는 듯하다.

‘더 이상 아름다울 수는 없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는 네모난 창을 내고, 기둥을 삼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힘차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 조각인 귀꽃 등이 솟아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석조미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비가 오는데도 그 앞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다. 만일 이것을 일본인들에게 도난을 당했다면, 이 영암사지 한쪽이 얼마나 허전했을 것인가? 잘 정리가 된 넓은 영암사지 높은 석축위에 서서 다시 한 번 ‘문화재오적’을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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