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연애이야기를 한다. 모두가 박사인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남자들은 술자리에서 별별 이야기를 다 한다는) ‘자칭 연애박사’라고 하는 녀석을 만났다. 글쎄다, 이 녀석이 언제부터 그렇게 연애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기야 세상을 조금 살았으니, 경험이야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야 많겠지만.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경청을 하고 있는 녀석들을 보면서, 참 이 나이에 이런 이야기가 당치나 한 말이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랬더니 자칭 박사 이 녀석, 아주 정색을 하고 덤벼든다. 자신이 정말 많이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한 마디의 질문이 입을 다물게 하는데는 최고란 생각이다. 질문을 했다.


“연애에 정석이 있는 것이여?”

“연애의 정석이라, 글쎄”
“그것도 답을 하지 못하면서 무슨 자칭 박사라고 하냐?”
“내가 보기엔 그렇다. 연애에는 정석이 있을 수가 없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생각을 해봐라. 연애에 어떻게 정석이 있을 수가 있나.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연애의 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또한 상대방의 마음도 다 다르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것이 정석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나. 정석이란 말 그대로 표준이요, 모든 사람에게 통용이 되어야 하는데 연애에 어떻게 그런 정석이 있을 수가 있나”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하다. 사람마다 연애를 하는 방법이 틀리고, 상대를 대하는 성격도 틀리다. 거기다가 연애를 하는 당사자들의 마음가짐도 다 다르다. 그렇다고 연애담을 이야기하는 녀석이 정석이 없다고 하니, 이 녀석 박사가 아닌가 보다.

“연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냐?”

두 번 째 질문을 퍼부었다. 녀석은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아마도 자신이 한 대답이 스스로 흡족한 듯하다. 뜸을 드리지도 않고 바로 대답을 한다. 녀석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연애는 먼저 상대를 파악하라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상대방의 성격, 외모, 가정 등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 사람마다 개성이 달라 자칫 사소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기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상대의 모습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상대의 아픈 곳을 건드릴 수도 있다 것. 더구나 내가 연애를 하는 상대방 가정이 남보다 못하다고 할 때는 ‘누구 네는 어떻다’ 등의 이야기는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기호를 먼저 파악하라
연애를 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바로 상대방의 기호를 파악하랴 한다는 것. 음식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는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은 기본적으로 파악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것을 모르는 체 상대방을 위한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기본이란다.

이 외에도 녀석이 이야기를 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듣고만 있어도 머리가 아프다. 연애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를 진작 알았더라면.


“그럼 연애를 할 때 최고의 상대는 어떻게 알 수 있냐?”

“참 이제 와서 네가 그것을 알아 무엇 하려고?”
“그래도 알아두어야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하긴 그래,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면 사람은 달라지니 알아서 들어”

상대방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방법은 약간의 허점을 보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못을 저질러 보라는 것. 그것을 못 본체 넘기는 상대는 50점, 꼬치꼬치 따지되 이해를 하는 사람은 70점, 그리고 못 본 체 하면서 농담 삼아 웃으면서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는 사람은 90점 짜리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수긍이 간다.

자칭 연애박사에게서 듣는 연애특강. 술자리에서 하는 특강은 늘 즐겁게 마련이다. 맞거나 말거나 항상 연애는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성간의 연애이고,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이란다. 하기에 연애는 나이에 관계없이 가슴 설레게 만든다는 것. 오늘 한 번 연애를 시작해 봐. 나이께나 먹은 사람들의 연애 중에 가장 좋은 상대는 바로 자신의 곁지기라는 것. 늘 연애를 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요즈음 연애에 대한 글이 자주 올라온다. 물론 ‘연애에 대한 정석이 있나, 없나?’ 에는 확고한 대답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듯, 연애에 대한 대답 또한 정답은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내가 다르고 상대가 다르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이 한 가지 룰에 적용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누군가 ‘당신 연애다운 연애 해보았어?’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과연 연애다운 연애가 무엇인가라는 해답 또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연애를 잘하기로 소문이 난 친구에게 조언을 들었다가, 괜히 망신만 당했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이 일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도 연애의 정석은 변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녀사이의 애정표현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 애정표현은 그야말로 ‘순수’였다면, 현재의 애정표현은 ’발랄‘이라고 해야 할까? 어차피 내가 연애블로거도 아닌 다음에야, 그 표현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내 속내를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거의 애정표현은 그야말로 순수했다? 이 순수라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참 답답하기도 한 모습이다. 가슴 속에 담아두고서 혼자만 끙끙거렸으니 말이다. 요즘 시쳇말로 하면 ‘짝사랑’에 가깝다고 해두자. 마음에 있는 말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경우가 많고, 그러다가 자신의 가슴에 있는 사람이 훌쩍 딴 사람 품으로 날아가 버리면, 술로 세월을 달래기 일쑤였다. 한 마디로 답답한 인사들이라고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 하나는 참으로 오래 간직하고 살았다. 그렇다고 요즈음 젊은 세대들의 마음에 그런 애틋한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의 순수한 감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것을 당당하게 밝힌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이렇게 솔직한 마음을 토로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발랄’이요, ‘당당’이다.

그러나 그 발랄하고 당당한 가운데서도 그 애틋한 마음은 변치가 않은 것만 같다. 나름대로 한 사람에게 향한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점에서 세월은 흘러도 연애의 정석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외형만 달라졌다고 보는 것이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진정성이 보인다면 연애해 보아도 좋다.

그런 순수한 감정을 어떻게든지 표현을 하는 사람들. 그 표현을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다. 그보다는 그 표현은 좀 어눌해도, 마음에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그런 사람과 연애를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마음에 진정성을 어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선 상대방만 배려를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눈에 항상 푸근한 감정이 실려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쉽게 만났다가 쉽게 헤어진다고 한다. 헤어질 때 깨끗하게 헤어지면 ‘쿨하다‘고 표현을 한다. 과연 그 쿨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보내는 것이 쿨한 것일까? 말로는 쉽게 헤어진다고 하지만, 그 속이 얼마나 탔는지는 본인이 아니면 알 수가 없지 않을까? 쿨하고 안하고는 바로 본인의 마음속에서만 알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제 삼자가 왈가왈부 논할 수는 없지 않을까?

사족이 길면 글이 어지러워진다. 지금 이글을 쓰는 내가 그렇다. 연애박사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니. 참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 만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남녀사이의 애정에는 정석이 없다. 다만 순수한 열정을 갖고 사랑을 했다면, 그것이 바로 그 두 사람이 하는 연애의 정석이 된다.

만일 내 이성친구가 진정성을 보인다고 하면, 표현은 그리 멋지게 하지 못해도 꽉 잡아라. 그것이 바로 좋은 이성을 얻는 방법이다. 나중에라도 그것이 오래 세상을 살면서도 꾸준한 사랑으로 내 곁을 지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면서 한 번도 안 해본 이야기 하나를 해야겠다. 체질적으로 연애이야기는 맞지도 않거니와, 표현력 또한 부족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도 머쓱하긴 하다. 그러나 지금도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참으로 아까운 여자를 놓쳤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를 당당하게 만드는 여자

지금이야 세상이 많이 바뀌어졌다. 하지만 사람의 심성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아마 지금 세상에도 이런 여자가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총각 때니 아마도 내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어섰을 때쯤으로 기억이 된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동료였으니, 벌써 40년은 지난 이야기이다.


한 직장에 있는 동료와 연애를 한다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늘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이 설레기도 하니까. 또한 복도에서라도 마주치면 눈인사라도 하고 지나치지만, 그 또한 직장생활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당시는 근무를 마치고 데이트를 한다는 것이, 분위기 좋은 곳을 찾거나 좋음 음식을 먹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가까운 곳에 있는 길을 걷는다거나, 음악다방에 가서 차를 한 잔 마시는 것이 고작일 때이다. 그런데 그렇게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고 계산을 할 때면, 내가 들고 다니는 책을 슬그머니 집어간다.

그리고는 핸드백을 열어 무엇인가를 책갈피에 끼워, 다시 책을 돌려준다. 책 표지를 열면 그 안에는 언제나 빳빳한 지폐 몇 장이 들어있다. 그것으로 계산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언제나 앞장 서 문을 나선다. 남자를 당당하게 만드는 행동이다.

무용을 하는 이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인가 위였다. 아마도 그 친구 집안에서 반대가 없었다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 길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집 안의 반대라는 것이 그리 쉽게 넘길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결국 그 친구는 외국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았을 텐데 말이다.

결코 앞서지도 나대지도 않는 여자

당시는 길을 걸을 때도, 지금처럼 찰떡 붙듯 왜 붙어 다니지 못했는지 모른다. 지금 젊은이들이 보면, 머 이런 바보 같은 연인이 다 있나 하겠지만. 길을 갈 때도 한 번도 앞장 서는 일이 없었다. 다만 앞을 설 때는 어쩌다가 길거리에 몇 개 없었던 육교라도 오르려면, 항상 한 발 앞서 육교를 오른다.

그런 행동이 하도 이상해서 물어보았다. 왜 육교를 오를 때는 나보다 먼저 오르는가를. 대답을 듣고 참으로 세상을 올곧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자가 험한 길을 걸을 때는 남자가 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남들 보기에 남자가 여자를 보호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처음 여자를 새겨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두고두고 잊히지가 않는 것이, 아마도 이런 마음 때문인가 보다. 남자를 편하게 하는 여자. 그리고 남자를 당당하게 만들 줄 아는 여자. 이런 여자가 지금도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연애에 대한 글을 써보질 않아 표현력이 부족하여 고작 이렇게 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지만, 아마도 이런 여자가 있다면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조건 잡아야 내 인생이 잘 된다는 생각이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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