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에서 1번 국도로 따라 조치원을 향하다가 보면, 금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작은 정자가 보인다. 연기군 남면 나성리 101번지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충남 문화재자료 제264호인 ‘독락정(獨樂亭)’이 자리한다. 독락정이란 말 그대로 혼자 낙낙하는 정자란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이 정자는 고려 말의 무신인 전서 벼슬을 지낸 임난수 장군을 위한 정자이다. 임난수 장군은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정벌을 했던 무장이다. 장군은 고려가 망하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금강 월봉 아래서 16년간을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끝까지 섬기던 임금에 대한 충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금강가에 외롭게 서 있는 독락정

장군의 아들 임목이 지은 독락정

독락정은 조선조 세종 19년인 1437년 임난수 장군의 아들인 임목이 부친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 후 여러 번 고쳐지었으며, 주변에는 낙락장송이 우거져 있다.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 독락정. 지금은 길 위에 홀로 외롭게 서 있는 이 정자는, 임난수 장군의 마음을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다.

정자는 크지가 않다. 처음부터 이런 형태로 지어졌는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 서 있는 소나무에서 그 역사를 짐작할 수가 있다. 낮은 담으로 둘러친 정자는 금강 쪽은 담을 낮게 해 마루 위에서 강을 바라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정자의 특징은 주춧돌이다. 팔각의 장주추를 써서 기둥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형태의 건축물이라 그런지 작아도 무게가 있어 보인다.



정자는 낮은 담으로 둘러쌓다(위) 주추는 팔각의 장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가운데)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아래)

정면 3칸, 측면 2칸인 독락정은 마루 중앙 뒤편으로 방을 놓았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방을 드릴 때는 온돌을 놓지만, 독락정은 그대로 마루로 연결하고 사방을 문으로 마감을 하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흐르는 금강을 내려다보면서 취흥에 젖고는 했을 것이다. 정자로 오르니 벽에는 편액이 걸려있다. 독락정기와 독락정시의 두 편의 편액이 벼슬을 떠난 임난수 장군의 쓸쓸함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담장 밖에서 사진을 찍다가 성이 차지 않아 월담이라도 해야 하나를 고민한다. 정자 뒤에 난 일각문을 보니 잠을 통이 그냥 걸려있다.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정자에 올라 금강을 내려다본다. 저만큼 무슨 공사라도 하는 것인지, 물이 탁하게 흐른다. 예전 정자를 짓기 전에 이곳에 올랐을 장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자에는 독락정기와 독락정시의 두 편의 편액이 걸려있다

아마 망해버린 고려에 대한 아쉬움이 남달랐을 것이다.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면서 스스로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에 와서 여생을 끝낸 임난수 장군. 그 자손들에게도 나라를 위한 충심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선친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독락정은 가을의 햇볕만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정자에 오를까? 난 늘 그 정자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정자를 세운 뜻을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백사람이 모두 생각이 다르다고 하니, 어찌 그 뜻을 감당할 것인가? 오늘 독락정에 올라 장군의 마음을 헤아려보지만, 무심히 흐르는 저 금강처럼 나도 무심히 떠나는가보다.


가운데 뒤편으로 마루방을 들이고(위) 주변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들이 서 있다. 

향나무가 마을의 길흉을 점친다. 향나무의 생육이 좋으면 마을에 경사가 겹치고, 생육이 안좋으면 마을에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한다. 수령 400년이 훨씬 지난 이 향나무는 연기군 조치원읍 봉산리 128의 1에 자리한다. 천연기념물 제321호인 이 향나무는 입구에 철책으로 문을 달아 보호를 하고 있다.

향나무는 측백나무과에 속한다. 원산지는 한국과 중국 등이며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이 나무는 강화 최씨인 중용이 심었다고 전하는데, 후손들이 잘 가꾸어 놓았다. 향나무를 많이 보았지만 봉산동 향나무를 보는 순간,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런 나무가 도대체 어떻게 자라난 것일까?


천연기념물 제321호 연기 봉산동 향나무 전경(위)과 가지를 받쳐놓은 버팀목(아래)

봉산동 향나무, 용이 따로 없네.

수령이 400년이 지난 이 향나무는 위로 자라지를 못했다. 나무는 3.2m 정도에서 옆으로 가지를 뻗었는데, 그 가지를 수많은 통나무로 버팀목을 만들어 괴어놓았다. 버팀목은 사방으로 늘어놓고, 그 위를 다시 옆으로 늘어놓아 흡사 가지가 버팀목을 싸안고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

밑동은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있으며, 위로 오르면서 가지가 뒤틀어져, 마치 용이 엉켜있는 듯한 모습이다. 잔가지 역시 그렇게 엉켜서 자라났다. 수 십 마리의 용들이 사로 엉켜있는 듯한 봉산동 향나무. 그 앞에서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 오랜 세월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밑동에서 올라가는 가지들은 용이 뒤틀고 있는 형상이다. 많은 모습들이 그 안에 있다.

밑동의 둘레가 2.5m 정도나 되는 이 나무는 극진한 효자인 최중용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효성을 자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심었다고 전한다. 그래서서인가 자손들은 이 나무를 끔찍이 위하고 있다. 향나무의 주변에는 탑 등으로 정리를 하고, 향나무 둘레는 축대를 쌓아 보존을 하고 있다.



위로 오른 가지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배우다

요즈음 분재라고 하여서 나무를 철사 등으로 고정을 시켜 멋진 모습으로 키워낸다. 가끔 이런 나무들을 보면서 '참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는데, 이 향나무 앞에 서는 순간 그런 생각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이렇게 자연적으로 자라난 나무가 예술적으로 자랄 수가 있었을까?

한 마리 용이 몸을 뒤틀고 있는 모습도, 아름다운 무희가 살포시 버선코를 내딛고 한발자국 뛰어 오르는 모습도, 나무에 달린 커다란 눈이 사람들을 향해 안녕을 바라는 듯한 모습도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무 한 그루에도 이렇게 자연의 조화는 무궁무진하다. 이런 자연의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자연의 조화를 느끼게 하는 이 향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지났다.

석송령이나 반룡송처럼 소나무가 옆으로 가지를 뻗은 것은 보았지만, 이렇게 향나무가 옆으로 자라난 것은 보기가 힘든 것 같다. 그런데 이 봉산동의 향나무는 그대로 자연을 느끼게 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 하나를 본 것이다. 이것보다 아름다운 선물이 또 어디 있을까? 석양에 향나무 곁을 떠나지 못하는 발길을 억지로 재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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