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나무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대상물을 일컫는다. 솟대의 기원은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분포는 만주, 몽골, 시베리아, 일본 등에 이르는 광범위 한 지역이다. 이 솟대를 부르는 명칭은 지역마다 달라 전라도에서는 소주 혹은 소줏대라 부르고, 함흥 지방에서는 솔대,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는 솟댁, 강원도에서는 솔대, 경상도 해안 지방에서는 별신대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솟대는 형태를 기준으로 솟대, 짐대, 설대, 새대, 장승대 등으로 구분되고, 기능을 기준으로 수살, 추악대, 진목, 소줏대, 표줏대, 효대 등으로 구분한다. 또한 마을의 동제와 관련해서는 당산, 진또배기, 별신대, 성황대 등으로 명칭이 달라지며, 세워진 위치에 따라서는 거릿대, 갯대 등으로 부른다. 이는 모두 모두 신간(信竿)으로서의 기능과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솟대의 시작은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인가?

 

이러한 솟대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은 삼한 시대에 전해진, 각 고을에서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천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일을 말하는 ‘소도(蘇塗)’에서 유래했다고도 본다. 신성한 지역을 상징하는 소도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출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도가 변한 것이 마을을 지키는 직능을 가진 신성한 신간인 솟대로 변했다는 것이다.

 

솟대는 대개 마을의 입구에 세워,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미리 예방한다는 뜻으로 세운다. 솟대만을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돌탑, 장승 등과 같이 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솟대는 참나무로 만들어 마을입구에 세우고, 그 위에는 오리를 만들어 올려둔다. 대개는 솟대 위에 한 마리를 얹는 수도 있지만, 끝을 갈래지게 해 두 마리를 올리기도 한다. 이 위에 올리는 새는 마을마다 달라, 기러기나 까마귀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새의 종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위에 새를 올리는 것은 멀리 날고, 높이 날 수 있는 새를 올림으로써 먼 곳에서부터 오는 액을 막는다는 뜻으로 풀이를 하기 때문이다.

 

 

“저는 솟대가 하늘과 인간을 이어준다고 봐요”

 

기온이 34도를 웃돈다는 8월 11일(일), 화성 행궁 안에 있는 체험장에서 솟대체험을 지도하는 이병렬(남, 55세) 씨를 만났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가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일부 인기 종목에만 몰려있다.

 

“남자아이들은 대개 부채, 각시탈 같은 것을 만들고, 여자 아이들은 구슬 공예 같은 것을 좋아하죠. 솟대는 부모님들과 같이 온 아이들이 부모님의 권유에 의해서 체험을 하는데, 여름철에는 이상하게 하는 아이들이 많지가 않아요.”

 

더운 바람이 나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열심히 솟대제작을 하고 있는 이병렬씨. 그림을 전공했다는 이병렬씨가 솟대에 빠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우연히 장승을 보게 되었어요. TV에 나오는 지리산 벽송사의 장승을 보고, 그 장승에 반해 후배와 함께 벽송사를 찾아갔죠. 그 때부터 장승도 만들고 목조각 등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솟대를 만들게 되고, 이곳 행궁 체험장에는 한 3년 전부터 아이들 체험을 시작한 것이죠.”

 

그는 솟대를 만들기 이전에는 많은 일들을 해왔다고 한다. 미술을 전공한 덕분에 인쇄소에서 디자인 등도 해보았다고. 이러저런 일들을 하다가 3년 전부터는 솟대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이 솟대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신령한 기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새라는 날짐승은 위로 높이 날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을 상징하고, 그 뿌리는 땅에 박혀 있어 인간을 상징하다고 보죠. 그 하늘(새)과 인간(땅)을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신간(대)이 되는 것이죠. 이곳은 휴일이나 주말과 일요일에만 운영을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여주 능서면에 있는 목조각을 하는 곳에서 많이 보냅니다.”

 

 

이병렬씨는 ‘이음새’라는 나무와 물감, 흙 작업을 하는 작업실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곳 화성 행궁에 나오지 않을 때는 그곳에서 주로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행궁동에는 이번에 수원에 거주하는 작가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생태교통이 시작되면 생태교통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작품도 보여주고 공동 판매도 하겠다고 한다.

 

“작가들이 이렇게 작품 활동을 한다고 해서 생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생태교통 때를 맞아 작품판매도 하고, 공동으로 많은 프로젝트를 맡아서 해보고자 하는 것이죠.”

 

후텁지근한 날씨에 사람들도 지쳐가고 있는 무더위지만, 작은 새들을 지주목 위에 올리느라 연신 손질을 하는 이병렬씨. 그의 가짐대로 이 솟대들이 하늘의 기운을 받아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1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월 6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규모가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지난 410일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아직 이른 철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주변에는 산수유가 망울을 터트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굿 보신 적 있으세요?”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답은 두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 나온다. 그 첫째는 “굿 좋죠. 우리 굿이야말로 정말 축제죠”라는 대답이다.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그래도 우리 문화나 정체성에 대해서 조금은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굿 TV에서 가끔은 보았는데, 무섭기도 하고요”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사람들이 있다. “굿 그거요 미신이고 귀신들이 장난질 하는 것이잖아요” 라는 대답을 하는 부류이다. 이런 사람들은 난 종교적 사대주의자라고 표현을 한다. 한 마디로 굿이 무엇인지 그 어원조차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여기서 어떤 특정 종교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굿은 아주 오래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그 굿을 통해 우리는 감사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먼 뜬금없이 굿 이야길 하자고

 

굿 이야길 하자고 하면 아마 삼년 열흘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만큼 한 때 우리 굿에 미쳐 살았다. 오늘 뜬금없이 굿 이야길 하자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굿판에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도대체 저 사슬세우기는 왜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바로 그 특별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굿판을 혹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굿을 하는 도중에 통돼지나 족발, 혹은 소머리 등을 월두나 삼지창 등에 끼워 세우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슬세우기’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떡시루 등을 걸어서 세우기도 한다. 이 사슬이 잘 서야 그 굿을 신령들이 잘 받았다고 흔히 이야기들을 한다.

 

그런데 사슬세우기는 두 가지가 있다. 이런 굿판에 진열되었던 돼지나 떡시루 등을 세우는 사슬세우기가 있고, 또 하나는 물동이 위에 무당이 직접 올라서서 뛰는 ‘용사슬 세우기’가 있다. 용사슬이란 물동이 안에 물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슬'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

 

'사슬을 세운다' 는 것은 무의식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행위를 말한다. 대감이나 장군, 혹은 별상이나 신장 등에서 사슬을 세우는데, 사슬을 세우는 것은 단순히 중심을 잡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상당히 깊은 뜻을 내재하고 있다. 무의식에서 ‘사슬’이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사슬' 이란 고리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생태계 등에서도 '먹이사슬'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먹이고리’를 말하는 것이다.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사슬이란 의미도 이런 고리로 연결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즉 창이나 삼지창 등을 자루를 밑으로 하고, 위에 소머리나 돼지머리 우족이나 통돼지 등을 올려 중심을 잡는 행위이다.

 

이것은 두개의 연결고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슬을 세우는 것은,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의 연결을 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 안에 신에게 올리는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하기에 이 사슬이 잘 서야 신령이 감응을 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바로 그런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가 사슬인 것이다.

 

무격이 직접 고리가 되는 용사슬

 

무당들이 자신이 모시는 신령들을 위하는 굿인 맞이굿 등을 할 때나, 내림굿 등을 할 때는 항아리에 물을 담고 그 위를 한지로 덮어놓는다. 이 위에 오르는 것을 ‘용사슬’이라고 한다. 흔히 ‘용사슬 세운다’ 혹은 ‘용사슬 탄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 역시 사슬과 다름이 없다.

 

일반적인 사슬은 제물로 대신하지만, 용사슬은 무당 자신이 직접 제물이 되는 것이다. 즉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인 사슬을 자신이 직접 세움으로써, 자신이 주제자(主祭者)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사슬이란 단순히 중심을 잡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중요한 뜻을 가진 하나의 신성한 의식이 된다.

 

‘굿은 미신이다’라는 일제의 허망한 이야기가, 아직도 공공연히 종교적 폄하로 사용이 되고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깝기만 하다. 굿을 제대로 이해를 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 굿을 이용해 정말로 혹세무민을 하는 사람들. 이제 제발 이런 마음 아픈 이야기들은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온전한 사슬이 서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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