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아침부터 수원시의 22개 인정시장상이회의 모임인 수원시 상인연합회(회장 최극렮) 회원들이 점포의 문을 닫고 수원역에 모였다. 이들은 추석을 전후해 문을 열 계획으로 있는 롯데쇼핑몰의 철수를 외치며 집회를 가졌다. 오후 2시부터 시작한 역전 집회는 오후 430분 경에는 지리를 지동교 앞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되었다,

 

이날 상인들은 단결 투쟁이라 쓴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롯데쇼핑몰 때려잡고 전통시장 지켜내자

애경입점으로 지역상권 초토화 되었는데 롯데쇼핑몰 웬말이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롯데쇼핑몰의 입점을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롯데가 들어간 지역은 골목상권까지 모두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역의 상권이 망가진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라는 것이죠. 저희 수원은 10여 년 전에 애경백화점이 들어오면서 상권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로데오 거리는 당시만 해도 극장만 6곳이 있었어요, 젊은이들이 발길을 돌리면서 상가가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했죠. 이제 경우 그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롯데라니요.”

 

 

롯데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수원시 상인연합회 회원은 5,000여명 정도라고 한다. 각 시장마다 회원의 수가 50명 이상이면 인정시장이 된다. 인정시장은 모두 22개 시장이다. 인정시장의 상인연합화 회장단들이 돌아가면서 롯데쇼핑몰을 성토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이번 집회는 전국상인연합회장과 경상도 등에서도 상인회장들이 참석을 하여 함께 성토하는 자리를 가졌다.

 

롯데쇼핑몰과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롯데가 입점한 곳에서는 모두 상권이 죽었다고 합니다. 수원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역의 모든 경제를 장악하려고 할 것이고요. 그래서 저희도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죠.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통시장을 지켜내야 합니다.”

 

 

한 회원은 날이 무덥고 히도 들지만 이렇게라도 상인들이 뭉치지 않으면 수원을 그냥 롯데에 내주는 꼴이라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장을 보러 시장에 나왔다가 집회를 보고 있눈 시민들도 문제해결을 위해 시민들도 동참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기도.

 

시민들의 사고와 전통시장의 변화가 있어야

 

문제는 수원시민들의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이 그동안 수원의 경재를 이끌어 온 전통사장을 이용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통시장이라는 곳이 우선은 교통도 불편한데다가 날이 덮거나 추우면 장을 보기가 힘들죠. 그러니 대형매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교통도 편리하고 우선 매장 안이 쾌적하니까요.”

 

 

집회를 지켜보던 한 시민은 전통시장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이 난관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시장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을 한다,

이렇게 힘든 싸움을 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겠습니까? 시장들이 무엇인가 사람들을 시장 안으로 끌어올 수 있도록 해야죠. 요즈음 지동교는 체험과 문화공연 등으로 먾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시장이 무엇인가 즐길 수가 있고 볼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절로 모여들겠죠.”

 

거대기업인 롯데와 전면전을 선포한 수원시 상인연합회. 2시부터 수원역에서 시작한 집회는 지동됴 앞으로 옮겨 오후 530분 정도에 끝이 났다. 상인회 회장들은 이어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화성 영화역 복원을 위한 고유제 열려

 

날이 많이 풀렸다고는 하나 아직은 한 겨울이다. 119일 오후 3.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에 소재한 재래시장인 거북시장큰 길에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잠시 후에는 풍물패들이 이곳으로 모여 한바탕 풍물굿판이 벌어졌다. 큰 길을 막아 걸어놓은 현수막에는 거북시장 활성화 및 영화역 복원 기원 고유제란 글씨가 적혀있다.

 

이 고유제는 올해로 3년 째 지내고 있다고 한다. 현 영화동 주민센터 일대는 옛 영화역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이다.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남쪽 역참의 중심인 양재역을 옮겨

 

영화역은 정조의 화성 축성 이후에 한양의 남쪽에 거주하던 남쪽 역참의 중심권으로 삼았으며, 화성에 인구를 모으는 방법으로 양재역을 이곳으로 옮겼다. 당시 양재역의 관사와 관원만이 아니라, 역참에 속한 주민들 모두를 모두 이주시켰다.

 

영화역은 북문인 장안문 밖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역의 건물인 영화관 등을 합해 모두 52칸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 영화역은 물론 역 주변의 마을까지도 19세기 말 역참제도가 시행될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관은 정조의 능행차시 정조를 가장 먼저 맞아들이는 곳이었다.

 

 

지금도 영화초등학교의 뒷산을 마장산, 또는 역마산이라고 한다. 이 곳에 말을 놓아먹이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일대는 장용외영의 무사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영화역 복원을 위한 고유제가 열린 것이다.

 

152억 원의 예산으로 2016년까지 복원

 

당시 역이란 당시의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던 말을 빌리거나 말에게 먹이를 주고, 관원에게 숙박 편의를 제공하며, 관물 및 진상품 운송의 임무를 맡던 곳이다.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영화역은 2016년까지 모두 152억 원의 예산을 들여 복원을 할 계획이다. 이날 고유제에는 초헌관인 차한규 거북시장 상인회장, 아헌관인 박정애 영화동장 등 100여명이 참석을 하였다. 영화역의 복원은 화성과 행궁 복원에 이어 영화역까지 복원을 마친다면, 정조 당시의 화성일대의 구조물들이 대부분 복원이 되는 셈이다. 영화역의 복원에 대한 거북시장 상인들의 마음은 이날 읽은 고유제 축문에 잘 나타나 있다.

 


영화역 복원 기원 고유제 축

 

이제 단군 국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지 4346. 수원화성북문 거북시장 상인회장 차한규는 감히 밝혀 고하옵나이다. 경기도 수원화성을 수호하여 주시는 천지신명이시여, 수원의 역사는 유구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선양하는 고장입니다. 화성의 영화역이 생활현장에서 사라진지 백여 년이 되어 영화관유적복원이 한스러운 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화관 복원! 오호라 이제 천지신명의 가호로 경기도 도정시책으로 영화역 능행로 복원이 실현하게 되었음을 고유하옵니다. 화성이 세계인이 공유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되살리고, 아름다움을 길이 전하고자 합니다.

 

정조임금의 어록을 회고 하옵건데 현륭원 효행 백리길 길목인 영화역을 지나면서 돌아보건대 백성들의 주거환경이 약간은 이루어졌으니 이윤 주공의 도가 사실함께 모이어 역말을 둠직도 하구나. 사행의 수레가 번갈아 달리니 마정의 접응과 가장 큰 관계가 있고, 우호가 구름처럼 모여드니 가히 살림을 경영할 만한 곳을 접하였네. 드디어 거류하는 신하에게 터를 잡도록 명령을 내려 이에 양재도역을 옮기었네. 입암(할미퉁수바위)을 곁에 두고 터를 쌓으니 이곳은 곤빈의 정숙함이 맞추었고, 준성을 항하여 집을 지으니 완연히 천마의 형상을 대하였네. 성문을 떠나 백무쯤 되는 곳은 조금씩 촌락이 이루어지고 영화관 집 50칸을 지으니 날개처럼 세모난 서까래가 번쩍 들렸구나. 관원이 거접하니 모든 역중의 우두머리로다”(이하 하략)


모처럼 마음 편하게 기차에 올랐다. 그저 단 며칠이지만, 세상 시름 모두 내려놓고 쉬러가는 길이다. 기차에서부터 몸을 축 늘어트린다. 3일간이지만, 세상에서 피곤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벌써 내릴 때가 되었다. 아마도 그동안 이일저일로 쌓였던 스트레스가 사람을 지치게 만든 것인가 보다.

역에서 내려 차를 타려고 택시 승강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부르는 것 같다. 뒤를 돌아보니 낯선 남자 하나가 쫒아온다.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잘 모르겠는데요.”
“벌써 한 8년 된 것 같네요. 잘 모르실거예요”
“죄송합니다만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 누구신지?”
“저 예전에 역전에서 노숙하던 사람입니다. 선생님께 매번 술값을 달라던”
“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도시. 그 안에는 별별일이 다 있게 마련이다.

밥 대신 술을 사달라던 사람이

그렇게 이야길 듣고 보니 얼굴이 조금 떠오르는 듯도 하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몰골이 추했을 때고, 지금은 이렇게 멋진 신사가 되어있으니 알 수가 있나.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시면 저는 아마 지금도 역에서 노숙을 하고 있을 겁니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나저나 지금 몇 살이세요?”
“저 지금 마흔 일곱입니다. 이름은 ○○○이구요”
“그래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하네요.”

쉴 새 없이 퍼붓는 질문에 이 분 웃어가면서 이야기를 한다. 당시 매년 연말이 되면 내가 하는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많은 분들게 너무 많이 받았다고 늘 미안한 생각이 들었을 때다. 조금이나마 남에게 베풀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 털목도리와 털장갑, 양말 그리고 과일과 빵 등을 봉지에 담아 50봉지 정도를 준비해, 역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이런 것 말고 10,000원만 달란다. 술이나 한 잔 먹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돈을 주었더니, 이 사람이 역에서 만날 때마다 술값을 달라는 것이다. 노숙을 하면서 오죽이나 힘이 들면 그럴까하고 이해도 하지만, 심한 것 같아 혼을 낸 적이 있다.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술 먹을 돈으로 밥을 먹고 힘을 내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준 것이다.

그 뒤로 그 사람을 역에서 볼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어디로 갔는지 그 뒤로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혼을 내시고 난 뒤 처음에는 더러워서 살아보겠다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원망을 하면서요. 그런데 돈이 모이고 방이라도 얻고 보니, 선생님의 마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서 여기저기 찾았는데 영 소식을 듣지 못하겠대요.”

세상은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된다고 했던가? 그 일 이후 난 그곳에서 사람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고, 그 고장을 떠나버렸다. 그리고는 그쪽으로 몇 년을 발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신수가 훤해진 사람을 만난 것이다. 역시 세상은 이래서 재미가 있는 것인지.

아마도 이 사람은 무슨 이유로 노숙을 했는지는 몰라도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나보다. 그렇게 바로 일어설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노숙인들이라고 다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나도 남들에게 아픔을 당한 것이, 다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해서 나도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결국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받는 업보는 아닐까 모르겠다. 

“선생님 연락처 하나 주세요. 제가 아이들하고 꼭 한 번 찾아뵙고 싶습니다. 제 아내도 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어합니다”

명함 한 장을 건네주고 돌아 나오면서, 어쩌면 이것이 올 한가위 선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이 사람이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 아닐는지. 날이 잔뜩 흐렸는데도,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음이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마을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다. 마을에 옛 민속자료 등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곳을 찾아서이다. 아직도 마을에서 지성으로 당제 등을 모시고 있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니고 보면, 나로서는 그렇게 전해지는 우리 것이 고맙기 한이 없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는 그런 면에서는 정말 몇 개의 지정 문화재보다 더 값진 마을이란 생각이다.

무촌리는 조선시대 남상면의 서남쪽에 자리했던, 고천방에 있었던 ‘무촌역’을 중심으로 한 마을들이다. 그 인근을 ‘무촌역리’라 한데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 예전에는 역이 있는 곳에는 파발마를 두고, 원 등을 두어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말을 바꿔타기도 하고 쉬기도 했다. 아마도 이 무촌리에 그런 역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상매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과 이야기를 들려준 마을주민들

네 곳의 당(堂)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어

현재 무촌리는 상매 · 하매 · 무촌 · 인평 · 성지 · 지하 등 여섯 개의 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행정리이다. 길가에 있는 무촌마을에서 연수사 방향으로 내를 건어 들어가다가 보면 ‘하매’마을이 있고, 그 안으로 ‘상매’마을이 나온다. 매산이란 이름은 이곳이 ‘매화낙지형’의 명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도로변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상매마을. 마을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네그루의 소나무가 탑을 에워 쌓듯 길가에 서 있다. 누석탑으로 쌓은 이 탑에서 내를 건너면 바위 암벽 위에 또 하나의 돌탑이 있다. 소나무 밑에 있는 탑은 ‘아들탑’이고 내를 건너 바위 위에 올린 탑은 ‘며느리탑’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정자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다. 아직도 마을에서 당제를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예전과 같지는 않아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네 곳에 있는 당을 돌면서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마을 윗쪽에 있는 윗당산인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

오랜 세월 전해진 전통, 그대로 남은 풍습

경남 거창군에는 아직 마을에 옛 풍습인 당제를 지내는 곳이 많이 남아있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새마을운동,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해 많은 곳이 마을에서 내려오는 풍습을 버렸는데도, 이곳은 옛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분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본다. 혹 마을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상매마을에는 모두 네 곳에 당이 있다고 한다. 윗당산과 아랫당산으로 구분이 되는 네 곳의 당은, 마을 위편으로 올라가 암벽 밑으로 맑은 물이 마을로 흘러드는 곳에 할아버지 당이 있다. 그리고 마을이 끝나는 곳 산자락에 할머니당이 자리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큰 애기들이 키를 쓰고 뛰어다녔다는 내. 그러면 비가 왔다고...

당에는 모두 정월에 제를 지내면서 금줄을 처 놓아 쉽게 구분이 된다. 마을주민들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이 마을은 비가 안 오면 앞내에서 키를 뒤집어쓰고 뛰어다녔어”
“누가요?”
“마을 큰 애기들이”
“그러면 비가 왔나요?”
“하모. 오고말고.”

농사철에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으면 집집마다 밀가루를 걷어 빵을 한다는 것이다. 그 빵을 마을에 사는 큰 애기들에게 나누어주고 키를 하나씩 뒤집어쓰게 한단다. 그리고 마을 앞에 있는 내로 나가,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비를 오라고하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내를 바라보며 괜한 웃음을 짓는다. 그 광경이 떠올라서이다.


아랫당인 아들당과 내 건녀 암벽 위에 쌓은 며느리당

영험한 당산나무를 자르고 나더니...

무촌리의 무촌, 상매, 하매는 모두 정월보름날 자정을 기해서 당제를 올린다. 시간상으로는 열나흩날 밤이 되는 것이다. 상매마을에서는 먼저 할아버지당에서 제를 지낸 후, 할머니당을 거쳐 아랫당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자정에 시작한 당제가 아랫당으로 오는 시간은 아침 6시경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음식을 새로 장만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아들당 주변에는 원래 소나무가 다섯 그루가 서 있었지"
“지금은 네그루뿐이던데요.”
“한 그루는 더 컸는데 그 당 옆에 있는 논 주인이 나무그늘이 생겨 농사가 잘 안된다고 잘라버렸어. 그러고 나서 두 부부가 이유도 없이 죽고 말았지.”

뫼를 지어 제를 올리고 난 뒤 한지에 싸아 돌틈에 넣어 놓은 뫼

마을주민들은 신령한 당산의 나무를 잘라서 벌을 받았는가보다고 이야기를 한다. 마을 입구와 뒤편을 에워 쌓고 있는 네 곳의 당산. 아들당에서는 그 자리에서 뫼를 지어, 제를 마치고나면 한지에 쌓아 탑 안에 넣어 놓는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아들당산의 탑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탑돌 틈 사이에 한지에 쌓은 것이 보인다.

아주 오랫동안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모시는 있는 상매마을 당산제. 오늘도 마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마을에는 아직 한 번도 변고가 일어난 적이 없어”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