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한다. 그것도 아주 해괴한 생각 말이다. 아마도 찜통더위가 계속되면서, 하도 햇볕에 싸돌아다니니 머리에 이상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그 절터 한 복판에 장방형의 석조물 한기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보물 제8호인 ‘고달사지 석조대좌’이다.

 

난 이곳을 들릴 때마다 이 석조대좌 위에 올라앉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위에 올라가 하늘에 흐르는 구름만 바라보아도 바로 부처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가끔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해대는 것도, 무료한 답사를 즐겁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찜통더위를 잊으려면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석조대좌 하나만으로 보물이 되다니

 

이 석조대좌는 현재 정리가 된 고달사지의 중앙에 자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석좌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 석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석좌가 놓인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간 쌍사자 석등이 놓여있던 자리가 그 남쪽이었기 때문이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이 석불대좌는 모두 3단으로 구성이 되었다. 위에 올렸던 불상은 사라졌지만, 이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아마도 이 위에 있던 석불 역시, 석조대좌로 가늠해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석불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고려 초기의 역작인 석조대좌, 정말 대단하다

 

방형대좌로 조성이 된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일반적인 석불좌처럼 화려하게 조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네모난 대좌는 큼직한 앙련과 안상을 새겨놓았다. 단순하지만 조화를 이루는 형태는, 당시 이 고달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이 받침돌은 상중하의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다. 윗면은 불상이 놓여 있던 곳으로 평평하니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또한 중간돌에는 한 면에 꽉 차게 안상을 새겨놓았으며, 아래받침돌에도 작은 안상을 4구씩 새겨 놓았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방형의 종첩과 연꽃과 안상을 교차적으로 조각하여, 밋밋함을 느낄 수 없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승탑과 동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여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같은 고달사지 내에 소재한 국보 제4호인 여주 고달사지 승탑의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대좌의 축조시기가 승탑과 같은 고려 초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달사지 석조대좌. 불상을 올려놓았던 이 석조대좌가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8월 4일의 찜통더위에 찾아간 고달사지. 그곳에서 만난 석조대좌로 인해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힘든 답사길의 새로운 즐거움이다.

받침돌의 중대석에 나한의 안면을 새긴 독특한 석불좌상. 그런데 이 받침돌의 석재가 제 짝들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만일 이 받침돌이 제 것들이라면 이런 독특한 석불좌상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만 같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경남 거창군 거창읍 김천리에 소재한 거창박물관 경내 야외에 자리하고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3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여래좌상은 마리면 말흘리 송림마을의 절터에서 발굴되었다. 처음에는 마리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다가, 박물관을 개관할 당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석조여래좌상은 민머리인 소발에 머리위에는 무엇인가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듯하며,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훼손이 심한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이 석불좌상은 얼굴도 심하게 훼손이 되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귀가 어깨에 닿을 듯 길게 표현이 되었으며, 눈은 가늘고 옆으로 길게 표현을 해 눈초리가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코와 입은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이 되어 있다. 법의는 양어깨에 통견으로 걸쳐 길게 늘어트렸으며, 여러 가닥의 주름으로 표현을 하였다.

소매 부분에는 여러 갈래의 좁은 주름을 만들었으나 훼손이 심하다. 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길게 늘어진 소매 끝으로 나온 팔의 모습이나 손의 형태는 심하게 훼손이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손을 가슴위로 끌어올려 손바닥을 마주한 것처럼 보인다.




중대석에 나한을 새긴 독특한 기법

이 석불좌상은 연꽃받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형태로 조형이 되었다. 그러나 두 다리는 앞면이 떨어져 나가 제대로 된 형태를 알기보기가 힘들다. 다만 가슴에 모은 손 밑이나 무릎 위에 보이는 법의의 형태로 볼 때 속옷을 입고 매듭을 묶은 듯하다. 이런 형태의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면, 상당히 섬세하게 표현을 한 아름다운 석불좌상이었을 것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불상받침인 연화대는 송림마을에 있던 불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짜 맞춘 것이라고 한다. 하기에 이 세 부분으로 나눠진 연화대가 제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 현재 연화대는 상, 중, 하 세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하대석의 경우에는 훼손이 심하여 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다.



상대석은 넓게 원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위가 넓고 아래로 비스듬히 좁아지게 하였다. 위 받침돌에는 위를 향한 앙련을 큼지막하게 조각하였다. 하대석의 경우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재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제 짝이라고 한다면, 그 주변을 앙련의 꽃잎이 아래로 향하게 새겨 넣었을 것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특징은 바로 가운데 돌인 중대석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중대석에는 사람의 얼굴모양을 돋을새김 하였는데, 이 안면상은 나한상을 조각한 것이다. 이렇게 중대석에 나한상의 안면을 조각한 예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 나한상을 조각한 중대석으로 인해, 이 석조여래좌상의 조형미가 한층 뛰어나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을 찾을 수는 없으나, 그 모습 하나하나에서 뛰어난 신라의 석조미술을 알아내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다만 천년이 넘는 세월을 비바람에 씻긴 채 방치가 되어있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심하게 훼손이 된 모습으로 두 손을 마주하고 있는 석불좌상. 아마도 우리 후손들의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은 아니었을까? 6월 10일 거창군의 답사에서 만나본 많은 문화재 중, 가장 마음 아픈 사연을 지닌 석불좌상이었다.


돌로 만든 석불대좌. 그 위에는 석불좌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감탄을 불러 올 수 있다면, 그 위에 좌상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최고의 석조 예술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위치한 고달사지. 그 고달사지 높지 않은 축대위에 자리한 석불대좌는, 그야말로 대단한 작품이었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사각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사각 대좌뿐이 아니라, 그 어떤 대좌보다도 뛰어난 수작이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장방형의 석재를 상, 중, 하대 3중으로 겹쳐 놓았다. 이른바 방형대좌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3단으로 꾸며진 방형의 석불대좌

대좌의 상대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그 형태가 시원하다. 뚜렷한 조각솜씨는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고달사지는 나라에서 관리를 하는 사찰이었던 점을 보아도, 이 석불대좌를 조각한 공인은 최고의 기능을 갖춘 석공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중대는 사면을 돌아가면서 큼직한 안상을 하나씩 조각하였다. 음각으로 새긴 안상은 바라만 보아도 명쾌하다. 하대는 상대와 같은 연꽃을 앙련으로 새겨 넣고, 그 아래에는 작은 안상을 한 면에 4개씩 새겨 넣었다. 상하의 조각을 앙련으로 마무리를 해, 방형의 사각형에 중첩과 안상, 연꽃을 교체하여 뛰어난 조화를 엿볼 수가 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

설을 지내고 난 다음날인 2월 4일. 눈길을 걸어 찾아간 고달사지에는 인적이 없다. 정초이기도 하지만, 황량한 이곳을 정초부터 찾아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적한 고달사지를 둘러본다. 저만큼 석조며 귀부와 이수, 그리고 낯선 석조각들이 보인다. 그 고달사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석불대좌. 낮은 축대 한편으로는 돌계단이 보인다.

그 돌계단을 올라 석불대좌 주변을 돌아보면 잘 다듬은 초석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이 금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본다. 이 석불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석불은, 아마도 이 고달사의 주불이었을 것이다. 대좌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본다.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대좌 위에 사라진 석불을 그려보다

석불대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다. 그 장대석의 크기도 예사롭지가 않다. 고달사지 안에서도 가장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기둥을 세웠던 초석이 가지런히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중앙에 석불대좌가 놓여있는 것이다. 대좌를 앉힌 기단석은 원래는 커다란 바위를 네모나게 조형을 한 것 같다. 반이 금이 가 있으나, 동서가 갈라진 곳이 다르다. 그리고 그 위에 일석으로 하대를 조성했다. 네모나게 층을 만들고, 사방에는 네 개의 안상을 음각했다. 그 위를 덮고 있는 앙련이 부드러움을 느낄 만큼 정교하다.

중대는 상대와 하대에 비해 좁게 만들었다. 각 면에 하나씩의 커다란 안상을 음각하였는데, 그저 밋밋한 그 안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맨 위 상대는 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아래는 앙련을 위에는 꽃잎을 조각하였다. 상대의 위는 석불이 앉았던 자리이다. 그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도대체 이 방형의 거대 석불대좌 위에 올려 졌던 석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무리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지만, 딱히 그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있고, 좁고 길게 찢어진 눈에,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어깨에 걸친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을 테고, 발은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고통을 받는 중생들에게, 그 미소로 아픔을 가시게 해주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수작인 석불대좌 위에, 조악한 작품이 올라앉았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바람에 밀려 고달사지를 떠나면서 내내 뒤를 돌아다본다. 석불대좌 위에 금방이라도 석불이 나타나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할 것만 같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 1번지에 소재한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부도이기 보다는 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부도가 탑형이나 석종형 등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이 진전사지 부도는 아래에 탑처럼 이중의 기단부를 설치하고 그 위에 부도를 놀려놓았다. 현재는 탑 옆에 진전사라는 절이 있다.

이 진전사지 부도는 조성시기를 9세기 중반으로 추정하는데, 신라 선종의 종조인 도의선사의 부도탑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몇 번이고 찾아간 부도탑이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롭다. 아마 이 부도의 생김이 여느 부도와 같지 않은 모습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물 제439호 양양 진전사지 부도

진전사지 부도 기단부는 탑

이 진전사지 부도의 기단은 이중으로 조성을 하였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짜 4매를 붙여 놓았다.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어 석탑과 같은 형태이다. 갑석 역시 4매로 짜놓았다. 상층기단 중석은 2매로 조성을 하였으며, 각 면에는 우주를 표현하였다. 갑석의 아랫면에는 부연이 있다.

탑과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단부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 틈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만큼 진전사지 부도는 정교하게 제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보인 진전사지 3층 석탑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당시에 이 진전사가 어느 정도 세를 갖고 있었는지 가늠이 된다.



앙련을 새긴 뛰어난 부도의 받침

2단의 기단 위에 올린 탑신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다만 탑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이 굄돌에는 16연의 앙련이 돌려져 있어 뛰어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옥개석 역시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처마가 날렵하게 표현이 되어 자칫 무거운 부도를 무게를 탈피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탑과 부도를 합쳐놓은 것만 같은 진전사지 부도. 뛰어난 조각을 조성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부도를 특색 있게 꾸며놓았다. 탑 위에 올린 부도,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옥개석 등의 반전이 부도를 보는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옛 선인들의 놀라운 조형술

이 진전사지 부도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내세우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생각을 한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절제된 미를 갖고 있으며, 그렇다고 밋밋한 것도 아니다. 수많은 부도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탑과 부도를 합한 특색 있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이런 부도를 조성을 했다는 것에 대해, 옛 선인들의 뛰어난 조각술에 감탄을 한다.



부도탑을 돌아보는데 절에서 키우는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쫒아온다. 절에서 키우는 대개의 개들은 사람들에게 길이 들어 있는가보다. 낯선 사람이 와도 짖지를 읺고, 오히려 함께 놀아달라고 조르기가 일쑤다. 이 개도 부도탑 주위를 돌면서 영역표시라도 하는 듯 떠나지를 않는다. 무료한 문화재 답사에서 가끔은 이런 풍경이 있어,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을 하면서 떠나는 길에, 절집 백구가 배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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