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명칭을 육송정 홍교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 다리 부근 어딘가에 육송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물 제1337호인 고성 육송정 홍교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소재지가 두 곳의 지명을 사용하는 것은, 이 홍교를 놓은 내가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간성읍에서 고성 건봉사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군 훈련장과 같은 곳이 보인다. 그리고 현재 사용하는 다리 옆에 육송정 홍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 홍교는 보물인 건봉사 능파교와 비슷한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영조 24년인 1748년에 편찬된 간성군읍지에는, 이 홍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아 건봉사 능파교보다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 암반을 이용해 축조한 홍교

 

육송정 홍교는 하천의 폭이 12.3m 정도가 되는 곳에, 10.6m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 위는 양편으로 네모난 장대석을 줄지어 놓고, 그 위에 황토 등으로 메우는 방법을 택했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본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육송정 홍교는, 동쪽은 그대로 암반을 이용해 그 위에 홍예돌과 비슷한 크기의 장대석을 올렸다.

 

서쪽은 3단의 지대석을 쌓은 뒤, 그 위에 홍예석으로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이 지대석의 1단은 땅 속에 묻혀있어, 그 크기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2단과 3단의 지대석은 커다랗고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각각 두 장의 돌을 붙여놓았다. 그 크기는 2단의 높이가 70cm 정도이고, 3단은 60cm 정도인데, 3단의 가운데는 안쪽으로 파손이 되었다.

 

 

이 육송정 홍교는 축조한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능파교와 함께 영조 21년인 1745년 대홍수 때 붕괴가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능파교를 축조한 숙종 30년인 1704년이나 그보다 앞섰을 것으로 추정한다.

 

꾸밈이 없는 단아한 육송정 홍교

 

이 육송정 홍교의 특징은 홍예와 날개벽 사이의 교각 면석을 장대석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자연적인 냇돌을 사용하였는데, 아래편에는 큰 돌을 위편에는 작은 돌을 써서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단칸 홍교로는 보기 드물게 단아한 형태로 축조가 된 육송정 홍교는, 20066월에 홍교를 해체 복원하였다.

 

 

홍예를 구성하고 있는 장대석은 갈고 짧은 것을 적당히 섞어 공고하게 축조를 하였다. 2~3장의 장대석으로 이를 맞추어 쌓은 홍예는 매우 견고하게 보인다. 홍예밑으로 흐르는 물은 암반 위로 흐른다. 하기에 물이 스며드는 것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을 듯하다.

 

동편 홍예의 지대석을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육송정 홍교는 단아하다. 화려하게 모양을 낸 여느 홍교와는 달리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다. 다리 하나를 놓으면서도, 이런 세세한 면까지 신경을 쓴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을 할만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육송정 홍교. 아마도 이 다리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육송정 홍교 위에 서서, 몇 번이고 소리를 내어 감탄을 한다.

'팔달산 고인돌길'.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난 이 길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 싶다. 이 길은 지방유형문화재인 팔달산 ‘지석묘군’을 답사하기 위해 올라갔다가 우연히 붙인 이름이다. 그저 뒷짐을 지고 몇 바퀴를 돌기에 적당한 길이고, 아이들과 함께라면 자연과 문화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이런 길을 만난다는 것도, 알고 보면 행운이란 생각이다.

 

그저 혼자 40분 정도를 걷다가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 냈다. 용도길, 화양루길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제일 적당한 이름이 '팔달산 고인돌길'이란 생각이다. 이런 이름을 붙여놓고 혼자서 싱글거린다. 지나는 사람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뒷짐을 지고 소나무 길을 걸어본다.

 

 

'팔달산 고인돌길', 이름 어때요?

 

나름대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즈음 조금만 경치가 좋아도 사람들은 길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나야 길 전문가도 아니니, 구태여 길에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적당한 이 길을 그냥 지나친다면,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를 소개하는 사람의 본이 바로서질 않는다는 생각이다.

 

수원 팔달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을 좌측에 놓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9월 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작은 손 카메라 하나만을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른다. 비가 내리는 날 숲으로 들어가면 숲의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가끔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후두둑’ 소리를 낸다면, 그 또한 자연의 소리일진데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구태여 산이라고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을 듯한 경사이다. 조금만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지석묘군.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를 비켜나면,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쌓은 화성의 용도 방향으로 오르게 된다.

 

그보다는 지석묘를 알 수 있는 이름이 좋다

 

이 길을 걸으면서 '용도길'이나 '화양루 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도, 이 길을 따라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화양루와 그 옆에 용도 곁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 안으로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성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그저 '고인돌길'이란 명칭이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지석묘군을 지나면 용도의 끝에 마련한 화양루가 보인다. 이 길은 온통 암반이다. 이곳의 돌들은 과거에 화성을 쌓기 위해 성돌을 채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바위를 잘 살펴보면 돌을 쪼아낸 흔적도 보이고, 성돌로 사용함직한 크기의 돌도 보인다. 그 바위와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길 위에 화양루와 용도가 보인다.

 

소나무와 암반이 어우러진 길

 

용도의 성벽을 우측으로 두고 천천히 걷는다. 용도 안에서는 용도가 꽤 높이 쌓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용도를 끼고 걸어보니, 이렇게 낮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에전에는 성벽 밑이 가파른 비탈이었을 텐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렇게 길이 생겨났다. 조금 걷다보면 용도서치를 지나고, 잠시 후 서남암문 위에 올려 진 서남포사가 보인다.

 

 

서남포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은 노송 숲이다. 비가 내리는 날 숲속에서 맡아보는 솔 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누군가 돌탑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지석묘. 두어 바퀴를 더 돌았는데도 시간이 4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번 그 길을 반복해서 지나는 분에게 몇 바퀴나 도느냐고 물었다. 그저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단다.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길'. 그것이 바로 팔달산 고인돌길의 멋이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 수 있나? 괜히 그 길에 취해 멈춰 선다. 저만큼 비에 젖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외롭게 앉아있다. 그 또한 자연이란 생각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지고, 화성을 손으로 느껴가면서 걸을 수 있는 길. 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부담이 되지 않는 이런 길이 나는 좋다.

‘천령’은 ‘하늘재’라는 소리이다. 지금의 경남 함양군이 바로 신라 때 명칭이 천령이었다. 신라 때는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성이라 칭하였으나, 신라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천령군으로 개칭하였다. 당시는 이곳이 육로를 이용해 다니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했던가? 함양군에는 어느 곳 보다도 많은 정자들이 있다. 그만큼 이 곳의 산천경계가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함양군의 곳곳에는 수많은 정자가 즐비하게 서 있다. 물이 있고 산이 아름다우면, 그곳에는 반드시 정자가 서 있기 마련이다. 함양군에는 정말 아름다운 정자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손으로 꼽자면 난 당연 거연정을 머리에 둔다.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거연정

거연정은 1872년에 지어졌으니, 130년 정도가 지난 정자이다. 정자의 연륜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화림재 전시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7세손인 전재학, 전민진 등이 건립을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거연정은 ‘내가 자연 안에 거하고, 자연이 내안에 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팔정팔담(八亭八潭)이라고 했던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거연정 앞을 흐르는 내에는 8개의 정자와 8곳의 소가 있었다는 곳이다. 그만큼 바위 암벽을 타고 흐르는 내는 절경을 만들고 있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거연정은 내부에 판방을 두고 있으나, 뒷벽의 판재만 남아있고 삼면의 문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바위에 부딪는 물소리, 선계가 따로 없어

비는 줄기차게 쏟아진다. 전날 밤에 많은 비가 내렸는지, 계곡을 차고 흐르는 물이 잿빛이다. 바위에 부딪는 물은 금방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저만큼 거연정이 보인다. 암벽 위에 홀로 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정자. 겹처마에 합각지붕을 이고, 자연 암반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다. 건너편에서 구름다리로 연결해 건널 수 있도록 한 거연정. 멀리서 사진을 찍고 나서 다리를 건넌다.




물소리가 더욱 거칠다. 정자 뒤편 낮은 암반을 타고 흐른 물이, 깊은 소에서 춤을 추며 맴돈다. 빗소리가 절로 흥취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발길을 멈춘 것이나 아닌지. 정자 안에는 여기저기 편액이 걸려있다. 저편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각자를 해놓았다. 정자 밑으로 내려가니, 이런 멋을 어디서 또 볼 것인가?

마음에 여유를 본다. 높고 낮은 바위를 그대로 이용해 많은 기둥을 세웠다. 기둥이 서기 힘든 곳은 층이 나게 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다. 앞뒤, 사방으로 물길이다. 그 물길 안에 거연정이 바람처럼 홀로 서 있다. 누구랴 이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저만큼 한줄기 거센 물살이 몰려온다. 아마 저 위 바위틈에서 거연정의 경치에 반해, 길을 멈추고 있었나보다. 그 물길이 거연정으로 몰려들어, 소리를 내며 소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지금은 비록 낡고 퇴락한 정자. 그 흔한 단청 하나 하지 않은 맨살을 들어내고 있는 정자. 거연정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4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비가 오는 날 찾은 거연정은, 그렇게 스스로를 물 위에 내보이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답사를 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이라고 해서 답사를 떠났는데, 그냥 쉬고 있을 수는 없다. 우비를 하나 구해 입었더니 온 몸에 땀이 흐른다. 바람이라고는 들어올 수 없는 비닐이고 보니, 온몸이 후끈거리고 금방이라도 몸에서 쉰내가 날 듯하다.

함양군은 정자가 많은 고장이다. 정자뿐 아니라 수많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하루에 몇 곳을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지만, 이곳을 둘러본 블로거 ‘바람 흔적 김천령’님이 동행을 해주는 바람에,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비는 내리고 전날 과음을 한 탓에 몸은 무겁지만, 그래도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일두 정여창을 생각해 지은 군자정

군자정,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정자 이름이다. 군자란 일두 정여창을 말하는 것이다.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다.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가 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으며, 1504년 사후에 갑자사회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러나 광해군 10년인 1610년에는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군자정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소재한 경남 문화재자료 제380호이다. 이 정자는 정여창의 처가동네로, 이곳에 들려 유영을 할 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를 자주 찾았다고 전한다.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의 5세손인 전세걸이, 일두 정여창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군자정을 지었다고 하니 벌써 200년이 지난 정자이다.


자연암반을 그대로 주추로 삼아 정자를 지었다.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군자정

군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다. 아래는 자연 암반위에 그대로 기둥을 놓았다.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암반을 주추로 삼은 것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군자정은 아래를 조금 높은 기둥을 세우고, 짧은 계단을 이용해 정자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로 다가가니 앞으로 흐르는 내는, 비가 온 뒤라 물이 불어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주변은 온통 바위로 되어 있는데, 이런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던 것 같다.

정자 안에는 여기저기 작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거쳐 갔을 것이다. 정자는 난간을 둘러놓았으며, 계단은 오래도록 보수를 하지 않은 듯 아래쪽이 다 썩어버렸다. 기둥에는 음식물을 반입하지 말라고 적혔는데, 주변 음식점들이 이곳에서 손님을 받는다고 귀띔을 해 주는 사람이 있다.



정자 안에는 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군자정은 아름답다.

문화재주변에 늘어놓은 술병 불쾌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군자정. 가까이 다가가보니 참 가관이랄 밖에. 주변에 음식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손님이라도 받았는지, 재떨이로 썼을 그릇들이 정자 밑에 보인다. 한편에는 바위에 빈 술병을 늘어놓았다. 여기가 아니라고 해도 술병을 모아놓을 공간은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문화재 옆에다가 놓은 것일까?


군자정 옆에 빈 술병들이 늘어서 있어 볼썽사납다. 계단도 보수가 시급한 편이다.

문화재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보존해야 한다. 꼭 담당을 하는 공무원들만이 보존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렇게 많은 술병들이 늘어서 있다면, 어제 오늘 놓아 둔 것이 아닐 텐데 아무도 관리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일까? 하루 빨리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이 사라졌으면 한다. 말로만 하는 ‘문화대국’이나 ‘문화국민’이란 소리가 이젠 듣기조차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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