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엄정면 미내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5호 윤민걸 가옥은, 윤민걸의 고조부인 윤양계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양반가 한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담이 있고, 중문을 들어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다. 안마당에 있었을 행랑채는 유실이 되었다고 하며,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초가로 지은 광채와 뒷담을 벽으로 삼아 꾸민 사당이 있다.

충주시청 홈페이지에 보면 윤양계는 <병마절제도 위 연길현감 도청부도사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고종 2년인 1865년에 이 집에 살았다고 안내문에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집을 지은 지는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윤양계가 이 집에 살았다는 고종 2년에 연길현의 현감이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연일현의 오자로 보인다. 승정원 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고종 3(1866)년 5월 16일. 경상 감사 이삼현(李參鉉)의 장계에서 진휼하여 구호한 각읍 가운데 베풀어 도와준 것이 뛰어난 수령들의 별단을 등문(登聞)한 것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하양 현감(河陽縣監) 류치윤(柳致潤)은 오고(五考)를 기다리지 말고 군수에 승천(陞遷)시키되 별천(別薦)의 예로 시행하고, (중략) 연일 현감(延日縣監) 윤양계(尹養桂)와 고성 현령(固城縣令) 윤석오(尹錫五)는 모두 가자하고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고, 우병사(右兵使) 이주응(李周應)은 가자하고, 대구 영장(大邱營將) 서형순(徐珩淳)은 방어사의 이력을 허용하라.‘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이 윤민걸 가옥의 조성연대가 언제인지는 좀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고종 2년에는 윤양계는 연일현감으로 재임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연일에 있었다고 해서 충주에 집을 짓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사랑채의 뛰어난 미적 감각

안담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별채라고 부르는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평면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중앙의 전면1칸은 튼 마루로, 그리고 좌측의 한 칸을 툇마루로 조성을 하였다. 뒤편으로는 온돌방을 놓았으며, 우측의 1칸은 마루를 높여 우물마루를 깔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사랑채 같은 형태인 듯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난 곳이 많다. 우선 우측의 마루방을 높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창호가 색다르다. 이 방은 일반적인 사분함 여닫이문이 아닌 중방 위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중앙에 툇마루는 앞을 터놓았는데, 좌측의 툇마루는 방처럼 꾸몄다는 것도 이 사랑채의 특징이다.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벽에 새인 듯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지난해에 보수를 하면서 그린 것인지, 아니며 오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재미있다.



안채와 아래채의 단아함

안채는 ㄱ자형으로 꺾여있다. 좌측으로부터 부엌과 두 칸의 방, 대청이 있고 안방의 꺾어진 부분에는 큰 방을 드렸다. 큰 방의 끝에는 판자로 벽을 막은 한데아궁이를 두고 그 위에 다락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 안방의 뒤편에 마루로 놓은 돌출된 부분이 있다. 안채의 우측 벽면에 돌출을 시킨 이 부분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던 '안 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뒤편의 툇마루 끝에 출입문을 달아 놓은 마루방과 안방에서 들어갈 수 있는 마루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안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부엌에서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큰 집이라면 까치구멍이 양편으로 나 있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윤민걸 가옥은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이 뒤편의 문 옆으로만 있다. 연기 등이 안마당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다.



왜 바깥담을 아름답게 했을까?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3칸의 마루방을 드린 사당이 있고, 그 옆에 초가로 지은 광채가 있다. 그런데 뒷담에 나 있는 사주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바로 바깥 담장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광채와 사당채의 뒷벽이 그대로 바깥담이 되어있는 윤민걸 가옥의 특징이다. 사당과 광채가 떨어진 ㄱ자형으로 되어있는데, 이 바깥담인 벽을 모두 심벽으로 처리를 했다. 왜 이렇게 바깥담을 아름답게 치장을 한 것일까? 이런 바깥담에 대한 꾸밈은 집의 전체가 그렇다. 솟을대문부터 바깥담을 모두 심벽처리를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까? 두고두고 고민을 해야 할 문제인 듯하다.



고택은 아름답다.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숨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집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 집을 지을 때는 자신들이 가장 사용하기 적합하게 꾸민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개성을 강조한 것이 우리 고택의 멋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변해가는 서구식의 가옥들. 그런데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꿋꿋하게 버티어 낸 나름대로의 고집 때문이다.


400년이 나 된 집이 있다면, 먼저 어떻게 아직도 그런 집이 보존이 되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할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집이 신라 때는 절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또한 집안에 잇는 석물들도 신라 때의 것이 아직도 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경주시 탑동 633번지에 소재하는 중요민속자료 제34호인 ‘김호장군 고택’은 장군이 태어났다는 집이다. 이 집은 개인의 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김호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산첨사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생각 밖으로 조촐한 가옥

중요민속자료라고 하면 우선은 그 규모가 상당하리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김호장군의 고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안채가 있고, 그 우측으로는 뒤편에 사당이 자리한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초가로 마련한 아래채가 서 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으로 마련한 가옥이다.

안채도 그리 크지가 않다. 임진왜란 당시의 첨사면 이보다는 더 큰 집에 살 것이란 생각을 하고 들어간 것이 내 한계였다. 집을 들어보는 순간 ‘참으로 조촐한 집이로구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큰 집일 것이란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움을 먼저 느낀다. 장군의 단아한 심성을 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솟을대문과 안채의 부엌(가운데) 그리고 초가로 된 아래채(아래)

5칸의 안채는 마루조차 없어

안채는 솟을대문과 마주하고 있는 - 자형의 구조이다. 모두 5칸으로 구성이 된 안채는 측면도 한 칸으로 지어졌다. 서쪽부터 부엌과 방, 대청과 방으로 꾸며진 단출한 집이다. 건물은 옛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며, 대청에도 문을 달았다. 현재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조금은 안으로 손을 본 듯하다.

장군의 집을 찾아들어 갔을 때는, 마침 무슨 모임이라도 있는 날인가 보다. 집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안채가 이렇게 단순한데 그 외에 건물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을까 싶다. 부엌을 뺀 안채는 모두 4칸으로 툇간조차 달지 않았다.



안채 동편과 안방, 장독대

솟을대문은 후에 다시 복원을 하였는지, 양 옆으로는 한 칸씩을 달아냈다. 한편은 곳간으로 사용하고 한 편은 방을 드렸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한 칸으로 초가집이다. 두 개의 방을 드리고, 안채 쪽에 한 칸의 부엌을 달아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음식을 준비하는 듯 분주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 이상은 돌아다니기가 미안스럽다.


우물과 사당(아래)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물

이 집안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우물이다. 아주 오래된 것 인양 고풍스럽다. 돌로 주변을 놓고, 가운데를 좁게 오므려 놓은 특이한 우물이다. 안에는 맑은 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이 집에서 원래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이 집이 신라 때의 절터였다고 하면, 저 우물의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데도, 마치 비어있는 집인 듯 조용하다. 집안에 모인 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다과를 들고 있는 듯하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담장이 특이하다. 돌로 만든 담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참으로 조촐하고, 운치 있는 집을 보았다는 생각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는데, 장군의 절제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운치가 있는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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