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정월 나혜석이 그랬는가 보다, 나혜석의 이름을 딴 거리에는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물론 행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원 도심에서 계층을 가리지 않고 이 거리처럼 많은 사람이 찾아드는 곳은 없을 것이다. 726일 오후에 찾아간 나혜석 거리는 마침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정월 나혜석은 1896428일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에는 수원 삼일여학교(현 수원 매향여고) 1회로 졸업하고, 191317세에 진명여자보통학교를 3회로 졸업했다. 진명여고를 졸업한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유학생으로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나혜석은 21세인 1917년부터 정월이라는 호를 사용해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23세인 1919년에는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소설인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그해 3,1독립운동 참가로 6개월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이듬해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을 한 나혜석은 다음해 여성 최초의 시인 <인형의 집>을 발표한다.

 

 

수많은 최초를 기록한 나혜석

 

31세인 1927년에는 여성최초로 세계일주여행을 한다. 그리고 파리에서 미술수업을 받는다. 1929년에 귀국한 나혜석은 1931년에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하고 남편인 김우영과 이혼을 한다. 1939년에는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1935년에는 현 팔달구 지동으로 귀향을 해 <반도 여성에게> 등 시와 수필을 발표한다.

 

그리고 수원에서 수원 서호, 화령전 작약 등 20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41세 때는 수덕사로 만공스님을 찾아간 나혜석은 본격적인 구도를 시작한다. 42세 때는 수덕사, 마곡사, 다솔사, 해인사 등을 오가며 마지막으로 집필한 <해인사 풍광>을 발표한 후, 1948121052세로 서울시립 자제원(현 용산구청 자리)에서 무연고자로 사망했다.

 

 

정월 나혜석에 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우리 문화사에 남긴 족적은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나혜석을 기리고자 하는 거리인 나혜석거리. 수원시 권광로 188번 길은 항상 사람들로 만원이다.

 

나혜석거리 예술시장 많은 사람들 몰려

 

나혜석`거리에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 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바로 4월부터 10월까지 마지막째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이곳에서 예술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예술시장은 직접 작품을 만들어 이곳에 나와 구매자들애게 판매를 할 수 있다. 나혜석거리 예술시장 운영위원회가 주관을 하는 이 행사는 60여명이 넘는 작가들이 참여를 한단다.

 

 

많이 참여를 할 때는 엄청납니다. 아마 거의 100여명 정도 작가들이 참여를 하는 것 같아요.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들을 들고 나오기 정말 좋은 작품들을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습니다. 아마 나혜석거리 예술시장과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나왔다는 한 주부는 너무나 살 것이 많아 즐겁다고 하면서, 연신 무엇인가를 흥정하고 있다. 작품을 들고 나왔다는 한 사람은 시간이 5시부터 8시까지라 조금 아쉽다고 한다. 8시까지로 시간을 정한 것은 이 거리가 8시부터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좌판을 깔기 때문인 것 같다고.

 

 

나혜석을 기리기 위한 거리. 그곳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4월부터 매월 마지막 주에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작품들. 어린 학생들도 참여를 한 이 예술시장으로 인해 앞으로 더 많은 발길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듯하다.

나혜석, 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이름이다. 도대체 나혜석이란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 실체를 안다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지 못한 사람은 힘든 일이다. 혹여 글 하나로 인해 지난 역사속의 인물에 대해 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월 26일,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한다. 영하 10도를 조금 밑돈다고 하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더 추은 듯하다. 수원박물관에서 12월 23일(금)부터 2012년 2월 26일(일) 까지 열린다는 ‘2011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인 ‘나는 나혜석이다’를 보기 위해서이다. 개막식을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조용히 나혜석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수원박물관 특별기획 전시 '나는 나혜석이다'의 입구


수원출신의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나혜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가요 문학가이며, 민족운동가에 여성해방론자’ 라는 긴 수식어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혹자는 나혜석을 ‘현대를 살아가는 개방적인 여성이라는 것에는 찬성을 하지만,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난해함’을 지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특별전은 혼탁한 시대를 살아갔던 신여성인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1인칭의 시점으로 되돌아보는 자리로 마련을 하였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제목이 말해주 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나혜석에 대한 사고를 바꾸어 놓기 위한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원에서 태어났다'의 나혜석의 학창시절, 학교에서 사용했던 양금과 아코디언, 그리고 가계도


‘여자도 사람이다’

나혜석이 추구한 것은 시집살이라는 올무에 갇혀 음지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여성을 추구했다. 인간으로, 그것도 당당한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세계여행을 1927~8년에 했다는 것은,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 했는지 가늠이 간다.

결국 그러한 세계여행이나 그녀가 쓴 글들에서 치열하게 남들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살았던 나혜석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전시회에서 우리가 나혜석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단지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취적이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문학가이기도 했다. 많은 책들에 실린 니혜석의 글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나혜석이다”

나혜석 특별전은 모두 6개의 파트로 구분이 된다. 나혜석의 연보를 알아볼 수 있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 ‘나는 신여성이다’로 이어진다.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는 나혜석의 가족사진과 학창시절의 학적부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나는 신여성이다 에는 나혜석 소개영상을 준비했다.

다음으로 ‘나는 세상에 말하고 싶다’에서는 나혜석의 문학작품 및 유화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인연을 맺었다’에는 구미와 프랑스의 여행기와 교류작가 자료 등을 전시했다. 다음으로는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에서는 수원과 나혜석에 대한 자료 등을 만나볼 수가 있다.


나혜석은 유화를 그리기 전 삽화작업도 했다. 아래는 나혜석의 유화가 소개된 책들


전시실에는 나혜석이라는 존재를 알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얼마나 많은 글과 그림 등을 통해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 속에 녹아있는 수많은 꿈과 이상을 만날 수가 있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합니다. 자신들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자신의 부인에게는 정조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나혜석의 이혼고백장, 1934년 삼천리)」

이 한 구절의 이야기가 어쩌면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조선의 남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을 자신들의 아래에 두고 비하시키는 그러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온 나혜석. 그녀는 오늘 “나는 나혜석이다.”라고 절규를 하고 있다. 1896년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40세 때인 1935년 다시 수원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37년 수덕사, 다솔사, 해인사 등으로 돌아다녔다.


나혜석이 그린 유화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도 한 나혜석의 흔적


10여 년 동안 절집을 돌아다니면서 나혜석은 세상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1948년 53세의 나이로 서울 시립 자재원에서 세상을 떠난 나혜석은, 아직도 세상에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수원박물관 학예팀의 이동근의 말이다.

“나혜석에 대한 자료는 많지가 않습니다. 그 자료도 모두 뿔뿔이 흩어진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모았습니다. 오늘 이 자료가 나혜석이라는 한 여성을 재조명하기에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최린(위),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나혜석은 아픔을 당하고, 사회에서 나혜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나는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지 115년. 사람들은 나를 신여성, 최초의 여성유화가, 문학가, 민족운동가, 여성해방론자라고 말한다. 나는 예술적 삶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충실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며 슬프고도 노여운 시대에 살면서 나는 그림과 글을 통해 ‘나는 나혜석이다’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특별전시 팸플릿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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