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영통구 제8회 영통청명단오제를 가다

 

“내년(2013)이 우리 영통구청이 개청을 한지 꼭 1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알차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행사를 알차게 꾸밀 생각입니다. 지난 해는 3,000명 정도가 행사장에 참석을 했는데, 올해는 한 3,500명 정도가 다녀갈 듯합니다. 벌써 8회째를 맞이한 영통 청명단오제는 지역주민들이 참석하는 단오제의 보존위원회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2년 6월 23일(토) 오전 9시 30분부터 수원시 영통구 건영4차 아파트 앞에 마련된 영통 단오어린이 공원의 행사장. 수령 530년이 지난 느티나무 아래서 만난 김영규 수원시 영통구청장은 매년 다르게 변해가는 청명단오제를 내년에는 수원시에 건의를 하여, 지역적으로 특색이 있는 축제를 만들겠다고 한다.

 

 

 

오래 전통 속에 녹아있는 청명 단오제

 

영통구의 청명단오제는 원래 예전에는 마을에 있는 당나무 아래에서, 지역에 거주하는 최모만신이 주관을 하여 ‘단오굿’을 펼치던 곳이다. 그러나 40여 년 전 굿을 주관하던 최모만신이 세상을 떠나자 중단이 되었던 것을, 지역의 주민들이 청명단오제로 재현을 하였다. 청명단오제는 예전에 농촌이었던 영통구 일원에 살던 주민들이 모심기를 마치고, 단오장을 연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단오장은 농촌에서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날이다. 일 년 중 가장 기운이 왕성한 날이라고 해서, 이날은 집안에서 일을 하는 머슴들을 하루 쉬게 하고 장에 나가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단오장에서는 항상 씨름판이 열리게 되며, 마을에서는 풍물패를 초청해 한바탕 난장을 벌리기도 했다.

 

 

 

이 날의 행사는 9시 30분에 느티나무인 당산목 아래서 제례의식인 당산제로 시작이 되었다. 식전행사로는 부채춤과 영통구의 실버합창단 등이 출연해 축하를 해주었으며, 식후에는 난타와 춤, 섹소폰 연주 등이 열기를 더했다. 주민들이 참여하는 각종 민속경기로는 그네뛰기, 팔씨름, 씨름, 줄넘기, 굴렁쇠굴리기, 새끼꼬기 등 잊혀 가는 우리 민속을 재현하는 놀이를 펼쳐 주민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지역주민들의 공동체를 창출하는 아름다운 축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동안 살아오던 영통구는, 1994년부터 영통, 영덕지구 신사가지가 형성이 되면서 수원에서는 가장 번화한 도심으로 변화하였다. 이런 영통구에는 외지인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농촌지역에서 흔히 놀이로 인해 창출이 되는 공동체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당산제에 아헌관으로 참가를 한 경기도의회 안혜영의원(위) 식전행사로 펼쳐진 부채춤


이런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마련한 것이 바로 청면단오제이다. 행사장에는 나이가 드신 분들보다 30~40대의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활기찬 젊은 영통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통구는 수원시 중에서도 가장 젊은 층이 생활을 하는 곳이다. 거기다가 광교신도시에 모든 사람들이 입주를 하고나면, 그야말로 수원의 가장 번화하고 젊은 명품도시로 거듭날 수가 있다. 당산제에 아헌관으로 참가를 한 경기도의회 안혜영 의원은

 

“우리 영통은 사람이 살기 좋은 명품도시입니다. 이제는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변화를 하면서 자칫 잊기 쉬운 우리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 이곳에 뿌리를 내린 모든 구민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영통을 만들기 위한 축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축제는 앞으로 영통이라는 명품도시를 전국적으로 가장 가볼만한 축제로 키워나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소 등위에 타고가는 젊은 엄마(위)와 식후행사로 펼쳐진 난타공연


행사장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달구지에 올라탄 아이들이 소리를 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극성스런 어머니들은 직접 소 등에 올라타고 행사장을 돌기도 해,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축제를 만나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축제에도 ‘옥에 티’는 있는 법. 행사장에 간이화장실조차 준비가 되지 않아, 아파트 관리동이나 상가의 화장실까지 멀리 다녀야 하는 불편을 겪기도 했다. 또한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음악을 크게 틀어놓아 진행에 미숙한 점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이런 점은 축제를 진행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앞으로 축제의 진행을 함에 있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궁이다. 행궁의 문인 신풍루를 들어가면 좌우로 군영이 있고, 우측 군영을 들어가는 협문 앞에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속을 다 비워버린 수령 600년의 이 느티나무는, 행궁을 세우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높이 30m에 둘레가 6m나 되는 거목이다.

이 나무는 화성 성역 이전부터 서 있던 나무로, 수원을 지키는 신령한 나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영목(靈木)’ 또는 ‘규목(槻木)’ 혹은 ‘신목(神木)’이라고 부르며, 이 나무를 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뭇가지라도 하나 건드리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화성 행궁 안에 자리한 정자인 미로한정과 수령 600년인 지난 느티나무인 영목(아래)

사람들의 염원을 가득 달고 있는 느티나무

사람들은 항상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이미 수령이 600년 이상이 되었지만, 큰 가지는 고사에서 또 다시 가지를 쳐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1982년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화재로 인해 훼손이 되었다. 수원시에서는 2003년 5월에 대대적인 나무살리기로 수술을 감행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정월에 행궁을 들린 수많은 사람들은 이 나무에 소원지를 걸어놓는다. 누구는 가족의 건강을, 또 누구는 사업의 번창을, 그리고 어떤 이들은 합격을 빌기도 했다. 결혼을 갈망하는 사람들도 있고. 부를 축적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무에 손을 대고 간절히 빌면,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나무이다. 아마 이산 정조도 이 나무에다 손을 대고 강력한 왕권을 이루기를 빌지는 않았을까?

늙어서 쉴만한 정자, 미로한정

미로한정(未老閒亭), 행궁의 뒤편 팔달산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정자이다. 처음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작은 정자가 육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미로한정’이란 뜻은 나중에 늙어 한적하게 쉴만한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조 14년인 1790년에 단 칸으로 지은 정자이다.



미로한정은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뒤편에 나 있는 득한문을 통해서 접근을 할 수가 있다. 득한문을 나서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면, 우측에는 초병들이 지키고 있는 내포사가 있고, 그보다 약간 높은 곳 남쪽방향에 자리한다. 단 한 칸으로 된 정자는 그렇게 홀로 한가롭게 서 있다. 이 정자를 돌아보면, 정조 이산이 화성행궁에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노후를 생각한 정조의 뜻이 담긴 정자

미로한정의 뒤편으로는 팔달산으로 오를 수 있는 작은 협문이 담장에 나 있다. 그 위로 비탈이 진 길을 오르면, 바로 서장대로 오를 수가 있다. 그런 자리에 미로한정을 지은 정자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정자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정조는 노후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싶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궁에 있는 정자들은 화려하다. 그러나 이 미로한정은 앞쪽을 댓돌을 놓아 트고, 남은 부분은 모두 난간을 둘렀다. 난간도 화려하지가 않다. 마루를 깐 한 칸의 작은 정자. 그 협소한 모습에서 정조 이산의 마음을 읽어내려 힘쓴다. 아마도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이곳에 올라, 홀로 상념에라도 잠기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루어야할 강한 왕권에 대한 깊은 마음을 이곳에서 정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미로한정은 그런 정조가 자신만의 공간으로 마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훤히 트인 앞을 내다볼 수가 있고, 팔달산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 복원 된 미로한정에 사용 된 옛 주춧돌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끝내 이루지 못한 정조의 깊은 뜻 때문인지. 1월 29일 찾은 미로한정. 주변으로는 찬 바람을 맞으며, 철모르는 풀들이 벌써 땅을 밀고 올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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