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산을 오르다가 보면 이천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영월암이라는 크지 않은 절이 있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칭하고 산 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실증적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 영월암에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마애여래불이라고 하지만은 그 모습은 오히려 나한상에 가깝다. 이 자연암석에 조성한 마애불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가 보인다. 이는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럼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영월암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한 절로 추정하고 있다.

 

영월암 창건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화좌대와 광배

 

사람들은 꼭 국보나 보물이라야 문화재인줄로만 알고 있다. 물론 국보나 보물이 더욱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유형문화재나 향토유적 등도 같은 문화재이다. 그것을 어디서 지정을 한 것인지가 다를 뿐이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지자체에서 지정한 향토유적이라고 해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은근히 울화가 치미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천시 향토유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영월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영월암 창건 장시에 조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당시는 이 광배와 연화좌대가 주불을 모시고 있었을 것이다. 주불은 없어지고 광배와 연화좌대만 도괴되어 있던 것을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 놓고, 그 위에 1980년에 새롭게 불상을 조성해 놓았다.

 

마모가 심한 광배

 

광배는 한 장의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배형으로 조성한 광배는 많이 마모가 되어 문양 등을 쉽게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찬찬히 보면 2조로 된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현재 좌불상이 있어 뒤편에 있는 복판을 촬영하기는 무리였지만, 원을 중심으로 단엽 8판을 연잎을 둘렀다.

 

중앙의 연잎 주위에는 불꽃을 상징하는 화염문과 당초문을 조성하였다. 두광의 상부와 신광의 좌우에는 화불이 3구 조성되어 있으며, 불상을 주착했던 흔적이 나 있다. 광배의 전체높이는 156cm, 폭은 118cm이며 두께는 45cm 정도이다.

 

 

생동감이 넘치는 연화좌대

 

연화좌대도 대좌에 조각한 것들이 많이 마모가 되었다. 하지만 한 마디로 장엄하다는 느낌이 든다. 연화좌대는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8각으로 조상한 안상, 그 위편에는 앙련좌와 복련좌를 쌓아 올렸다. 4부분으로 조성한 좌대는 각각 1석을 사용해 조성하였다.

 

전체높이가 107cm인 연화좌대는 생동감이 넘친다. 앙련좌 위에 올린 팔각형의 석주에는 나한상을 조각한 듯하다. 그러난 심하게 마모가 되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이 광배와 연화좌대 주변에는 몇 개의 석물이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이 영월암의 역사로 보아, 옛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월 23일, 한 낮의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오른 영월암이다. 그저 몇 발자국만 걸어도 땀이 비오듯 한다. 이런 날 답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하지만 문화재라고 해서 늘 좋은 날씨에만 찾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 더위에 올라 만난 수중한 문화재 한 점.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소중하단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그 문화재에서 기운을 얻고는 한다. 언젠가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만난 노스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네는 그렇게 천년이 지난 것들을 보고 다니니, 그것에서 나오는 기운을 많이 받을 것이네’라는 말씀이셨다. 아마도 그런 기운이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에는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5호인 흥법사 터가 있다. 이 흥법사 터에는 보물 제463호인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와 제464호인 흥법사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 진공대사 탑비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탑비의 몸돌은 깨어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아, 이곳에는 비의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 있다.

 

 

뛰어난 조각기술이 돋보이는 받침돌인 귀부

 

진공대사는 장순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하여 왕사가 되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의 건국 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그의 설법에 감응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진공대사는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탑의 몸돌이 없어져 받침인 귀부 위에 머릿돌인 이수를 올려놓은 형태로 있는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 거북의 몸에 용머리를 한 고려 초기의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이 귀부는 용머리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귀의 옆에는 물고기의 아가미가 벌어진 것처럼 펼쳐져 있으며, 귀는 위로 솟아 있다. 용의 머리 위에는 네모난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은 용 뿔을 조각해서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앞 뒤 네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는 형태로 조각이 된 발은, 동적인 힘을 느낄 수가 있다. 목은 짧은 편이며 거북의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으로, 만(卍)자 무늬와 연꽃을 새겨 넣었다.

 

머릿돌의 조각솜씨 보고 절로 탄성이

 

비의 몸돌이 없어져 귀부 위에 이수만 얹혀 있는 진공대사 탑비의 머릿돌. 앞면 중앙에는 <진공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머릿돌에는 모두 여섯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중앙으로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고, 양편에 밖을 주시하고 있는 각각 한 마리씩의 용이 있다. 뒤편으로도 양편에 한 마리씩의 용이 있어, 전체적으로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 형태이다.

 

 

 

이 이수의 형태는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돌로 만든 조각품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진공대사 탑비의 받침돌과 머릿돌.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그 비문에는 진공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흥법사지 정비 아쉬워

 

원주 지정면에서 다리를 건너 양평군 양동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문막으로 빠지는 새로 난 길이 있다. 이 길로 접어들어 조금 가다가 우측으로 난 소로 길로 따라 들어가면 흥법사지가 있다. 현재 흥법사지에는 보물인 삼층석탑과 진공대사 탑비 귀두와 이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주춧돌이었을 석물들도 보인다.

 

 

 

 

탑 옆에는 누군가 밭을 일구었고, 막 쌓은 축대 주변에도 모두 밭을 개간했다. 조성된 석물로 보아 한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았을 흥법사지. 그러나 이렇게 오랜 세월 방치가 되어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두 기의 뛰어난 보물이 서 있으면서도 아직 제대로 정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진입로나 주변이 속히 정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우리 문화재의 우수함을 느낄 수 있도록.

문화재나 천연기념물 등을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일 년에도 한두 번 정도 만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지나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들려 자세하게 살펴보고는 한다. 이런 버릇은 언젠가 문화재가 갑자기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난 뒤부터이다. 그 다음부터 지나는 길에 문화재가 있으면 일부로라도 들려보고는 한다.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1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 신라 말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이다. 도선스님은 이천 백사면 도립리와 함께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에서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한 그루라고 한다. 영험한 나무로 전해지는 반룡송은 이 나무의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늘로 오르고 싶은 나무

 

반룡송은 이천 백사면 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1.7㎞ 떨어진 도립리 어산마을에서 자라고 있다. 이 나무를 반룡송이라는 부르는 이유는,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는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龍松)’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다.

 

 

 

반룡송의 높이는 4.25m, 가슴높이의 둘레는 1.83m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갈라져 넓게 퍼져 있으며, 하늘을 향한 가지는 마치 용트림하듯 기묘한 모습으로 비틀리면서 180°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용송이란 이름이 걸맞다는 생각을 한다. 한 가지는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나무이면서도 두 나무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한편에 늘어진 가지는 땅에 끌릴 듯 휘어져 있다. 4월 26일 찾아간 반룡송. 벌써 6~7 차례난 만난 반룡송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으면서, 하늘을 향해 승천을 할 날을 기다리는가 보다.

 

 

 

 

많은 전설을 간직한 신비한 나무

 

이 반룡송에 전하는 이야기는 많다. 그만큼 인근마을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나무로 대우를 받고 있다.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다. 반룡송은 그만큼 신비한 나무로 알려져 있어,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특히 반룡송의 나무 표피가 붉은 색을 띠우고 있어서, 이 표피를 마을에서는 ‘용비늘’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 비늘을 건드리는 것도 화를 불러오는 짓이라고 하여, 가급적 나무 근처에서 나무에게 해를 입힐 만한 일들은 하지 않는다.

 

 

 

 

반룡송은 현재 이천 9경중에서 제6경으로 꼽히고 있다. 도선스님은 통일신라시대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 도선스님이 심었다고 한다면, 이 반룡송의 수령은 이미 1,100년 이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아직 푸른 기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반룡송. 아마 앞으로 만년을 살아 만년송으로의 이름을 갖기를 바란다. 혹 그 이전에 정말 승천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괜한 생각을 해본다. 반룡송을 뒤로하며 돌아본 나무 위로 봄날의 늦은 햇살이 아른거린다.

도선(道詵)국사는 전라남도 영암 풀신이다.신라말기의 고승으로 827년에 태어나 898년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풍수설의 대가였다. 도선은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 절마다 모두 풍수에 기인하여 창건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남원지역의 많은 절들은 대다수가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남원의 풍수를 보아 적당한 곳에 절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런 도선국사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도선은 틀림없이 신라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려 때 지은 절에 도선국사가 창건을 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생몰연대조차 정확하게 따져보지 않은 이런 류의 안내로 인해 가끔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용담사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곳이 주천면이다. 이곳 도로 좌측에 보면 용담사라는 절의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용담사에 소재하고 있는 석불입상에 관해서는 두 번째 글을 쓰고 있다. 문화재란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안목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용담사가 언제적에 지어진 절인가는 확실하지가 않다. 용담사 경내에 있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쓰여 있다. 이것은 예전의 절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의 용담사는 이름만 전하는 용담사 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정작 석불입상 앞에 적힌 또 하나의 안내판에는 전혀 황당한 긇이 적혀있다. 용담사에 관한 내력을 적은 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증없이 적어 놓은 글이 문화를 잘못 알려

<천년의 향기 - 용담사는 고려시대 사찰로써 천년전 절이 세워지기 전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있어, 밤이되면 여우로 둔갑하여 사람을 잡아먹고 농작물을 해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려도 어찌할 수 없었으나 마침 도선국사께서 큰 원력을 새워 이곳에 미륵물을 모시고 기도 중에 해탈주를 독송하니 이무기가 순간 업보의 허물을 멋고 용이되어 사라졌다. 해서 용담사라는 전설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이 설명 하나가 결국 절의 내력을 다 망쳐놓은 결과가 되었다. 신라 때 고승인 도선국사가 고려 때에 젏을 지었다는 황당한 설명에는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구를 적은 안내판을 석불입상 앞에 버젓히 세워놓아 문화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담사는 고려 떄가 아닌 신라말에 지은 절이며,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여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보이는 용담사 석불입상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대개 석불의 경우에는 불상과 광배가 따로 제작이 된다. 하지만 용담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입상과 광배를 조각하였다. 석불입상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의 거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이 석불입상은 체구가 당당하다. 

용담사 석불입상은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고려 시대 미륵의 형태이다. 머리위에 육계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은 훼손이 되어 있어서 그 형태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석불의 안면 밑으로는 양 편 어깨부근에 구멍이 하나씩 나 있는데, 이 구멍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무슨 장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는 자연석 위를 둥글게 조성하였다. 이곳에도 양편에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이 석불입상을 보호하기 위해 전각을 지었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재 하나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안내판 하나를 잘못 기재함으로써, 문화재의 소중함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잘못된 안내판은 하루 빨리 철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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