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봉산동에 있는 시림박물관 뒤편에는,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 전 대통령의 집터에 지은 집이 있다. 이 집은 원래는 초가였으나, 후에 손을 보아 보존상의 문제로 기와로 고쳐지었다. 1994년 최규하 전 대통령이 이 집을 원주시에 기증했다. 현재의 집은 1997년 원주시립박물관을 건립 할 때 옛 집과 비슷한 평면구조로 고쳐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문이 두 개인 가옥

 

현재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지에 있는 가옥은 일각문을 들어서 사랑채 안마당으로 들어설 수가 있다. 이 집의 특징은 사랑채와 광채, 행랑채가 ㄴ자형으로 붙어 있다는 점이다. 이 집의 일각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대문이 하나 있고, 사랑채를 돌아서면 광채와 연결되는 곳에 또 하나의 대문이 있다.

 

사랑채는 행랑채와 대문을 두고 연결이 되어 있다.
사랑채의 모서리 부분에는 마루방을 들여 정자 형태로 꾸몄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연결하는 가운데 난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한 칸의 행랑방이 있고, 좌측으로는 사랑채의 뒤 방문이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에 아궁이를 두어 이 방이 행랑채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모서리에는 마루방을 두었으며, 마루방은 앞으로 돌출시키고,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마루방은 정자 기능을 갖고 있다.

 

사랑채의 모서리를 돌아가면 반 칸의 헛간을 만들고 그 옆에 대문을 두었다. 그리고 한 칸의 외양간과 한 칸 반의 광채가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행랑방, 대문 세 칸의 사랑채와 꺾인 부분에 헛간, 대문, 외양간, 광의 순서로 배열이 되어 있다. 외양간의 앞면은 구유를 두고 남은 부분은 판자벽으로 막았다. 그리고 우마가 대문을 들어서 마당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외양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쪽문이 담벼락에 붙어 있다.

 

사랑채와 붙은 대문과 연결된 행랑방
사랑채 뒤편 꺾인 부분으로는 헛간과 대문, 외양간 광이 있다.
 
광채에 나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외양간의 우마가 출입하는 쪽문이 담벼락에 나 있다.

 

단소 강습소로 이용되는 안채

 

안채는 ㄱ자 형으로 꾸며져 집안의 전체적은 구성은 튼 ㅁ자 형이다. 이는 강원 영서지방의 전형적인 가옥의 꾸밈새다. 안채를 바라보고 좌측에 툇마루를 높인 건넌방을 두고, 두 칸의 대청과 꺾인 부분에 윗방과 안방, 그리고 두 칸의 부엌을 드렸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대나무로 만든 국악기의 한 종류인 단소를 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이곳에서 단소 강습을 하는가 보다.

 

대청 앞 댓돌 근처에는 신발이 여러 켤레 보인다. 단소를 배우는 사람들이 꽤 되는 듯하다. 이렇게 전통가옥을 이용한 문화강좌 등이 참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대로 방치하면 아무래도 폐허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2년 전인가 이곳을 방문 했을 때는 온 집안의 벽마다 낙서가 되어 있어,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시 이곳을 관리하던 어르신은, 눈을 잠시만 돌려도 낙서를 해놓고 간다는 말을 했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꾸며졌다. 현재는 단소 강습소로 이용을 한다
단소 강습을 하는 사람들의 신발.

 

이렇게 다시 찾은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터 가옥.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한 가옥에서 은은히 들리는 단소소리가 정겹다. 그리고 낙서하나 없는 벼름박이 보기가 좋다.

 

시원한 까치구멍을 낸 부엌

 

이 가옥의 특징은 대문 안에 있는 마구간에 우마가 출입하는 쪽문도 그렇지만, 안채의 부엌에 낸 까치구멍이다. 벽을 삼등분하여 그 맨 위를 전체를 넓게 까치구멍을 둘렀다. 부엌의 위로 시원하게 뚫린 까치구멍이 이 집의 또 하나의 볼거리다. 부엌 문 바로 옆에는 작은 까치구멍을 아래 내어 환기를 최대한으로 도왔다.

 

부엌에는 위 부분에 시원하게 낸 까치구멍이 양벽에 들러져 있다.
안방의 뒤로는 폭 넓은 툇마루를 놓았다. 주변이 들판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안채 안방 뒤에는 넓은 툇마루를 놓고 윗방과 부엌이 일직선이 되게 한 것도, 이 집의 주변에 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당시에는 넓은 들판 한 가운에 집이 자리하고 있었나보다. 단소 강습을 하고 있는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터 가옥. 다시 찾은 집안을 둘러보면서 '좋다'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한다.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나다가 보면, 목이 잘린 석불들이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의 목이 잘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조 유생들에 의한 훼파와 더불어, 일제의 석불의 목 훼손이 극성을 떨었다. 근자에 들어서는 종교적인 이질감에 의한 훼손도 합해져, 여기저기 목이 잘린 석불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자리한 원주시립박물관 뒤편 길가에 보면 석불좌상 두 기가 나란히 있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 때 남산 추월대로 이전하였다가, 1962년 5월에 강원감영과 포정루 쪽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 후 현재의 위치인 시립박물관 뒤편으로 옮겼다. 이 두 기의 불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져 새로 보수를 하였다. 새로 보수를 한 머리 부분이 조금은 걸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요즈음 말로하면 두 기의 목이 잘린 석불의 위에 새로 맞춰 올린 두상은 훈남에 속한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현재 남아 있는 몸체와 대좌만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고려초기의 뛰어난 석불좌상

 

두 기의 석불좌상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단정한 체구의 세련된 형태, 법의는 통견에 평행 옷주름 등이 신라 말의 석불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서, 적어도 고려 초기의 수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얼굴 부분이 사라져서 그 뛰어난 모습의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위와 같은 모습으로 조각이 된 석불좌상. 이 석불도 머리가 잘려나간 것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수인은 깨어진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상태로 보아, 지권인임이 분명하다. 두 기의 석불좌상은 같은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두 기가 다 비로자나불 석불좌상으로 추정된다. 손이 깨어진 것조차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법의는 양 어깨로 흘러내려 주름이 잡혀있으며, 가슴에는 내의에 나비매듭을 엮었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여 오른발을 젖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다. 법의가 무릎까지 덮고 있는데, 주름을 넣어 아름답게 표현을 하였다. 머리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두 기의 석불좌상이 앉아있는 대좌 역시 뛰어나다.

 

수인은 지권인을 한 모습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다

 

뛰어난 고려시대의 대좌를 보다.

 

이 두기의 석불좌상을 올려놓은 대좌는 두 기가 모두 사단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정면을 보고 우측에 있는 석불좌상의 대좌는 하단에는 팔각으로 조형을 해,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동물들을 부조로 조각하였다. 이단은 팔각으로 조성을 하고 조각을 했으며, 삼단 역시 팔각으로 해 천인상을 조각하였다.

 

대좌는 모두 4단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맨 위 사단은 원형으로 조성하고 꽃과 받침을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이 아닌 중앙에서 활동하는 있는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좌측에 있는 석불좌상 역시 같은 형태로 대좌를 조성했는데, 이단에는 가지를 문양으로 넣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곳도 천인상을 새겼는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맨 위단에는 꽃을 새기고 넓은 잎을 새겨 넣은 것이 다르다.

 

 

우측 석불좌상의 대좌에 있는 천인상(위)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아래)

 

이런 형태로 닮은꼴로 조성이 된 두 기의 석불좌상이, 삼존불 좌상 가운데 양편에 있는 협시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 비록 머리가 없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남은 부분만으로도 훌륭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이 두기의 석불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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