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자기 이름으로 된 땅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나무’라고 부른다. 자그마치 2천평이나 되는 땅을 갖고 있는 나무이다. 그리고 옆에는 2세까지 키워가면서 산다.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294호 석송령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땅을 지니고 살고 있는 나무 석송령은 그 자태만으로도 부자스럽다.

 

나무의 생육상태도 좋은 편이다.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는 소리이다. 가슴 높이의 줄기둘레가 자그마치 4.2m나 된다, 수령 600년에 나무의 높이는 10m정도다. 그러나 이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생육면에서는 이 나무가 부러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나무는 자신의 앞으로 등기가 되어있는 땅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땅이 있어 안전하다

 

천연기념물이 자신의 땅이 아니라고 해서, 그 땅에서 나가달라고 할 사람은 없다. 천연기념물은 어디에 있던지 당연히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송령은 다르다. 자신의 앞으로 등기가 난 땅에 살고 있으니, 아무도 이유를 달수가 없다.

 

같은 천연기념물이지만 전주 삼천동의 곰솔은, 수령이 약 25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4m, 가슴높이의 둘레 3.92m의 크기다. 인동 장씨의 묘역을 표시하기 위해 심어졌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그러나 2001년도 독극물 주입에 의해 ⅔ 가량의 가지가 죽어 외과수술을 받았다. 잘라진 가지가 보기에도 안타깝다.

 

 

 

남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천연기념물들은 이런 피해를 입기도 한다. 그래서 석송령이 더 부러운 것이다. 자신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보존이 된다. 옆으로 뻗은 가지는 쇠기둥과 돌기둥으로 받쳐놓았다. 보기만 해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만하다. 석송령이 이렇게 자신의 땅을 갖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마을의 신목인 석송령

 

석송령은 마을의 신목(神木)이다. 마을 사람들이 지극하게 위하는 나무이기 때문에 아무도 건드리지를 않는다. 우리의 습속 중에 하나인 신목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한다. ‘신목을 건드렸다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한다.’거나 ‘마을에서 위하는 나무를 잘라다가 땔감으로 썼는데, 그 집안에 우환이 그치지를 않았다’라는 이야기는 늘 들어 본 이야기다.

 

 

 

이런 설화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석송령은 끔찍이 위함을 받는 나무다. 석송령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도 이유가 있다. 약 600여 년 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석관천을 따라 떠내려 오던 것을 지나던 과객이 건져 이곳에 심었다는 것이다.

 

그 후 1930년 경 이 마을에 사는 이수목이란 사람이 영험한 나무라고 하여 ‘석송령(石松靈)’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6,600㎡(1,996.5평)를 석송령 앞으로 등기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석송령은 ‘부자나무’로 불리고 있단다.

 

 

 

언제 찾아보던지 푸름을 잊지 않고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석송령. 소나무의 수령이 600년 정도가 한계라고 하지만, 석송령의 모습을 보면 그런 수령의 한계를 넘어설 것 같다. 곁에는 석송령의 2세가 자라나고 있으니, 부자나무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다. 볼 때마다 느끼는 위엄이 있어 기분 좋은 나무, 석송령은 그렇게 당당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이 앞을 흐르는 남한강 상류의 푸른 물, 그리고 그 안에 냇돌을 지나 만나게 되는 소나무 숲. 우리가 흔히 ‘청령포’라고 하는 곳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에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이 되었다. 숙부에게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상왕이 되었던 어린 조카 단종.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물론 기록에는 양위라고 되어있겠지만 말이다. 그 후 1446년 성삼문,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격하되어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상류로 오르다가 이포에서 배를 내린다. 그리고 육로로 여주의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고달사지를 지나 문막,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가 되었다.

오직 뱃길만이 접근이 가능한 ‘청령포’와 ‘관음송’

청령포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다. 삼면이 남한강 물줄기가 휘돌아드는 곳이며 물살이 거센 곳이다.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접근을 할 수도 없다, 그 어느 곳으로도 밖으로 출입을 할 수가 없는 곳이다. 마치 섬과 같은 이곳 청령포에는 단종의 슬픈 역사를 지켜 본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어수정'은 현재 골프장 안에 있다. 이 어수정은 단종이 유배를 가다가 목을 축였다는 곳이다


관음송(觀音松), 이 나무는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그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와는 많이 다르다. 수령이 600여년이나 되었다는 이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30m, 가슴높이 둘레가 5.2m 정도에, 가지 길이는 동·서쪽이 22m, 남·북쪽이 19.5m 정도이다.

단종은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이 고달사지를 지나 여주군 북내면으로 들어선다. 이곳에는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유배길에 오른 단종이 쉬어갔다는 바위와 '노림'이라고 부르는 숲이 있다. 일설에는 단종이 흥원창까지 갔다고도 하나, 여주지역의 많은 지명에서 여주를 거쳐 갔음을 알 수 있다 

 

지상에서 1.6m 정도 되는 곳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는, 단종이 유배시절 이 갈라진 곳에 앉아 소일을 했다는 것이다. 관음이라는 말도 단종과 연관이 있다. 즉 단종의 '슬픈 유배생활을 보았으며(=觀),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音)'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니다, 그 구슬픈 소리는 이야기가 아닌 단종의 슬픈 울음이었을 것이다.

단종 임금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무엇을 했을까? 때로는 서북의 한양을 바라보고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짓기도 했을 테고, 때로는 동쪽의 흐르는 강물을 바라다보면서 이 좁은 곳에서 나가고도 싶었을 것이다. 어린 단종임금은 아마 어디를 보나 자신의 처지가 슬퍼 울음으로 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 슬픔을 묵묵히 바라다보며 함께 한 소나무는 그 후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껍질이 검게 변했다고 한다. 그리움에 속이 타버린 단종의 마음이 전해져 나라걱정을 하는가 보다.

단종이 이 갈라진 소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고. 이 나무는 단종의 이야기 소리를 보고 들었다고 하여 관음송이라고 하지만, 이야기가 아닌 울음소리 였을 것이다.


임은 떠나고 세월만 남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관음송을 보기 위해, 청령포를 찾아 영월 땅에 들어설 때마다 비가 내렸다. 세 번이나 찾았지만 그 때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청령포를 들어가질 못했다. 아마 영월이라는 곳이 단종임금의 슬픈 사연이 많은 곳이다 보니, 갈 때마다 눈물이 되었는가 보다.

네 번째 찾았을 때 비로소 관음송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나무들보다 유난히 높게 자란 관음송. 가지는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갈라진 나무줄기 위에 잔가지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굴곡이 졌다. 마치 단종임금을 위로하기 위해, 나무가 스스로 춤을 추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이곳 고도와 같은 청령포에서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단종을 위해 관음송 스스로 춤을 추지는 않았을까?



그 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연신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은 저렇게 모든 것을 다 잊고 살아가는데. 관음송 한 그루만이 그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인지. 단종을 위로하느라 추던 춤을,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궁이다. 행궁의 문인 신풍루를 들어가면 좌우로 군영이 있고, 우측 군영을 들어가는 협문 앞에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속을 다 비워버린 수령 600년의 이 느티나무는, 행궁을 세우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높이 30m에 둘레가 6m나 되는 거목이다.

이 나무는 화성 성역 이전부터 서 있던 나무로, 수원을 지키는 신령한 나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영목(靈木)’ 또는 ‘규목(槻木)’ 혹은 ‘신목(神木)’이라고 부르며, 이 나무를 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뭇가지라도 하나 건드리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화성 행궁 안에 자리한 정자인 미로한정과 수령 600년인 지난 느티나무인 영목(아래)

사람들의 염원을 가득 달고 있는 느티나무

사람들은 항상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이미 수령이 600년 이상이 되었지만, 큰 가지는 고사에서 또 다시 가지를 쳐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1982년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화재로 인해 훼손이 되었다. 수원시에서는 2003년 5월에 대대적인 나무살리기로 수술을 감행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정월에 행궁을 들린 수많은 사람들은 이 나무에 소원지를 걸어놓는다. 누구는 가족의 건강을, 또 누구는 사업의 번창을, 그리고 어떤 이들은 합격을 빌기도 했다. 결혼을 갈망하는 사람들도 있고. 부를 축적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무에 손을 대고 간절히 빌면,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나무이다. 아마 이산 정조도 이 나무에다 손을 대고 강력한 왕권을 이루기를 빌지는 않았을까?

늙어서 쉴만한 정자, 미로한정

미로한정(未老閒亭), 행궁의 뒤편 팔달산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정자이다. 처음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작은 정자가 육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미로한정’이란 뜻은 나중에 늙어 한적하게 쉴만한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조 14년인 1790년에 단 칸으로 지은 정자이다.



미로한정은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뒤편에 나 있는 득한문을 통해서 접근을 할 수가 있다. 득한문을 나서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면, 우측에는 초병들이 지키고 있는 내포사가 있고, 그보다 약간 높은 곳 남쪽방향에 자리한다. 단 한 칸으로 된 정자는 그렇게 홀로 한가롭게 서 있다. 이 정자를 돌아보면, 정조 이산이 화성행궁에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노후를 생각한 정조의 뜻이 담긴 정자

미로한정의 뒤편으로는 팔달산으로 오를 수 있는 작은 협문이 담장에 나 있다. 그 위로 비탈이 진 길을 오르면, 바로 서장대로 오를 수가 있다. 그런 자리에 미로한정을 지은 정자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정자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정조는 노후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싶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궁에 있는 정자들은 화려하다. 그러나 이 미로한정은 앞쪽을 댓돌을 놓아 트고, 남은 부분은 모두 난간을 둘렀다. 난간도 화려하지가 않다. 마루를 깐 한 칸의 작은 정자. 그 협소한 모습에서 정조 이산의 마음을 읽어내려 힘쓴다. 아마도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이곳에 올라, 홀로 상념에라도 잠기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루어야할 강한 왕권에 대한 깊은 마음을 이곳에서 정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미로한정은 그런 정조가 자신만의 공간으로 마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훤히 트인 앞을 내다볼 수가 있고, 팔달산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 복원 된 미로한정에 사용 된 옛 주춧돌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끝내 이루지 못한 정조의 깊은 뜻 때문인지. 1월 29일 찾은 미로한정. 주변으로는 찬 바람을 맞으며, 철모르는 풀들이 벌써 땅을 밀고 올라오고 있다

태풍 무이파가 몰고 온 피해는 상상외로 컸다. 7일 오전 7시20분께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에 태풍 '무이파'가 몰고 온 강한 비바람으로 인해, 수령 600년 된 팽나무 밑동이 부러져 곁에 있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일관헌’까지 덮쳤다.

이번에 부러진 팽나무는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된 ‘제주 성읍리 느티나무 및 팽나무 군’에 속한 노거수로, 높이 20m에 가슴 높이의 둘레가 4.4m에 이른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아름드리 팽나무가 태풍에 밑동부근이 부러져 나간 것이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제161호인 제주 성읍리 느티나무 및 팽나무 군

여러 그루 중 왜 그 나무만 부러졌을까?

제주도 남동 해안 근처의 성읍리는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 마을의 일관헌 주변에는 느티나무 1그루와 팽나무 7그루가 함께 자라고 있으며, 느티나무의 나이는 수령이 이미 1,000년이나 된 것으로 추정한다. 팽나무 7그루는 높이 14.5 ∼ 23.5m 정도에, 둘레는 2.36 ∼ 5.00m 정도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1274∼1308) 때에도 이곳에 나무가 자랐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이곳에 지정된 천연기념물 제161호인 나무들은, 그 가운데 일부가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천연기념물이란 국가나 지방공공단체가 법률에 따라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식물이나 동물, 혹은 광물 등을 말한다. 학술상 가치가 높은 동물의 서식지를 포함하여 번식지, 도래지와 식물의 자생지, 광물, 지질과 그 밖의 천연물 등이다. 한 번 지정된 천연기념물은 원칙적으로는 현상 변경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한 천연기념물인 팽나무가 밑동이 부러져 버렸다는 소식이다. 가까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보고 싶은 마음이다. 가지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그 밑동 쪽이 통째로 부러져 나갔다면 태풍의 세기가 가늠은 간다. 그러데 여러 그루의 나무 중 왜 그 나무 한 그루만 부러져 나간 것일까?

천연기념물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만나게 되는 많은 천연기념물 등, 여러 가지 많은 종류가 있지만 내가 유난히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나무 종류이다. 노거수들을 만나는 먼저 고개부터 숙이게 된다. 경외심이 절로 일어서이다. 그 오랜 세월을 꿋꿋이 살아온 나무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그동안 답사 길에서 만난 많은 나무들은 알게 모르게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사람들이 일부러 해를 입히는가 하면, 태풍이나 심한 바람으로 가지가 잘려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변함없이 한 자리에 수백 년을 지키고 서 있다는 것이 늘 고마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600년 이상이나 된 나무가 부러져 나간 것이다. 그것도 가지가 부러진 것도 아니도 밑동 부분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내 몸 일부가 잘라진 듯 마음이 아프다

곁에 있는 문화재의 지붕이 망가진 것은 부수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밑동 째 부러져버린 팽나무는 살릴 수도 없다. 뿌리가 있으니 잔가지들이 다시 자랄 수도 있겠지만. 원줄기를 잃은 나무는 이미 천연기념물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이다. 자연이 망가트린 현상변경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겠지만, 강한 태풍이 온다고 했는데,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버팀목이라도 설치를 했더라면 잘 넘어갈 수도 있지는 않았을까?

부러진 천연기념물인 팽나무로 인해 하루 종일 우울하다. 글을 쓸 마음도 일지 않는다. 어제 저녁서부터 마음만 불안한 것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루 종일 쏟아지는 비가 흡사 내 마음을 아는 듯하다. 잘려나간 밑동 사진을 보면서 내 몸의 일부가 잘려나간 듯한 기분이다.

거창군 위천면 당산리 331번지, 당산마을 내에 소재하고 있는 고목인 소나무 한 그루. 현재 천연기념물 제41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소나무가 있는 곳을 당산마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 나무가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거창 당산리의 당송은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18m, 밑동의 둘레는 4.1m 정도이다.

6월 24일 거창군 답사를 하면서 찾아간 당산마을 당송. 마을 밖 길에서도 커다란 소나무가 의젓한 모습으로 보인다. 이 나무의 껍질은 거북등과 같이 갈라져 있으며, 밑동 부분에는 도끼자국이 남아있다. 남쪽의 가지 하나가 죽었으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소나무이다.


도끼자국 누구 짓일까?

도대체 이 거목인 소나무에 누가 도끼질을 한 것일까?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나게 되는 천연기념물 중에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둘이 간혹 눈에 띤다. 누군가 나무를 죽이려고 농약을 나무뿌리에 들이부은 경우도 있고, 멀쩡하던 나무가 급작스럽게 고사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다.

거창 당송도 누군가 밑동을 도끼질을 했다고 하는데, 이 나무를 땔감으로 여겨 찍을 것은 아닐 터.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 도끼질을 한 것일까? 마을 주민들에게 물었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당산리의 당송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웅~ 웅~’ 소리를 내어 울면서 미리 알려준다고 한다.




나무가 신령스럽다 하여 ‘영송(靈松)’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런 이유로 화를 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1910년 국치를 당했을 때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몇 달 전부터 밤이 되면 나무가 울었다고 한다. 슬픈 일에만 운 것은 아닌가 보다. 1945년 광복이 될 때에도 울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나무에게는 알지 못할 신비가 있다

나무도 생명을 갖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생명의 신비함이 나무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 등을 만나보면, 그 나무들이 갖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다. 특히 당산제나 목신제, 거리제 등을 지내고 있는 나무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나무가 운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잘랐던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다. 심지어는 떨어진 나뭇가지도 줍지 않는다는 곳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꼭 화를 당해서가 아니라, 나무에 대한 예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이런 큰 나무에게는 또 다른 ‘정령(精靈)’이 있는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무지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당산나무들은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보살피게 된다. 당산리 당송 역시 마을 주민들이 모임을 만들어 나무를 보호하고 있을 정도이다. 아마도 매년 정월 보름에 제를 지내고 있는 것도, 이 나무의 영험함 때문일 것이다.

푸른 옷을 입은 당송, 볼수록 장관이다

나무를 둘러본다. 조금은 옆으로 휜 듯한 가지에 보호대를 설치하여 받쳐 놓았다. 일반적으로 본 천연기념물인 소나무들보다는 그렇게 생육이 발달하지는 않은 듯하다. 아마도 한 가지가 부러져 나가고, 밑동을 도끼자국 등이 그렇게 힘이 들게 했는가보다. 무지한 인간들의 심사가 이 나무에도 해를 입힌 것인지.




그래도 나무의 껍질에 가득한 푸른 이끼가, 이 나무의 모습을 한층 신비롭게 만든다. 푸른 옷을 한 벌 걸친 듯하다. 마치 가지마다 춤을 추는 듯하다. 그런 것 하나를 갖고도 장관이라고 표현을 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 없이 만나는 생명들. 그 생명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당송 아래서도 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인간을 위해 서 있었지만, 정작 인간들은 그런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지 못하는 인간들은 화를 입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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