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 주논개가 심었다고도 하고, 남편인 최경희가 심었다고도 전하는 소나무. 수령은 약 500년 정도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397호인 징수 의암송(義岩松)’은 전북 장수군청 청사 입구 앞에 자리하고 있다. 42일 장수군을 답사하면서 가장 먼저 달려가 보고 싶은 곳은, 바로 의암송이 자리하고 있다는 장수군청이었다.

 

장수군청 청사 현관 앞에 서 있는 의암송. 15936, 임진왜란 때 남편인 최경희를 따라 진주로 간 논개. 왜군과의 전투에서 최경희와 7만 민관군이 모두 전사를 하자, 기녀로 신분을 속이고 왜장들의 승전연에 참석을 한다. 그곳에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져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장수의 상징인 의암송

 

이 때 논개가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남강으로 몸을 던진 곳을 의암(義岩)’이라 부르는데, 그 이름을 따서 의암송이라고 부른다. 이 의암송은 1,500년 후반쯤에 장수현감이던 최경희가 심었다고도 하고, 논개가 심었다고도 한다. 누가 심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무에 얽힌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이 나무를 장수군민들은 장수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나무에는 논개의 의로운 정기가 깃들어 있다고 하며, 논개의 절개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기에 장수군민들은 이 나무를 신성시한다. 현재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옛날 장수현의 관아였다.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의암송을 논개가 심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주논개를 기리는 뜻에서 의암송이라고 부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무엇이라 할 수가 없다.

 

용트림을 하는 의암송

 

장수군청으로 마음 급하게 찾아갔다. 현관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천연기념물인 의암송. 아래서 한 줄기가 올라오면서 지상으로부터 2m 정도에서 두 갈래가 갈라진다. 줄기는 시계방향으로 뒤틀어져 나선형을 이루고 있다.

 

 

나무의 전체 높이는 그리 높지가 않다. 9m 정도의 높이에 가슴 높이의 둘레는 3.2m 정도이다. 두개의 큰 가지가 남북 방향으로 발달되어 있는데, 북쪽가지의 직경은 80이고 남쪽가지의 직경은 50정도이다. 그 위로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마치 우산형과 같은 수관을 이루고 있다.

 

장수군의 사람들은 이 나무를 굳이 주논개가 1592년에 심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이 나무로 논개의 의로움을 상징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 마음이 있기에 이 의암송이 더욱 당당해 보인다.

 

 

의암송은 마치 승천하려는 용과 같은 형태이다. 연륜이 지나 껍질은 갈라지고, 한편에는 사람 머리만한 옹이도 보인다. 줄기는 뒤틀어진 모습이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자라났을까? 자연의 오묘함에 감탄을 한다. 연신 속으로 멋지다라는 말만 해댄다. 정말로 그 안에 알지 못하는 기운이 가득한 것만 같다.

 

한 가지는 청사 쪽으로 바라고, 또 한 가지는 중간에서 방향을 바꾸어 구부러졌다. 곡예를 하듯 자라고 있는 장수 의암송. 아마도 저 두 가지에 주논개와 남편 최경희의 마음을 담아 낸 것은 아니었을까? 의암송 곁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소나무의 줄기가 흰색이라고 해서 이름을 붙인 백송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한 나무가 아니다. 백송이라는 명칭은 소나무의 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는데, 그 벗겨진 껍질이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부른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백송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시 종로구 재동에 있는 백송이 수령이 600여 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송은 잔뿌리가 적어 옮겨심기가 힘들다. 씨앗도 번식력이 약하고, 어린 나무는 잘 자라지 않아 그만큼 키우기가 힘든 희귀종이다.

 

 

지정 해제된 백송들

 

흔치 않은 나무인 백송이 그나마 살아있는 곳도 많지가 않다. 예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던 나무들이 고사를 했거나, 지정 해제를 당했기 때문이다.

 

1990년 7월. 태풍으로 안해 쓰러진 통의동 백송.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었다(인터넷 검색)

 

천연기념물 제4호였던 서울 통의동 백송은 서울 통의동의 백송은 1993년 3월 24일 바람에 쓰러져서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1990년 7월 17일 폭우를 동반한 돌풍에 쓰러져 줄기가 부러져 천연기념물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 7월 19일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하려 했지만, 청와대에 가까이 있는 나무가 죽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나무를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서울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무를 쓰러진 상태로 보호하여 살리기로 하였으나, 1991년 봄 새싹이 나는 등 살아날 조짐을 보였지만, 목재를 탐내는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상태가 악화되었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그해 5월 13일에 나무가 잘려 나갔다.

 

 

이 외에도 천연기념물 제5호였던 서울 내자동의 백송은 1965년 10월 15일 고사로 인해 지정 해제가 되었으며, 2003년 7월 4일 지정 해제가 된 원효로의 백송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용산문화원 뒤뜰에 있었던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6호였다.

 

이 외에도 고사나 보존가치를 상실해 지정 해제가 된 천연기념물 재7호였던 서울 회현동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6호였던 경남밀양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04호였던 충북 보은의 백송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81호였던 개성리의 백송은 미수복 지역에 있어 해제되었으며, 현재는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390호이기도 하다.

 

 

조계사 대웅전 앞 백송

 

현재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자리하고 있는 조계사 대웅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수송동 백송이 자리하고 있다.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하는 이 백송은 높이가 14m 정도이며,밑동부분의 둘레는 1.85m 정도이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있다. 원줄기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한편으로 길게 위로 올라가면서 나 있다.

 

백송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수송동의 백송은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거기다가 나무 옆에는 차들이 주차를 하고 있어, 매연으로 인한 생육에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5그루 밖에는 안된다는 백송. 수송동의 백송은 생육의 환경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기에 얼마나 더 오래 살아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금 부터라도 백송 근처에 차량을 대어 놓는다거나 하는 것은 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연기념물이란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무한한 생물학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772-1번지에는 옛 가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폐교가 된 이 초등학교 교정 안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경남 기념물 제197호로 1997년 12월 31일자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35m 정도에 밑동의 둘레가 8m에 가까운 이 느티나무는, 1480년경에 훈도인 전경륜심었다고 한다. 전경륜이 이 마을에 집터를 잡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이 배(=船)와 같다고 하여, 서편 냇가 남북 400m까지 느티나무 숲으로 조성하여 마음의 풍림 겸 배의 돛대로 삼았다고 전한다.



일제 말에 베어버린 숲

2,000평이나 되는 울창한 느티나무 숲. 아마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런 넓은 장소에 서 있던 느티나무들을 일제 말에 모두 베어버리고, 현재 남아있는 한 그루만이 서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정천, 혹은 ’샘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사후에 대사헌으로 추증이 된 전팔고 선생의 호를 따 ‘원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1592년에는 의병들이 이 숲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이유로 일제에 의해 모든 나무를 베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00여 평이나 되는 느티나무는 선비들의 풍류장소로 이용이 되다가, 임진왜란 때 수난을 당했으며, 그 뒤 한일합병의 슬픔까지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나무에 모여,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홀로 남은 느티나무 한 그루

지난 6월 24일 거창군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가조면 원천리. 옛 가산초등학교 교정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있고, 주변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 폐교가 된지 시간이 흘렀는지, 담장에는 넝쿨이 타올라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이리저리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는데, 철문 옆에 조그마한 공간이 보인다.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바로 학교 교정 안이다. 느티나무는 옛 학교 건물과 마주한 곳에 서 있다. 낮은 철책으로 보호막을 둘러놓은 느티나무. 나무의 밑동에는 혹처럼 달라붙은 것이 흡사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생명의 원천, 느티나무

오래된 고목에는 정령이 산다고 하더니, 저 혹에 생명이라도 깃든 것일까?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랐을 느티나무가, 소리가 사라진 지금은 왠지 측은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무 가까이로 가서 나무를 쓰다듬어 본다. 거친 감촉사이로 온기가 느껴진다. 생육이 좋은 이 원천 느티나무는 홀로 이렇게 폐교가 된 교정에 서 있다.

밑동 근처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달라붙어 있는데, 위를 보니 중간이 잘려있다. 아마 원줄기의 한편이 잘려나간 듯하다. 이것도 일본에 의한 아픔은 아니었을까?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는 일제의 만행, 그리고 뒤이어 맹목적인 종교적인 훼손. 거기다가 도적 떼들까지. 도대체 이 나라의 문화재가 정말 마음 편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무를 들러보고 있는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나무의 벌어진 틈 사이에서 기어 나온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렇게 모든 생명을 감싸고 있건만, 이제 인적 끊긴 폐교의 안마당에 서 있는 이 느티나무가 온전할 것인지. 교정을 떠나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불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무 밑동에 검은 자국을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는 수령 500년이 지난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마을을 흐르는 개울을 내려다보는 이 소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소나무는 처진 소나무로 높이는 16m이며, 둘레는 2.95m에 가지의 폭은 21m 정도이다.

이 소나무는 마치 등 굽은 사람처럼 서 있는데, 목 부분이 굽어져 가지가 마을 쪽으로 뻗쳐 처져있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풍천 노씨들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을 때 심었다고 전한다. 조국의 광복 이후에도 마을 주민들은 이 소나무 아래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비는 지신밟기를 했다고 한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는 수령 500년의 처진소나무

죽은 아들이 아이를 점지해준 종암우물

소나무 아래에는 마치 계란같이 생긴 바위와 우물이 있다. 이 바위를 종암이라고 부르며, 아래에 있는 우물을 종암우물이라고 한다. 이 우물에는 전설이 전한다. 고려 말엽 소나무가 서있는 개평마을에는 200호 정도가 모여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 금씨 성을 가진 가난한 선비가 살았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다가 40이 넘어서야 아들을 낳았다.



목 부분이 굽어진 처진 소나무는 노씨들이 지곡마을에 자리를 잡으면서 심었다고 전한다

살림살이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두 부부는 귀한 아들이라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런데 아이가 8살이 되던 해에, 앞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50이 다 된 부인은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병이 들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꿈에 나타나 하는 말이 ‘어머니 나 종암우물에 있어. 왜 데리러 안와’라고 했다. 부인은 집 가까이에 또 다른 우물이 있어, 종암우물까지는 물을 길러 가지 않았으나, 아들이 보고 싶은 생각으로 혹시나 해서 종암우물로 가서 우물주위를 돌았다. 몸이 약해진 부인은 우물을 돌다가 쓰러졌으나, 종암우물의 물을 먹고 기운을 차려 다시 우물을 돌고는 했다.


아들을 점지한다는 전설을 간직한 종암과 우물

먼 곳이지만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부인은 날마다 종암우물을 떠다 먹으며 그 주위를 돌았다. 그런데 도저히 완쾌할 것 같지 않았던 병약한 부인이, 3개월 후에는 완쾌가 되었으며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임신이 된 선비의 부인은 49세라는 늦은 나이에 다시 아들을 낳았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오직 아들을 보기를 바란 부인의 정성이 하늘을 닿아 아들을 본 것이다.

이 소문은 인근마을로 퍼져 나갔다. 그 뒤로부터 마을에는 낯선 여인들이 찾아와 종암을 안고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아들을 낳을 것을 간절히 빌며 종암 주위를 돌면서, 우물 물을 마시고는 했다는 것이다.

지곡마을은 한옥이 즐비한 전통마을이다.

지곡마을은 한옥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 마을은 일두 정여창의 고택을 비롯한 많은 고택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수령 500년이 된 처진 소나무와 종암. 아마 이 외에도 이 마을을 돌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것만 같다. 등굽은 소나무는 마을을 향해 옛날 옛적 전설이라도 들려주려는 것인지. 마을을 향한 가지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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