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고찰 송광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송광사동종 (松廣寺銅鐘)’이 자리한다.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한다. 범종의 ‘범(梵)’이란 범어에서 ‘브라만(brahman)’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청정’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 하는 범종은 은은하게 울려 우리의 마음속에 잇는 모든 번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범종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울려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부처님에게로 이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

 

 

중생의 번뇌를 가시게 하는 범종

 

절에서 종을 칠 때는 그저 치는 것이 아니다. 새벽예불 때는 28번, 저녁예불 때는 33번을 친다.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욕계(慾界)’의 6천과 ‘색계(色界)’의 18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을 합한 것이다. 즉 온 세상에 범종 소리가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저녁에 33번을 울리는 것은 도솔천 내의 모든 곳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지옥까지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이나 범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종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 종소리를 듣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지옥에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안성 청룡사의 종에는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범종의 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

 

 

크지 않은 송광사 동종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조성된 보물인 종루가 있다. 그 종루 한편에 자리를 하고 있는 송광사 동종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크지 않은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다.

 

동종의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殿牌)가 있다.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조선조 숙종 때 만들어진 동종

 

현재 송광사의 동종은 사용을 하지는 않는다. 종루에 그대로 보관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동종에 쓰여 있는 글을 통해서 이 범종은 숙종 42년인 1716년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영조 45년인 1769년에 이 범종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전국에 있는 범종을 보면 참으로 놀랄만하다. 어떻게 종의 겉부분에 이렇게 아름답게 조형을 한 것이라? 종의 거는 부분인 용뉴는 대개 용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많은 글자와 보살상, 비천인, 유두, 넝쿨무늬 등을 어떻게 조각을 한 것일까? 한꺼번에 조형을 해야 하는 범종이다. 그 범종에 이런 다양한 것들을 새겼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장비를 갖고 조형을 한 것이 아니다. 거푸집을 만들어 그 안에 쇳물을 부어넣어 만들어 낸 범종이다. 물론 나름 정리를 했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형태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어 낸 것일까?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범종, 그 종소리가 듣고 싶다. 오늘은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예불시간에 맞춰 찾아가 종소리라도 듣고 싶은 날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소재한 송광사. 김제 금산사의 말사이면서도 사세는 어느 고찰 못지않다. 송광사는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돋보이는 것은 당연히 조선시대에 축조된 보물 제1244호 종루이다. 송광사 종루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종루이다. 중앙에 종을 매달고 동서남북 사방을 돌출시켜 열 십(十)자 모양으로 지어진 이층 누각을 말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고찰 송광사

 

완주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때의 승려 도의는 가지산파의 개조로 추앙을 받은 승려이다. 가지산파란 구산선문의 하나로, 헌덕왕 때 보조선사 체징이 도의를 종조로 삼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일으킨 선풍을 말한다.

 

 

송광사는 그 뒤에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중건을 하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등이 중건을 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으며, 현재도 많은 불사를 하고 있는 절이다.

 

화려한 이층 누각으로 마련한 종루

 

송광사의 종루는 조선조 세조 때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것을 철종 8년인 18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조선조에 세워진 수많은 건조물 중 유일한 이층 십자형 종각으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건조물이다. 이 종각은 중앙에 종을 매달고 돌출된 부분에는 각각 북과 목어, 운판을 걸어놓았다.

 

 

 

이 네 가지의 기물은 불당 앞에 위치하고 있어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고 하고 있으며, 아침과 저녁 예불을 올리기 전에 울린다. 북은 땅 위에 사는 네발을 가진 짐승을 위해서, 목어는 물속에 사는 생명체를 위해서, 운판은 창공을 나는 모든 날짐승을 이해서, 그리고 종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한 것이다.

 

송광사 종루는 화려하면서도 소박하다. 자연석인 정평주초 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다. 그 중에는 자연적인 목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있어, 소박함이 느껴진다. 누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송광사 종루의 공포는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방 팔작집으로 마련한 종루는 지붕 중심 용마루의 장식 또한 색다르다. 이러한 종각은 우리나라에 유일한 것이기에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볼수록 빠져드는 송광사 종루

 

요즈음은 참 일기가 가늠하기가 힘들다. 맑았다가도 비가오기도 하고, 여름 같은 날씨이기도 하다가 갑자기 가을이 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완주군 소양면 방향으로 일을 보러나갔다가 송광사를 들렸다. 사월 초파일 준비로 한창인 경내에는 수많은 등에 여기저기 걸려 그 화려함을 자랑한다. 대웅전 앞에 자리한 이층 종루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전국의 고찰을 다니면서 수많은 종각을 보았지만, 송광사 중층 종각과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용마루 중앙에 올린 장식도 아름답지만, 귀공포의 화려함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누마루 밑의 자연스런 기둥들. 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한 기둥의 형상들이, 마치 각양각색의 인간들을 보는 듯하다. 그 많은 중생들이 서로가 불전사물을 받치고 예라도 올리는 듯한 모습이다. 송광사 종루를 볼 때마다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양을 하고 서 있지만, 볼 때마다 빠져드는 송광사 종루. 오늘도 온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 사물에서는 저절로 소리가 울릴 것만 같다.


장고춤(杖鼓舞)은 타악기의 하나인 장고를 비스듬히 어깨에다 둘러메고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며 추는 춤이다. 원래는 풍물놀이 등 개인놀이로서, 혼자 또는 두 사람(때에 따라 많을 수도 있음)이 추는 것인데, 요즈음에는 새로운 형태로 안무하여, 농악이 아닌 완전한 무용으로 발전, 독특하고 장쾌한 멋을 풍기고 있다.(위키백과사전)

위의 장고춤에 대한 설명은 인터넷에서 ‘장고춤’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설명이다. 지금 우리는 장고춤을 ‘풍물에서 파생한 춤’, 혹은 ‘신무용’ 등으로 정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장고춤의 역사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무용화한 장고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미술과 고분 벽화 등에서 나타나는 장고춤에 대한 모습으로 장고춤에 대한 변화를 추론해 본다.

전북 완주군 송광사 대웅전 벽에 그려진 비천장고무. 조선조에 그려진 것이다.

불교미술에 나타난 장고춤의 변화

불교미술에서 장고를 이용한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지가 않다. 석탑이나 부도탑 등의 비천인이 연주를 하는 모습에서,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을 쉽게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비천인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이다. 연기조사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화엄사.

그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비천인상 중에,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이 있다. 아마 이 때는 장고가 춤이 아닌 단순한 악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뒤에 나타난 보물 제85호인 강릉 굴산사지 승탑에도, 연화대 위에 앉아 장고를 치는 비천인의 모습이 보인다.


국보인 구례 화엄사에 소재한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장고비천인

이 굴산사지 승탑은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중간받침돌에는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비천인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조각되어 있는 상은 8구 모두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는 장고를 비롯해 훈, 동발, 비파, 소, 생황, 공후, 적 등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소재한 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삼층석탑에도 장고를 치고 있는 비천인상이 있다. 이 승안사지 삼층석탑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한 탑이다. 위층 기단에 새겨진 이 비천인상을 보면 앞서 열거한 비천인상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장고를 치는 비천인이 앉은 형태였는데 비해,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장고를 치는 비천인은 무릎을 꿇고 있다. 이때는 단순히 연주가 아닌, 일종의 변형된형태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굴산사지 승탑의 장고비천상과 승안사지 석탑의 장고비천인상


고려 고분 벽화에서 장고춤의 형태가 보여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있는 사적 제239호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고분이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에는, 동서로 석실 두 개가 구분되어 있다. 이 고분 안에 동실의 벽면에는 천녀들이 구름위에서 연주하며 춤을 추는 ‘주악무도천녀도’가 그려져 있다. 당시의 현실적인 종교적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천녀도 중에는 장고춤을 추는 그림이 있다.


이 둔마리 고분의 주악인물상의 악기 등은 고려시대에 사용하던 악기들이며, 주악도상은 고대주악비천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후대에 후불 및 무속화의 인물표현 등과 악기의 소재 등이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벽 남단에 그려진 주악무도천녀도의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장고춤을 추고 있다.

이 장고춤을 추는 인물을 설명하고 있는 형태를 보면, 지금의 장고춤을 추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인물은 빗어 올린 얹은머리에 둥근 테 모양의 관을 쓰고, 그 옆에 깃 같은 장식꼬리가 뻗어 날리고 있다. 상의는 둥근 깃에 소매 끝을 팔목에서 잘록하게 묶었다. 바지는 전반적으로는 헐렁하지만 발목도 묶었다.」


둔마리 고분의 벽화에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주악도가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인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종성된 고분이다.

아마도 격한 장고춤을 추기에 편하도
록 하였을 것이다. 「허리에는 띠가 감겨있는데 그 한쪽 끝이 왼쪽 다리위로 드리워져 있다. 상반신은 가느다란 끈으로 장고를 목에 감아 앞으로 늘어뜨리고, 왼팔은 높이 올리고 오른팔은 장고를 치면서 구름 위에서 춤을 추는 형태를 하고 있다. 신발은 형태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끝이 뾰죽하다」

벽화에 나타난 장고춤

이렇게 석탑이나 부도탑, 혹은 고분의 벽화 등에서 보이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인상을 보면, 이미 장고춤은 고려시대에 완전한 춤의 형태로 전승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장고춤을 실질적으로 묘사한 사찰의 벽화가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에 그려져 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송광사의 대웅전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인 1857년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 상단 벽에 보면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비천인상에는 무당춤을 비롯해, 장고춤, 북춤, 승무, 바라춤 등의 그림이 보인다. 이 모든 춤들은 당시에 추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단순히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세속화된 풍물을 그린다는 점으로 볼 때, 고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난 장고춤은 조선조에 들어서 상당히 격화되고 빠른 동작을 필요로 하는 경쾌한 춤으로 변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작은 소장고를 이용해 춤을 추면서 군관모자와 같은 관을 썼다. 화려한 장식에 힘이 있는 모습의 장고춤을 역동적으로 추고 있다.

이런 불교미술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장고비천인상에서 볼 때 장고춤은 농악놀이에서 파생한 춤이 아닌, 정형화된 장고를 이용해 추는 독자적으로 발생한 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신무용이 아닌 고려 때부터 전해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전통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절 입구를 들어서면서 무시무시한 사천왕을 만나게 된다. 대개는 ‘사천문(四天門)’이나 ‘사천왕문(四天王門)’ 등의 현판을 달고 있는 곳에 있는, 사천왕상이다. 이 ‘사천왕’ 혹은 ‘사대천왕’이라고 부르는 사천왕은, 그 외에도 ‘사왕’ 혹은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부른다. 세상을 보호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천왕은 사방을 뜻하는 것으로, 동방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자리한다. 또한 남방에 ‘증장천왕(增長天王)’이 있으며, 북방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을 각각 배치한다. 사천왕은 두 분씩 모시기 때문에 한편에는 동방과 북방, 그리고 남방과 서방을 한편에 모신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모셔져 있다.

송광사는 사천왕문이 아니고 사천왕전이다. 문을 달아 전이라는 표현을 한다.

해질녘에 달려간 송광사

2월 23일, 5시가 넘어서 길을 나서 달려간 송광사. 바쁘게 움직였지만 사천왕을 모신 전각의 문을 닫아걸려고 한다. ‘잠깐만요’를 외치면서 쫒아갔다. 헐떡거리면서 ‘사진 몇 장만 찍고요’ 라고 소리를 치면서 급하게 사진을 찍어댄다. 고맙게도 일부러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 분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왔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 길을 묻고는 제대로 차에서 내려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갈 길을 재촉하다가 보면 예의를 제대로 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것이 늘 마음이 아프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소재한 송광사의 사찬왕상은 소조사천왕상이다. 소조란 흙으로 상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보기에도 커다란 이 소조사천왕상은 보물 제125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사천왕상은 크기 면에서도 압도를 하고 있지만, 색을 입힌 모습이나 그 조성이 뛰어나다. 몇 번인가 들린 송광사인데도, 오늘 따라 사천왕상이 달라 보인다. 그동안 자세히 살피지 않았음을, 속으로 반성을 해본다.



사천왕전에 대웅전을 보고 들어서면 우측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자리한다. 지국천왕은 칼을,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었다. 다문천왕의 팔을 복구 중이다

문을 달아 낸 전각 사천왕전

완주 송광사는 사천왕을 모신 곳을 천왕문으로 하지 않고, ‘천왕전(天王殿)’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천왕문이 여닫는 문이 없는데 비해, 송광사는 여닫는 문이 있어 ‘문’이 아닌 ‘전’으로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그 조성연대가 적혀있다는 것이 가치를 더욱 높인 것으로 보인다.

서방을 지킨다는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인 1649년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적혀있다. 또한 왼손에 얹어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인 1786년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조성연대가 확실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은, 어느 것보다도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는 갖는다.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모셔져 있다. 증장천왕은 용과 보주를 잡고 있고, 고아목천왕은 보탑을 손에 들고 있다

사천왕은 악귀를 쫒는 힘을 갖고 있다.

사천왕상을 보러 달려갔는데 대웅전을 향한 우측 안 편에 있는 천왕상을 흰 천으로 가려놓았다. 북방 다문천왕의 팔이 훼손이 되어,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자연적인 훼손이 될지를 모른다. 그나마 사람들이 애써 보존을 하지 않는다면, 한 해에도 수많은 문화재가 우리 곁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한쪽 팔을 가린 북방의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조성한 동방의 지국천왕은, 팔을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띠를 왼쪽 옆구리에 걸쳐 두르고 있다. 남방의 증장천왕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다. 용은 팔뚝을 한번 감아 올라가고 있다.

서방의 광목천왕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왼팔을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놓았다. 이 보탑은 1786년에 새롭게 조성을 해서 올려놓은 것이다. 사천왕상의 다리 쪽에는 악귀들이 있다. 이 악귀들의 형태도 각각 다르다. 이런 악귀의 모습으로 보아, 사천왕은 불법과 불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의 발밑에는 악귀들이 있다.

지은 죄가 커서 그런가?

사람들은 절에 가면 사천왕상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 흔히들 농담 삼아 ‘지은 죄가 커서 그런가봐. 그 앞에만 가면 괜히 기분이 이상한 것이’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정작 사천왕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스스럼없이 사천문을 드나들지만, 처음에는 옆으로 돌아다녔다. 아마 당시 나처럼 답사를 하는 사람이 있어 설명이라도 해주었다면, 좀 더 편하게 드나들었을 것을.

겨우 문을 닫는 것을 막아선 채로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섰다. 다음에 복원이 다 끝난 다음에는 초라도 한 자루 켜야겠다는 생각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의외의 모습에 가끔은 놀랄 때가 생긴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국보나 보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자리한 송광사. 송광사에는 모두 네 점의 보물이 있다. 한 절에 이렇게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인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지금은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사찰 중 한 곳으로 번성하였다.


십자각으로 지어진 특별한 종루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누각이 있다. 흔히 종루라고 이야기하는 이 누각은 열십자로 축조를 하였다. 이층형 누각으로 지어진 이 전각은 범종이 걸려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한 칸씩을 덧붙였다. 지붕 역시 중앙에서 한 곳으로 모여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2월 23일, 퇴근을 하고 부리나케 송광사로 달려갔다. 수차례나 찾아간 송광사지만, 늘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송광사로 달려간 것은 종각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송광사에 있는 소조사천왕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보물로 지정된 소조사천왕상은 일반적인 전각과 달리 문을 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왜 십자각이 눈에 걸리는 것인지. 일몰시간이 다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바쁜데도, 종각에서 발길이 멈추고 말았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 북, 운판을 각각 돌출된 곳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대웅전 방향으로 돌출된 남은 한 칸에는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동종을 두었다.

누마루 밑의 기둥이 자연일세.

송광사 종각에서 보이는 여유로움은 바로 이층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목조 기둥으로 마련을 한 이 기둥은 중앙 칸을 중심으로 각 면에 두 개씩의 기둥을 두고, 열십자로 빠져나온 곳마다 다시 2개씩의 기둥을 놓았다. 어느 방향에서 보던지 한 방향에는 4개씩의 기둥이 나열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기둥을 보다가 손바닥을 쳤다. 그렇게 몇 번을 보았는데도 새로운 것을 보았다. 그동안 아마도 별 신경을 쓰지 못한 듯하다. 그저 종각이 아름답다는 것만 알았지, 그 종각의 면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만 했다. 이제 보니 그 기둥들이 각양각색이다.

어느 기둥은 원형으로, 또 어떤 것은 사각형으로 되었다. 밑에 바친 주추도 모두 제각각인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을 하였다. 누각을 조성할 당시 이만한 절에서 보기 좋게 조형을 한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기둥도 자연에다 받친 주추도 자연이다. 송광사 종루는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현란한 조각이 돋보이는 종각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 중에 유일한 십자각이라는 송광사 종루. 처마 밑으로는 익공과 포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종각 위로 올라가보니,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주심포, 주간포, 귀포 등 일일이 명칭을 열거하기조차 힘든 모습으로 눈을 현란케 만든다. 아마도 이렇게 복잡한 건축기술로 인해 송광사 종루가 유명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사천왕상을 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다시 일깨운 종각의 모습에 넋을 놓아버린 문화재 답사. 그래서 문화재 답사는 시간을 정할 수가 없다.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다가 보면, 시간이 가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눈을 떠갈 때마다, 조금 일찍 시작하지 못했음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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