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스님의 소신공양으로 4대강 개발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는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 집단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여주장날 만나뵌 어르신들은 예전에는 남한강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하신다. 당시에는 물장수도 있었다고 하는데. 

 

"30년 전에도 저 강물을 마시고 살았어"

 

여주군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남한강. 여주 사람들에게 그 강은 그냥 흐르는 강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의 터전이었고, 그곳을 통해 사람들은 삶을 영위해 왔다. 어려서부터 여주 사람들은 남한강 가에서 꿈을 키워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한강가의 은모래 금모래 백사장에는 여름철이 되면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지금이야 수영이 중지되어 있어 물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여름철이 되면 모래밭 가에 있는 숲에서 더위를 피하고는 했던 곳이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꿈이 영글어 있는 남한강이 송두리째 파헤쳐지고 있는데도, 거기에 대한 피눈물 나는 호소를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여기저기 4대강 개발을 찬성한다는 현수막들이 군 전체 광고물 게시대에 자랑스럽게 붙어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떻게 자신들의 생명의 강을 이리 훼손이 되고 있는데도, 누구 한 사람 나서서 반대다운 반대를 하질 않고 있는 것인지.

 

장날이 되면 많은 어르신들이 장으로 모여든다. 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곳이다. 서로 정담을 나눌 수가 있고, 지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여주장에 물장수들이 많았다는데요."

"그럼 많았지. 그 사람들 얼마를 받았는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저 국밥 한 그릇에도 물을 날라다 주었어."

"물은 어디서 구해오나요. 근처에 샘이라도 있었나요?"

"샘은 무슨 샘. 여주사람들은 30~40년 전만 해도 강물을 떠서 식수로 사용했을 정도야. 그 때는 참 물이 맑았거든. 지금도 아마 우리나라 강중에는 가장 깨끗할 거야."

장터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여주강이 이렇게 변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속 터져 죽을 것이라고 한다.

 

▲ 낚시 남한강에서 고기를 낚는 모습. 지난해만 해도 남한강에서는 이렇게 고기를 낚아 살아가는 분들이 있었다. 이제는 치어는 물론 알까지도 씨가 마르고 있다고.

 

"그 왜 이포인가 사는 김씨 어르신도 얼마 전까지도 이포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팔고는 했어. 지금은 속병이라도 나셨을 것이여. 고기들이 떼죽음을 했다고 하니"

 

누구나 다 그런 추억 하나쯤은 갖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남한강 가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송두리째 파헤쳐진 남한강의 모습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 몇몇이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

 

물 한 지게에 국밥 한 그릇

 

"당시 물장수하시든 분들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 물장수를 하고는 했지. 꼭 그 사람들만 한 것은 아냐. 여기 사람들도 장사할 밑천도 없고, 생활이 어려우면 물장수를 했으니까."

"물장수로 밥을 먹을 수 있었나요?"

"그 당시는 인심이 후했으니까. 물 한 지게를 지고 오면 국밥 한 그릇을 가득 말아주었지. 인심이 지금과는 다르니까." 

"물장수는 언제 없어졌나요?"

"한 20년이나 되었을까? 읍내에 수도가 들어오고 나서 부터인가 그래."

 

그렇게 맑던 남한강물이다. 지금의 팔당댐이 막히기 전만해도 여주대교에서 신륵사로 들어가는 입구 식당에서는 장어구이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장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남한강에 장어들이 많았었잖아요?"

"많았지. 팔당댐을 막기 시작하면서 장어들이 점차 줄어들었어. 1973년도인가 팔당댐을 완성한 후로는 거의 장어를 볼 수 없었으니까."

"하긴 그래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한테 수돗물 공급한다며 만든 팔당댐인데, 이제는 오염이 심각하다는데. 듣기로는 취수원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도 하네. 하기야 물을 가두어 놓았으니 당연히 안 좋아지지."   

 

▲ 청정지역 물이 깨끗하고 생태계가 살아있는 남한강은 달리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헤칠 필요가 없는 강이다.

 

실패의 전철을 다시 밟는 일이 없어야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가보니 예전 일이 생각이 난다. 여주에 와서 몇 달을 보낸 적이 있었다. 아마 한 20년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만해도 신륵사 앞 식당들은 장어를 요리하는 집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팔당댐을 막고 난 뒤에는 장어가 점차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번에 4대강 개발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자취를 감출 것인지. 지금부터 수도 없이 생명들이 죽어 가는데, 거기다가 하천 바닥에 있는 모래를 채취하느라 바닥을 긁어내, 치어는 물론 민물고기의 알까지 송두리 채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과 같이 자연을 함께 누리며 살아가야할 수많은 생명체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 은모래금모래 개발이라는 허울을 쓰고 파헤쳐지고 있는 남한강의 명소. 금모래은모래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은 바로 그러한 생명체에 대한 무분별한 살생을 중지하라는 메시지다. 식수원을 마련한다고 막은 콘크리트 잠언제인 팔당댐. 그도 이제는 심각한 오염이 되고 있지 않은가? 보를 막는다고 또다른 콘크리트 시설물을 여기저기 막아댄다면, 그 또한 맑은 물의 오염원일 수밖에 없다. 이제 지난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일 테니까(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6, 7)


문수스님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소식을 접한 것은 5월 31일 오후 4시께였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밤 10시 쯤 전주를 출발해 군위 삼성병원에 도착한 것은 6월 1일 새벽 한 시께. 스님 몇 분과 신도 몇 사람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스님을 처음 뵌 것은 아마 한 15년 전인가 보다. 항상 말씀이 없으시고 과묵하신 스님은, 언제나 뵐 때마다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는 하셨다. 그렇게 강직하던 분이셨는데, 이렇게 빈청에 마련된 영정을 보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지금이라도 '세상은 그저 강직하게 살아야만 해요. 세상에 나왔으면 할 일은 하고 가야지'라고 말씀을 하실 것만 같다.

 

문수 스님, 지난해부터 많은 고민 해와

 

"스님께서는 지난해부터 말이 없어지셨어요. 원래 과묵하신 분이신데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깊은 생각만 하고 계셨습니다. 3년 전부터는 공양도 하루에 한 끼 밖에는 들지 않으시고요.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죄스럽다고 하시면서. 어제까지도 저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소신공양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문수 스님과 지보사에서 함께 생활을 해 오셨다는 스님의 이야기다. 부여에서 먼 길을 달려오신 한 도반스님은,        

 

"문수 스님은 말씀이 없으신 분이죠. 그래도 가끔은 농담조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스님이 되어서 법랍 30년이면 살기가 편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어렵다고 하셨죠.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치던 것이 이제는 발걸음 하나도 마음대로 뗄 수가 없다고요. 발 밑에 개미라도 한 마리 있으면 어쩌느냐는 것이죠. 그리고 지난해 부터는 4대강 개발을 두고 많이 고민을 하셨습니다. 스님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처럼 싸울 수도 없고, 차라리 한 몸을 불살라 소신공양이라도 하고 싶다고요."

 

▲ 유서 문수스님이 자필로 쓴 유서. 4대강 개발 중지와 부정부패 척결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아마 스님께서는 이미 작정을 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강직한 성격 탓에 불의와는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스님이셨다. 언제나 말을 앞세우는 것을 싫어하시던 그 마음이 소신공양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하셨나보다.

 

서민들의 고통을 멈출 수만 있다면

 

"스님의 또 한 가지 고민은 바로 서민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국가가 정책을 잘 펴서 없는 사람들이 편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느냐고 늘 노엽게 생각하셨죠. 소신공양 이야기 하실 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신다'고 했는데도, 결국 이렇게 소신공양으로 세상을 떠나셨네요. 스님의 소신공양은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이 자필로 쓴 유서에는 4대강 개발 중지와 부정부패의 척결 그리고 서민생활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친필로 쓴 유서는 수첩에다가 쓴 것이다. 그리고 스님이 평소 입으시던 삼베 법복에도 유서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늘 강직하시던 문수 스님. 오늘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군위 삼성병원 문수 스님의 빈소에서 말을 잃었다. 그저 하릴없이 스님의 영정만 바라보고 있는데 한 남자분이 이야기를 한다.

 

▲ 법복에 쓴 유서 명주로 지은 법복에 쓴 유서.

 

"문수스님의 법구를 보고 놀랐습니다. 스님의 법력이 대단하시다고 느꼈죠. 사람이나 짐승이나 불에 타면 신체가 오그라드는데, 스님께서는 일자로 꼿꼿이 숨지셨습니다. 가슴께로 두 손을 모으신 채로요. 몸이 타는데도 정신을 잃지 않으셨다는 것이죠."

 

이야기를 들으면서 억장이 미어지는 듯하다. 4대강은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지만,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시던 문수 스님. 소신공양으로 인해 스님의 그 큰 뜻이 이루어질 수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6, 1)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