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제(告由祭)’란 개인의 집이나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나 치른 뒤에 그 사정을 신명이나 사당에 모신 조상에게 고하는 제사를 말한다. 11일 오전 10시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 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수원 향교에서는 100여 명의 향교 남녀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민선 6기를 열어갈 염태영 수원지장의 고유제가 열렸다.

 

염태영 시장의 고유제를 주관하기 위해 수원향교의 관련자 70여 명과 일반인 들 100여 명이 수원시 팔달구 항교로 137번길 43(교동)에 모였다. 건과 도포를 입은 유림들은 고유재가 시작되기 전 먼저 성균관으로 올랐다. 이곳에서 사배를 한 후,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제관을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수원 향교 명륜당 뒤편 대성전을 오르는 게단 밑에 모인 향교 관계자들은 염태영 시장이 도착을 하자, 대성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우측문을 사용한다. 향교의 모든 의식은 반드시 우측문으로 들어가서 좌측문으로 나오는 것이 원칙이다. 사람들은 일렬로 줄을 지어 우측문으로 대성전 아래 단에 도열을 했다.

 

 

앞으로 4년 동안 수원을 변화시키겠다.

 

고유제를 지내기 전에 미리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한 염태영 시장은

지난 5기 때 이곳을 들렸다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약속을 하고 혼이 난 적이 있다. 이제 4년 만에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오늘 이 자리이서 나는 수원을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을 하겠다. 사람 중심의 도시 수원, 사람이 먼저인 도시 수원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고유제를 시작하기 전 마음을 전했다.

 

유림들과 관계자들이 모두 대성전을 행해 4배를 한 후 염태영 시장은 손을 씻은 후 대성전으로 올랐다 이 곳 대성전에 모셔 놓은 공자의 신 위 앞에서 향을 사른 후 고유축을 낭독했다. 그런 다음 대성전이 서편 문으로 나와 제단 아래서 4배를 하는 것으로 모든 행사는 끝이 났다.

 

수원향교는 원래 화성시 봉담면 와우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 13년인 1789년 수원읍치가 지금의 수원시로 이전되면서, 팔달산 남쪽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향교의 전형적 베치 형태인 전학후묘의 형태로 구성한 수원향교는 이곳의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마다 장대석으로 층을 쌓아 건물을 짓게 하였다.

 

현재 수원향교에는 공자와 맹자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성현 18위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수원 향교는 1795년에는 성 밖에 조성하였으니 정조가 친히 이곳까지 행차한 유서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고유제 성신사에서 지내는 것이 맞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71일 민선 제6기가 새롭게 출발하던 날 아침 일찍 현충탑에 참배를 한 후 화성 행궁 화령전으로 찾아갔다.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으로 이곳에서 6기 시장으로서 책무를 시작할 것을 알리는 고유제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11일 오전 수원향교에서 공맹과 우리나라 선영들에게 고유를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짚고 가야할 일이 하나 있다. 염태영시장은 반드시 팔달산에 있는 성신사를 찾아가 팔달산 성신에게 고유제를 지내야 옳다고 생각한다. 팔달산은 수원의 안산이다. 수원은 모든 기운은 팔달산에서 시작이 되며, 팔달산의 중심은 바로 화성의 성신을 모셔놓은 성신사이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정작 수원시장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고유제를 지내야 할 곳은 바로 성신사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신사는 정조대왕의 지시에 의해 팔달산 중턱에 신령을 모신 진정한 화성의 사당이기 때문이다. 성신사는 그야말로 수원과 화성, 그 모든 곳의 안녕을 관장하는 화성의 성신이 좌정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봄철이 되면 문화유적이 한번쯤은 몸살을 앓는다. 그것은 바로 겨우내 얼었던 담장이나 지붕이, 봄이 되어 해동이 되면서 갈라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수원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많은 구조물부터, 많은 문화유적을 갖고 있는 곳이다. 하기에 봄철이 되면 각별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전국의 많은 문화재들이 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도 하고 기와 등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고택 등이나 많은 문화재 전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과연 우리 수원의 문화재들은 봄철에 제대로 관리는 되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25일 화령전과 26일 서장대를 거쳐 성신사까지이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또 하나의 사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일부 훼파가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원래 화령전에는 어진을 모신 운한각을 비롯하여, 일이 있을 때 어진을 피난시켰던 이안청과 풍화당, 그리고 제정과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원래 건물 그대로 남아있던 운한각과 풍화당, 그리고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어정 뒤편 담장 흙 무너져 내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이다.

 

 

그런데 이 제정 뒤편의 흙담이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봄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화령전을 찾아오고 있다. ‘사적의 담장이 일부 흙이 떨어져 볼품이 없는데 저렇게 방치를 하네요. 담당부서가 없는 것인지 원.’. 관람객 한 사람이 혀를 찬다.

 

성신각 담장 틈이 벌어지고 지붕에 흙 흘러내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신사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26일 오후 서장대를 거쳐 계단을 통해 성신사로 내려왔다. 그런데 성신사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담장은 여기저기 금이 갔는데, 어느 곳은 보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이다. 거기다가 성신을 모신 전각 뒤편에 있는 제정은 물이 하나도 없다. 물론 가물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지저분한 우물의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볼썽사납다.

 

문제는 성신사의 지붕이다. 기와 위로 붉은 흙깉은 것이 잔득 흘러내렸다. 기와를 놓을 때 밑에 깔았던 흙이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흙이 말라 흘러내린다면, 기와가 미끄러져 내릴 수도 있다. 위험한 모습이다. 한 마디로 성신사의 복원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두 곳 다 속히 시급한 보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칫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SBS 모닝와이드 생방송 ‘이봉주의 바운스’ 수원편

 

아침부터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옆 장안공원이 시끌벅적하다. 짧은 반바지에 런닝화를 신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모두가 달리기를 하기에 적당한 차림들이다. 8월 8일 아침 7시 30분부터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SBS의 모닝와이드 ‘이봉주의 바운스’에 출연해, 마라토너 이봉주와 함께 아침을 달릴 사람들이다.

 

전날 늦게 해외출장에서 돌아 온 염태영 수원시장도 함께 자리를 했다. 모닝와이드에 생방송으로 송출된 이봉주의 바운스는 7시 30분, 7시 45분, 8시, 8시 30분 등 중간 중간 현장에서 화성의 아름다운 모습이 영상에 비쳐졌다. 이른 아침 화성을 배경삼아 달리는 수원시민들의 모습이다.

 

 

화성의 아침을 달린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

 

이날 마라토너 이봉주와 리포터 홍운경, 그리고 함께 바운스에 출연해 달린 사람들은,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해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 마라톤 동호회, 수사마(수원을 사랑하는 마라톤 클럽), 그리고 생태교통 서포터즈 등이 함께 달렸다. 일행은 장안문을 벗어나 화성열차가 다니는 길을 따라, 성신사까지 왕복을 하면서 상쾌한 아침공기를 갈랐다.

 

화성의 이른 아침은 분주하다. 아침 일찍 장안공원에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모여든다. 그런 분주함 속에서 이봉주와 함께 달릴 시민들은 몸풀기에 열심이다. 비록 긴 구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전에 철저한 준비는 필수라고 한다. 수원을 사랑하는 마라톤 모임인 수사마의 한 회원은

 

“이렇게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이봉주 선수와 함께 화성을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희들도 이 코스를 따라 아침마다 달리기를 한 번 해보아야겠습니다.”라며 환하게 웃는다.

 

 

달리면서 생태교통을 전국에 알리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많은 수원시민들과 함께 수원에서 가장 의미있는 화성에서 달리기를 한다는 것이 더욱 기쁘다고 하자, 이봉주 선수는 자신도 수원시민이라고 했다.

 

“수원 화성의 역사는 불과 200년 밖에 안됐지만, 성곽의 건축물들이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빛 아래 수원 화성의 야경은 정말 일품이죠.”라고 염태영 시장은 말을 했다.

 

성신사로 오르는 길을 달린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마라톤을 꾸준히 연습해 온 사람들이야 왕복구간이 그리 길지가 않으니 잘 달리겠지만, 일반 서퍼터즈들은 많이 힘들어 하기도. 하지만 수원을 알릴 수 있는 기회에 동참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우리 수원 화성을 알릴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인 듯합니다. SBS의 모닝와이드는 많은 시청자들이 보는 프로이기 때문에, 이렇게 화성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 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수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죠.”

 

달리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생방송에서 함께 달릴 수 없이 행복하다는 한 서퍼터즈의 이야기이다.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은 달리기를 하면서 홍운경 리포터가 묻는 화성에 대한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해주기도.

 

성신사를 돌아 다시 출발지로 내려오던 일행은 홍운경 리포터가 9월에 수원에서 세계최초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염태영 수원시장은

“성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 수원시민이 다함께 도전하는 축제를 계획 중이다. 수원 팔달구 행궁동 일대를 세계최초로 차 없는 마을로 만들 계획이다. 생태교통 수원을 만들기 위해 9월 한 달 동안 무동력 이동수단과 친환경 전기동력 수단을 이용하게 된다.”고 답변을 했다.

 

 

이른 아침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와 함께 아름다운 화성을 배경으로 달린 사람들.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마무리 운동을 하고 있던 한 시민은 수원시민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정말 좋습니다. 이봉주 선수가 수원시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그런 최고의 마라코너가 수원시민이라는 것이. 앞으로 건강을 위해서 저도 달리기를 계속할 겁니다. 우리 수원이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듯, 저희도 열심히 달려야죠.”

팔달산 중턱에는 성신사(城神祠)’라는 사당이 있다. 바로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일제 강점기에 훼파가 되었던 것인데,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복원이 되었다.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고유제를 지내 온 화성연구회 회원들은, 화성 행궁 뒤편 좌측 서장대로 오르는 길에서 명문이 적힌 기와편 등을 발견하였다.

 

그런 후에 매년 정월에 날을 정해 이곳 성신사 터에서, 성신을 위한 고유제를 지내왔다. 처음에는 성신사의 복원을 위한 고유제를 지냈으나, 200910월에 성신사가 조금 자리를 옮겨 복원을 마치자 그곳에서 정월에 날을 잡아 고유제를 지내오고 있다.

 

 

정조의 지시에 의해 지은 사당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연구회 노력으로 복원 된 성신사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216일 오후 2시에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주관으로 이루어진 수원화성 성신사 고유제는 이낙천 이사장, 김이환 명예이사장(이영미술관장) 30여명의 회원들이 참석을 하였다. 제순은 성신의 위폐를 여는 것으로 시작을 해, 행강신례 행참신례, 행전신례에 이여 초헌관이 첫 잔을 성신에게 올리는 행초헌례의 순으로 이어졌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 이게 아쉽다

 

30분 정도에 걸쳐 끝이 난 성신사 고유제. 고유제의 끝은 행망예레라고 하여서 축문을 태우는 일이다. 그리고는 예를 모두 마치게 된다. 그러나 이 고유제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든다. 사당은 어디나 예제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을 마련한다. 그러나 성신사에는 어디에도 축문을 사를 수 있는 예감이 보이지 않았다. 정당 좌측 뒤편에라도 예감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정당 안 위패 앞에 향로 하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사당 안에는 기본적으로 향로가 있기 마련이다. 성신사는 화성의 신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따지면 수원을 지키는 신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앞에 방명록이나 향을 사를 수 있는 변변한 향로 하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곳을 들리는 관광객들이 향을 피우고 예를 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옆에는 방명록 등을 비치해 들려간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촛불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켤 수 없다고 해도, 향 정도는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화성에 대소 공사를 시작하거니 끝이 날 때는 이곳 성신사에 가서 참례라도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담당부서에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하기 바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건조물을 지으면, 그곳에는 신령이 있다고 믿었다. 집안에 있는 가신만 해도 상당하다. 우선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수문장신이 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우물에는 용왕신이 있고, 마구간에는 우마대신이 자리한다. 부엌으로 들어가면 조왕신이 있고, 물독에는 용궁각시가 있다고 한다.

 

대청에는 성주신이 있으며, 안방으로 들어가면 삼신할미가 자리한다. 시렁위에는 조상신이 좌정하고, 안방의 벽에는 삼불제석이,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굴뚝에는 굴대장군이 있으며, 장독대에는 터주신이 자리한다. 이렇게 집안에만도 수많은 가신(家神)이 존재한다. 이러한 것은 다 집안을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으며, 이 신들은 사로 상응하면서 집안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화성에도 신이 있다.

 

가정에도 그 많은 신이 있는데, 화성이라는 거대한 조형물을 축성했는데 어찌 신이 없을 것인가? 화성에도 당연히 성을 지키는 신이 있다. 바로 서장대를 오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성신사(城神祠)’에 모셔놓은 ‘화성의 신’이다. 성신사라는 명칭은 ‘성의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란 뜻이다.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사당인 성신사는, 화성의 축성이 완료될 때쯤에 정조의 특별지시에 의해서 축조가 되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조는 7월 11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약 한 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정조는 성신사의 설치 후,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는 축문을 내리기까지 헸다.

 

사당의 조성이 완공된 후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1796년 9월 19일에 길일을 잡아 위폐를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성신사의 제사는 매년 봄, 가을이 시작되는 초하룻날인 행삭에 지내도록 하였다.

 

 

 

가을 빛 아름다운 성신사에 오르다

 

성신사는 일제 강점기에 훼파되었던 것을, 화성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 4월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성신사를 복원하기 위한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2009년 10월에 중건을 마쳤다. 복원된 성신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사당 앞에는 솟을삼문을 짓고 문 좌우로는 5칸의 행각을 연결하였다.

 

10월 26일, 신풍루 앞에 서서 팔달산을 바라다본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양편의 보호수가 일몰시간이 가까워서인가, 오히려 더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성 행궁 옆 주차장을 벗어나 천천히 팔달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물이 들어 떨어지기 시작한 단풍들이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정겹다.

 

일부러 차도를 버리고 비탈길을 오르는 것도, 깊어가는 가을을 발밑으로 느끼고 싶어서이다. 길을 벗어나면 좌측으로 성신사가 보인다. 아마도 일제는 화성의 아름다움을 어지간히 시기를 했는가보다. 많은 화성의 구조물들을 훼파한 것을 보면. 성신사의 솟을삼문을 들어서 정당 앞으로 가 고개를 숙인다.

 

 

 

성신사 주변을 돌아본다. 뒤편의 담벼락은 전돌을 사용한 심벽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 한편에는 제향에서 사용한 우물인 듯 육각형으로 조성한 우물이 있다. 그 우물 속에 단풍이 물들어가는 팔달산이 담겨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는 제향이 중단되어 있었는데, 내년에는 날이라도 잡아 화성의 성신을 위하는 ‘성신굿’이라도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화성의 사라졌던 구조물이 하나하나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화성이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게 될 텐데. 그때까지 화성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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