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구룡사지 탐방기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89번지 외 4필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39호 공주구룡사지(公州九龍寺址)로 지정이 되어 있다. 구룡사지가 있는 상신리는 계룡산의 북으로 뻗은 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이 지역을 법당골, 부도골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에는 많은 석조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서 〈구룡사〉 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구룡사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의 안쪽 절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당간지주가 서 있으며, 주춧돌과 장대석,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는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백제 후기나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계룡산 북쪽의 절 구룡사

 

구룡사지는 계룡산의 사방에 있는 사찰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에는 동학사, 서에는 갑사, 남에는 신원사, 그리고 북에는 구룡사가 있다. 구룡사를 제외한 나머지 절집들은 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건재하고 구룡사만 사라진 셈이다.

 

구룡사가 있던 공주시 상신리는 계룡산 자락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대전 유성에서 공주 공암 쪽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을 박정자 고개라고 부르는데 조금 더 가면 온천리에서 좌측으로 계룡산 쪽으로 난 길이 있다. 먼저 나오는 곳이 하신리 마을이고 그 곳을 지나면 상신리 마을이 나온다. 대전, 공주를 가는 길에서 상신리 까지는 6km 정도가 된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대전에서 방송일을 할 때 취재를 하려고 몇 번 들렸던 상신리마을은 참 운치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안길은 흙길에 돌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아 놓아서 그 위로 담장이가 타고 오르는 것이 퍽이나 시골스럽고 인상적이었던 곳으로 기억이 난다.

 

바위 위 덩그마니 앉은 소나무 한 그루

 

상신리는 찾아 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것은 바로 개울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솟아있는 한 그루 소나무 때문이었다. 그 소나무가 어찌나 그리도 생명력이 있고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이번 길에도 그 소나무는 그렇게 한 결 같이 바위 위에 뿌리를 박고 서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그 싱싱하던 푸름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바위에는 깊게 무엇인가를 적어 놓은 듯한 흔적들도 희미하다. 아마 장수를 위해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

 

바위를 지나면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 산자락에는 천하대장군이 좌측 개울가에는 지하대장군이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상신리는 산제(山祭)도 함께 지내는데 이 마을은 산제를 정성들여 지내지 않아서 염병이 돌았다고도 하고, 마을의 장승터에서 나무를 자른 사람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래서 정월 열나흩날이 되기 전에 미리 장승이 있는 곳에 금줄을 치면 그날부터 외지인은 상신리로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을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제관을 선출하면 그날부터 금기를 지키게 된다. 우리 풍속에는 제를 지내는 제관들의 금기는 통례적으로 부부가 합방을 금지하고, 비린것과 날것을 먹지 않으며, 매일 냉수에 목욕을 하고, 출타를 금하는 등 까다롭게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상신리의 장승은 양편에 2기씩 서 있는데 눈을 치켜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는 각각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를 해 놓았다. 장승을 지나면 마을 첫 집이 식당이다. 그 모서리에는 금줄을 매어 놓은 선돌이 보인다.

 

 

옛 절터를 알리는 당간지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차를 돌릴 수 있는 공터가 보이는데 그 앞에 당간지주가 있다. 한편에는 돌담 위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그래도 옛 정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돌담은 그대로인데 집들이 많이 변했다.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이었으니, 어찌 옛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쏘냐?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을 공동 우물은 덮개를 덮어 놓았고 그 맑은 물이 흐르던 물길은 메말라버렸다. 마을 안길이 예전에는 흙길에 돌을 박아 놓아 걷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버려 삭막한 기분마저 든다. 어즈버 세월이 이리도 변하게 만들었을까? 마을을 돌고 보니 무엇인가 섭섭한 기분이 든다. 그대로 있기를 바란 내가 잘못이긴 하지만.

 

 

과거에 구룡사가 어느 정도의 절집이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의 규모로 볼 때, 아마 그 정도의 절집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계룡산 북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구룡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여러 쪽의 석재를 이용한 기단 위에 서 있다. 기단면에는 장방형으로 구획된 내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지주 사이에는 원형의 철통을 세웠던 주좌가 남아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했을 구룡사지 당간지주. 바람도 없는 날인데, 갑자기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날리는 흙먼지가 눈을 맵게 만든다. 세월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변해야하겠지만,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늘 또 마음의 아름다움을 하나 상신리에 버려두고 길을 떠난다.

요즈음은 답사를 나가면 해가 일찍 떨어져 부지런을 떨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금이야 많이 해가 길어졌지만, 한 달 전만해도 정말 답사를 다니려면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다. 일찍 해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 곳을 돌아보고 난 뒤 다음 답사지를 가급적이면 가까이 잡는 것도 그런 이유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을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짙은 안개로 오전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한 곳을 답사하고 난 시간이 벌써 5시가 넘고, 주변은 어두컴컴해진다. 서둘러서 다음 답사지인 감곡면 오향리를 찾아 길을 재촉한다.

 

음성군 감곡면 선돌을 찾아 나서다

 

오향리는 이천에서 제천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청미천을 건넌 후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있는 마을이다. 감곡에서 생극을 거쳐 음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몇 곳을 돌면서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오늘 찾아야 할 선돌 위치를 모른다. 한 곳에 들어가니 중학교 뒤편 논에 서 있다고 한다. 감곡중학교 뒤편으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가다가 보니, 저편 논둑에 돌이 서있다. 찾아보아야 할 선돌이다.

 

거대한 선돌. 제작연대까지 밝혀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 선돌.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재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선돌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선돌 중에서 큰 편에 속한다. 높이가 3m 정도에 너비가 194cm, 폭이 60cm이다. 이 선돌이 서 있는 곳을 '선돌바위들'이라고 부른단다.

 

선돌은 마을의 수호신인 신표와,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 등의 역할을 한다. 이 선돌은 마을에서 섬기는 마을의 수호신은 아니다. 돌을 다듬은 흔적도 없다. 다만 돌을 절개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커다란 바위에서 떼어낸 것으로 보인다.

 

오향리 선돌이 중요한 민속자료로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선돌을 세운 날자가 기록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남쪽을 향한 선돌의 아랫부분 절개면에 「숭정 13년 경진 10월 22일 입석(崇禎 十三年 庚辰 十月 二十二日 立石)」이라고 얇게 음각하였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본다면 1640년에 이 선돌을 이곳에 세웠으니, 370년을 이곳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선돌의 기능은 무엇일까? 앞에는 청미천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입석의 기능은 수해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는 생각이다. 혹은 이곳이 도계지역이므로, 그러한 경계의 표시였을 가능성도 있다.

 

끝내 암돌은 못 찾고, 마음만 아파

 

날은 이미 저물었다. 이 선돌의 안내판을 보니 이 돌이 암수 한 쌍으로 되어있고, 암돌은 남성선돌에서 북쪽으로 35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글씨가 새겨져 있는 선돌의 절개지가 남쪽이라면 그 반대쪽이 된다. 남성 선돌에서 바라보면 청미천 쪽 둑이 되는 셈이다. 거기다가 안성방향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 남쪽 언덕에 있다고 적혀 있다. 날이 컴컴해지고 있으니 서둘러 찾아보기로 했다. 좁은 농로를 차로 이동하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본다. 그러나 주변 어디에도 선돌 비슷한 것도 보이지를 않는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벌써 한 시간 이상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끝내 여성선돌은 찾지를 못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번 더 돌아보리라고 마음을 먹는다. 농로를 따라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학생들이 한 떼 몰려온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 적어도 학교에서 주변에 있는 문화재 정도는 한번이라도 알려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학생들 이 근처에 선돌이 어디 있는지 알아?"

"선돌요. 모르는데요. 선돌이 무엇인데요?"

"저기 앞에 저 돌처럼 세워 좋은 돌인데. 저것보다 조금 작은 것"

“몰라요."

 

어이가 없다. 도대체 요즈음은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학교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선돌, 그 정도쯤은 단 한번이라도 학생들에게 알려 줄만도 한데. 몇 번이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이다. 답답하다.

 

"이놈들 담배 피웠냐?"

"담배 피우지마라 뼈 삭는다."

 

차가오니 미처 끄지 못하고 버린 담배에서 연기가 나온다. 대답을 하는데도 담배 냄새가 난다. 교육이 점점 어디로 가는 것인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찾고자 하는 선돌은 보이지를 않고, 학생들은 선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차를 돌려 나오면서 갑자기 울화가 치민다. 오늘 우리의 교육현실이 참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 것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그런 학교생활. 과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선돌을 찾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그런 것 하나 알려주지 않는 교육 현실이 더욱 마음이 아프다.

 

남들은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하면 대뜸 '좋겠다. 마음대로 여행도 하고'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재미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 하나를 찾아보기 위해서 전국을 수 십차례나 돌았다. 그런데도 아직 내가 본 문화재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즐거움만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많은 아픔을 겪기도 한다. 문화재를 마구 훼손한다거나, 아니면 오늘처럼 이렇게 무관심한 세태를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늘 바람은 하나밖에 없다. 전 국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바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말이다.

여주읍에서 점동면으로 나가는 도로변에 문화재 안내판이 한 기 서 있다. <처리선돌>이라고 쓴 안내판에는, 안내판에서 30m 근처에 선돌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콘크리트 회사의 축대 밑에 서 있어, 선돌이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길을 숱하게 지나다니면서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30m 이내에 선돌 비슷한 것도 발견을 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공장의 축대 밑이고, 그곳에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마 안내판에 적힌 선돌이 그 공장 안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는 문화재

몇 번 주위를 돌아보다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공장 안은 콘크리트 공장답게 주변에 제품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그 안쪽에 돌로 축대를 쌓은 곳이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함께 서 있는 선돌이 보인다. 이렇게 선돌이 있으면 안내판에 공장안이라고 표기를 하든지, 아니면 축대에서 외부인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길이라도 내어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을. 그저 아무런 설명도 없이 30m 표시만 있으면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주군 점동면 처리 88 - 6에 소재하는 이 선돌은 경기도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선돌은 높이가 2.1m에 넓이는 1.35m 이다. 돌의 두께는 30cm 정도로 직사각형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돌은 위 부분을 가공한 흔적이 보인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져간 문화재

‘입석(立石)’이라고 하는 이 선돌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선돌은 고인돌과는 달리 근대화가 되는 과정이나, 도시화가 되는 과정에서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선돌이 왜 세워지는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대상물이거나, 경계표시, 권위의 상징 등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처리선돌이 서 있는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고, 그 앞에 청미천이 흐른다. 이곳이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것으로 보아, 이 선돌은 아마 마을의 숭배 대상이었을 것이다. 처리 선돌 앞에는 길게 누운 돌이 또 하나 있다. 처음에 같이 세운 것이 아니고, 후에 갖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 선돌의 앞에 누운 돌은 제단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처리의 선돌은 풍년을 구가하는 거석숭배 사상에서 기인한 마을의 신앙물로 추정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

작은 문화재 하나라도 그 가치를 따질 수가 없다. 이 문화재들이 온전히 보존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해서 문화재의 관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가나, 논밭 아무 곳이나 서 있는 것보다 관리 면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선돌을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면서 볼 수 있도록, 안내판에서 바로 들어가는 길 하나쯤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거대한 콘크리트 공장 안에 갇힌 선돌의 바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선돌은 고인돌과 더불어 대표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에 속한다. 선돌은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상당수가 있는데 비해, 많이 분포되어 있지는 않다. 선돌의 분포지역은 함경도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이다. 선돌은 돌을 세웠다는 뜻으로, ‘삿갓바위’나 ‘입암(立岩)’이라고도 부른다.

이 선돌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구지바위, 수구맥이, 수살맥이, 수살장군, 석장승, 할머니·할아버지 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선돌의 형태는 위가 뾰족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선돌에 구멍을 파거나 줄무늬를 그려 넣기도 한다.


기자속이나 자손창성과 연결이 되

선돌은 그 형태에 따라 암돌과 숫돌로 구분이 된다. 끝이 뾰족한 것은 숫돌이고, 뭉툭한 것은 암돌이다. 이는 이 선돌이 기자속과 연관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선돌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은 것은 칠성의 믿음과 연관이 되는 것으로, 이는 자손창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성혈인 구멍이 뚫린 것은 모두 기자속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선돌은 아들을 바라는 기자믿음으로 보여진다. 선돌은 마을의 어귀나 구릉지대, 논이나 밭 등에 서 있다. 그러한 선돌은 선사시대 신앙물로 이어지면서, 신성한 지역을 알리거나 기자속까지 연결이 된다.


전주에서 남원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남원 못 미쳐 장수, 금산 방향으로 가는 길이 좌측으로 나온다. 그곳에서 조금만 가면 지사면 영천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 길가에는 커다란 선돌 한 기가 서 있다.

빨래판으로 사용했던 선돌

이 선돌은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돌에 새겨진 성혈로 보아 아마도 선사시대의 입석으로 보인다. 이 선돌은 마을 사람들이 냇가에 갖다놓고 빨래판으로도 사용을 하였고, 개울을 건널 때 다리로도 사용을 한 돌이라고 한다. 2009년 까지는 버스정류장 부근에 서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이 선돌은 특이한 면이 있어 TV에 방영이 되기도 했다. 길게 일렬로 조성을 한 성혈 12개가 나란히 돌의 한 쪽 면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렇게 12개의 성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12지를 뜻하는 것으로도 본다. 이렇게 12개의 성혈이 나란히 조형이 되어있는 형태는, 우리나라 전체의 선돌이나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 중 매우 희귀한 경우이다.

성혈의 크기는 직경이 8~10cm 정도에, 깊이가 2~5cm 정도나 된다. 돌의 한편에 나란히 새겨진 이 성혈의 의미를 두고 많은 해석을 하는 것도, 이러한 경우가 거의 발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빨래판 선돌’이라고 부르는 이 선돌은 아마도 신성한 지역을 알리는 표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돌은 삼한시대 소도나 솟대 등으로 변했다고 하는 학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사면의 빨래판 선돌의 경우도 그러한 경우가 아니었을까? 누군가에 의해 간절한 염원을 담고 조형을 한 것으로 보이는 12개의 성혈. 많은 선돌들이 뒤늦은 연구로 인해 훼손이 되었지만, 이런 희귀한 선돌은 그 가치가 매우 높아 좀 더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