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인 안양중초사지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층의 몸돌만이 남아 있고, 그 위에는 지붕돌만 포개어져 있는 형태이다. 중초사터에 남아 있는 이 삼층석탑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유유산업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져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 되었다.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해제된 석탑

 

안양시 석수동 중초사지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지금은 건물만 남은 유유산업의 정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보물 제 4호)와 고려시대 석탑이, 문화재 보호구역(826㎡)내에 나란히 서 있다. 향우측에는 또다른 석탑의 부재로 추정되는 면석이 있다. 그중 석탑은 1963년에 보물 제 5호로 지정되었다가 최근에 해제된 상태이다.

 

‘중초사’는 통일신라 흥덕왕대의 사찰로 당시의 큰 절이었던 황룡사의 항창이 절주통으로서 이 당간지주의 불사에 참여 할였다고 한다. 그만큼 중초사는 커다란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초사는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흥지도서(興地圖書)』,『가람고(伽藍考)』같은 문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이미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안정한 석탑, 그러나 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해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너무 크고, 탑신의 1층 몸돌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석탑이다.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지면 위에 두꺼운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이단괴임으로 조각된 별석을 놓아 상층 기단부를 받치고 있는, 단층 기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4매로 짜여진 기단중석은 중앙에 탱주는 없이 양우주만 조각되었고, 그 위에 덮여진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다. 괴임은 일단이나 남면은 약간 부서진 상태이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1층 몸돌인 탑신석만 있을 뿐, 이삼층은 몸돌은 사라진 채 머릿돌인 옥개석만 포개어져 있다.

 

 

 

노반 이상의 상륜부 역시 사라진 상태이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편으로, 받침은 1 ·2층이 4단이고 3층은 3단이다. 대체로 이 탑은 원형을 잃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3일에 찾았던 중초사지. 굳게 닫힌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안으로 들어가 찬찬히 돌아본 삼층석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형태로 보아도 상당히 훼손이 많은 석탑이다. 더구나 2, 3층의 몸돌까지 사라져, 지붕돌만 포개어진 모습은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숱하게 수탈을 당하고 망가져 그 형체조차 찾을 길 없는 수많은 문화재들. 그래도 이렇게 일부분이나마 남아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아무리 못생기고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해도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03번길 4 (석수동 212 - 1)에 자리한 보물 제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시기가 당간에 적혀있어, 조성연대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당간에 지주명이 명기되어 있어

 

당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보력 2년(신라 흥덕왕 1년, 826년)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 해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이 때의 주통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상화상은 진행법사이며, 정좌는 의설법사이고, 상좌는 연숭법사이다. 사사는 둘인데 묘범법사와 칙영법사이다. 전내유내는 둘인데 창악법사와 법지법사이다. 도상은 둘인데 지생법사와 진방법사이며, 작상은 수남법사이다.」

 

 

이로 인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중초사에는 많은 무리의 승려들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고작은 직분을 갖고 있는 승려만 보아도 10여명이 넘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통 밑에 주통과 군통이 있었는데, 중초사에 주통이 있었다는 것은 중초사가 작은 사찰이 아닌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에 절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정좌), 교육을 담당하는 교무(사사), 자금의 츨납 및 사무를 관장하는 재무(상좌) 등이 있었다는 것은 소임을 맡지 않은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중초사에서 승악(현재의 관악산을 뜻한은 것으로 보임)에서 8월 6일 돌을 취하여, 28일에 두 개의 돌을 두 무리가 나누어 중초사로 운반을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9월 1일에 중초사에 도착을 한 것으로 적고 있다.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불구

 

당간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하기에 절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이 당간은 당과 당간, 그리고 지주로 구분이 되어있다.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굳게 닫힌 문, 한 바퀴 돌아오니 활쫙 열려

 

2012년 3월 3일 안양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석수동 인근에 있다는 문화재들을 촬영한 욕심에서이다. 먼저 중초사터를 찾아 들었으나, 당간지주와 석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철문에는 굳게 잠을통이 걸려있다. 한참을 밖에서 애를 태우며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토요일이면 12시에 문을 걸고 담당자가 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근 30분 이상을 안양시청과 구청, 동사무소 등에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음’이란다. 어딜 가나 문화재를 이렇게 홀대하는 것에 가장 분통이 터진다. 더욱 요즈음은 주말과 휴일이면 문화재 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렇게 잠겨 있는 문화재를 볼 때마다 참 답답하다.

 

근처에 있다는 석수동 마애종을 먼저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있다. 걸음을 빨리해 쫒아가니 굳게 닫힌 철문이 열려있다. 아마도 그 안에 건물이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밖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중한 문화재를 만난 것이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섬세하지는 않아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중초사가 어떤 절이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주변 가까운 것에 마애종들을 볼 때 아마도 당시 중초사란 절은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중초사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만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대로 된 기록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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