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금곡동)에 소재한 사적 제207호인 홍, 유릉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능침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있는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인 1897년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기존의 역대 어제실과는 다르게 조성해

 

고종황제의 능침인 홍릉을 바라보고 그 좌측에 보면 어제실이 있다. 어제실이란 홍릉에 제를 모실 때 제관들의 제사 준비와 휴식을 하기 위한 공간이다. 고급스런 사대부가의 살림집처럼 마련한 제실은 행랑채와 그 밖의 부속건물로 마련하였다. 이곳은 능참봉을 파견해 능을 관리하게도 했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함에 따라 모든 제도를 혁신하였다. 이에 따라 능의 구조와 돌로 만든 석물의 배치 등도 달라졌으며, 재실의 건축 또한 많이 달라졌다. 하기에 홍릉과 유릉의 어제실은 기존의 왕릉에 딸린 재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유릉의 경우에는 홍릉의 재실보다 더 웅장하게 조성하였다.

 

 

석물을 많이 사용한 어제실

 

어제실의 문을 들어서면 앞에 7칸의 전각이 보인다. 이 전각을 장대석을 이용해 세 칸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7칸으로 된 건물을 마련하였다. 전각을 바라보고 좌측에 두 칸의 방을 드리고, 중앙에 두 칸은 대청을 꾸몄다. 우측으로는 세 칸의 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맨 우측의 방은 마루방인 듯하다.

 

이 건물은 벽을 돌과 벽돌을 이용해 꾸몄다. 대문이 달린 행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양편으로 모두 자로 꺾어지었는데, 좌측은 두 칸의 광과 방, 대청, 안방, 부엌 순으로 나열했다. 우측 역시 좌측과 똑 같은 순으로 나열하였다. 그리고 우측의 담장에는 작은 문을 내어 제관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뒤편에도 9칸의 건물이 있어

 

중앙에 제관들이 사용하는 전각 뒤편으로도 9칸으로 된 또 하나의 건물이 있다. 이 전각 역시 한 칸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자로 지은 이 집은 좌측에 두칸을 내달아 부엌과 방을 드렸으며, 이어서 두 칸의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두 칸의 대청과 한 칸의 방이 있다.

 

이 건물 역시 외벽은 돌과 벽돌로 조성하였다. 일반적인 역대의 재실보다 그 규모가 더 커졌음은 물론 장대석으로 높이 쌓아올린 후에 맞배지붕의 전각을 지어 황제로서의 위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많은 왕들의 능침에서 보아오던 제실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꾸며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의 어제실. 보기에는 더 웅장하게 지어진 어제실이지만, 그 안에 고종황제의 슬픔과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지만, 역사의 아픔은 아직도 가시지를 않고 있다.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는 원래 경기도 여주의 땅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여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후 중창을 이루지 못한 절이다. 이곳을 찾았을 때는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서인가, 법천사의 발굴 복원 작업이 중단되고 있었다.

길가에 세워진 복원을 위한 중장비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그 차가운 금속물질이 더욱 날씨를 차갑게 느끼게 한다. 법천사는 권람, 한명희, 서거정 등이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만큼 이 법천사가 한 때는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곳을 황려현이라고 사료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여주에 속했던 지역으로 보인다.


법천사에는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일본 사람들이 밀반출하였다. 그 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 경내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앞에 서 있다. 이 현묘탑이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옮길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

현재 법천사지는 발굴, 복원 중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전각이 있던 자리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전각의 자리로만 추정해도 이 절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스님인 지광국사(984 ~ 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을 세운 이후,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에 지광국사의 업적과 삶을 기록한 비다. 국보 제101호인 탑은 제자리를 떠나고, 탑비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탑비 귀부의 머리. 신라말에서 고료 초기로 넘어오는 과정에 나타나는 용머리이다


수많은 석재들이 쌓여있는 법천사지. 그 하나하나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까지 이어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석재들 틈에는, 보기만 해도 상당히 귀한 석조물들이 보인다. 벌써 몇 년째 이렇게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현묘탑비의 앞면에는 지광국사가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혜린이라고 기록돼 있다. 16세(999년)에 스님이 되어 승통, 왕사, 국사의 칭호를 얻었으며, 84세인 1067년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 것을 기록하였다.




고려초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받침돌

국보 제59호 현묘탑비를 보면 놀랍다. 받침돌은 고려 초기 탑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국통일을 한 신라 말기부터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받침돌의 형태가 달라진다. 즉 거북의 몸에 머리는 용머리로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받침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받침돌의 형태는 그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용머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다. 얼핏 보면 무섭기도 하지만, 조금은 해학적이기도 하다. 그런데다 목 부분에는 또 다른 버팀석을 만들어 놓아 머리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몸체인 거북의 등에는 '王'자가 육각형의 무늬 안에 새겨져 있다. 왕사나 국사의 비에서 보일 수 있는 글자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현묘탑비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작품성을 엿볼 수 있다. 천년이 지난 과거에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연꽃의 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 모양의 머릿돌. 그리고 비 몸돌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과, 금방이라도 몸돌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용. 섬세하고 화려한 구름 등이 현묘탑비의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게 만든다.

국보 현묘탑. 제 자리를 떠나 더욱 안타깝다.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현묘탑비의 뒷면에는 1370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전체 높이 4.55m의 현묘탑비는 거북이의 몸에 용머리를 붙인 받침돌. 그리고 양편에 비천하는 용을 새긴 탑비와, 왕관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탑비 곁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이런 대단한 조각을 후대에 남겨줄 수 있는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1006번지. 금산읍에서 금산인삼장이 열리는 앞을 지나 제원면으로 들어가, 제원대교를 건너면서 좌측으로 보면 전각이 하나 보인다. 이 전각 안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산천내리용호석’ 중 ‘용석(龍石)’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100m 정도를 천변 둑을 타고 가다가 우측 농로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전각이 보인다. 그 안에는 용호석 중 ‘호석(虎石)이 있다. 천내리 마을 서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돌로 만든 동물상 2기인 천내리 용호석. 과연 이 2기의 석물로 조각된 용호석의 실체는 무엇일까?



공민왕이 두고 갔다는 용호석

공민왕은 고려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충목왕 즉위 원년인 1344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충정왕 1년인 1349년 원으로 건너가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았다. 충정왕 3년인 1351년 충정왕이 폐위되자 원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귀족회의인 ‘정방’을 폐지하는 등 많은 개혁정치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이 1360년 홍건적이 침입을 하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신을 내려갔단다. 그곳에서 자신의 능묘의 위치를 정해놓고 필요한 석물을 준비하였는데, 이 용호석이 바로 그 석물이라는 것이다.


위 사진들은 용호석 중 용석의 모습이다. 용은 돌기를 만들고 그 돌기사이네 용을 조각하였다


왕은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는데, 이 용호석은 그곳에 그냥 두고 갔다는 것. 만일 이러한 설이 맞는다고 하면 이 용호석은 제작된 지가 700년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 이 용호석은 천내리 강변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용호석의 설을 받침 하는 공민왕묘

공민왕의 릉인 ’헌릉은 개풍군 해선리에 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묻은 능침은 봉명산의 무선봉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서쪽 것이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이며,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이다. 1365년 왕비인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공민왕 지신이 직접 주관하여 9년이란 세월에 걸쳐 무덤공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금산 천내리의 호석은 꼬리를 앞발 사이로 넣어 앞다리에 걸친 모습이다. 민속화 등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로 앉아있다.


이 무덤은 고려의 모든 천문지리, 석조건축, 조형예술이 집대성되었다고 본다. 맨 위에는 봉분을 구성하고 3개의 층단과 맨 아래는 경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층단에는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치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공민왕의 무덤에 바로 금산 천내리 용호석 중 호석과 흡사한 호석 한기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금산에서 조각한 용호석을 가져가지 못한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죽고 난 후 능침을 조성하면서 이 석물로 조각한 호석을 만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호석의 형태가 흡사하다는 것을 보면, 천내리 용호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낭설은 아니란 생각이다.

아래는 공민왕 무덤의 호석 / 인터넷 검색자료

조각기법이 퇴화한 고려 후기의 조각

금산 천내리의 용호석은 그 모습이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석은 여러 개의 돌기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를 조각하였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는 아가미와 수염이 묘사되어 있다. 발톱은 우리나라 용의 네 발가락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비늘은 두텁게 표현을 하였다.

호석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바로 이 모습이 공민왕 능침 앞에 있는 호석의 형태와 동일하다. 천내리 호석은 몸은 서쪽, 머리는 북쪽을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털 문양은 두툼하게 솟은 곡선과 동그라미를 교대로 조각하여 표현되었다. 호석의 꼬리는 앞발 사이로 감아 한편으로 조각하였다.

호랑이나 용의 특징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나, 전체적으로 조각기법이 투박하고 퇴화한 점 등으로 보아, 이 용호석은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시기적인 것이나, 공민왕의 능침에 있는 호석 등으로 추론할 때, 이 용호석은 공민왕이 자신의 무덤에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을 했을 것이란 설에 공감이 간다.

공민왕과의 관계설도 그럴 것이라고 공감을 하지만, 용석은 동쪽을 바라보고 호석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용호석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듯도 하다. 700년 세월을 천내리 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용호석. 언제까지라도 주인을 기다릴 듯한 자세로, 오늘도 길가를 주시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인 신문왕 11년(691년)에 남원에 지어진 용성관. 용성관이 당시에는 어떻게 사용이 되었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조에 들어서는 이곳을 객사와 같은 형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본다. 이 용성관을 객사로 보는 이유는 조선 태조를 상징하는 패를 모셨다는 점에서이다.

조선시대의 객사는 양편은 숙소로 사용하고, 중앙에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행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용성관도 객사와 같은 형태로 보는 것이다. 용성관의 딴 이름은 백성을 돌보는 곳이란 명칭의 ‘홀민관(惚民館)’이라고도 했다. 용성관은 남원 광한루원과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을 모신 ‘관왕묘’와 더불어, 남원을 상징하는 3대 건물로 일컬을 만큼 그 규모가 컸다고 한다.

용성초등학교 입구 계단이 용성관의 흔적이다.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용성관

용성관은 조선조 선조 30년인 1597년 일본이 141,500명이라는 엄청난 대군을 몰아, 조선의 하삼도를 공격한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 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하였다. 그만큼 남원은 일본에 있어서는 치욕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복남을 위시한 조선군은 죽기로 각오를 하고 일본군과 격젼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인해 남원성이 함락되었으며, 이 때 용성관도 불에 타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광해군과 조선조 숙종 때 다시 축조를 하였으나, 6.25 한국전쟁 때 또 다시 소실이 되었다. 용성관의 지표조사 때는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이 되었는데, 1995년 용성관지 지표조사 때 출토된 유물들로 귀목문 암막새, 전돌, 철못, 다수의 와편 등 모두 50여점이 발견이 되었다.




용성관이 당시 얼마나 장중한 객사의 형태로 지어졌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석물의 받침부의 길이가 70m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이 5만의 군사를 동원해 남원을 공격한 것도, 알고 보면 당시 남원의 위상이 대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용성초등학교 계단에 흔적이 남아

용성관지에는 1906년 6월 객사인 용성관을 용성공립보통학교로 바꾸어 개교를 하였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소기 되었으며, 그 뒤 현대식 건물로 고쳐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성초등학교 본관 건물을 보면, 층계 두 계단이 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양편에는 석물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용성관이 남긴 석물이다.

계단 양편에 놓인 석물에는 꽃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석조물이 언제 적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리고 학교 건물 앞 기단부도 옛 장대석을 사용하였다. 건물에서 차도 쪽으로 돌아 나오다가 보면 철책으로 둘러친 곳에 많은 석물들이 보인다. 이 석물이 바로 용성관에 사용되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석물의 크기에 압도당해

남원시 동충둥 용성초등학교 교단으로 되어 있는 석물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계단 맞은편 교정에 있는 석물들은 그 모양만 보아도, 옛 용성관의 위용을 가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중앙에 있는 석물은 크기가 엄청나다. 사각형인 이 석물은 한편이 2m가 넘을 듯하다. 그런 사각형의 돌에 한쪽으로 치우쳐 둥그런 구멍이 있다. 아마 무엇인가 기둥을 새웠던 자리인 듯하다.



그 외에도 잘 다듬은 석주하며 주춧돌이 있다. 이런 석물들의 모양으로 볼 때, 용성관의 화려함이 상상이 간다. 지금은 석물 몇 점만 남기고 있는 용성관. 복원을 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석물만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들고 말았다. 그래서 슬픈 역사가 아닌지 모르겠다. 역사는 그래서 인간과 같이 희로애락을 반복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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