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낚시를 한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언제인가 방송에 동해 어디인가 집 안에서 바다로 낚싯대를 느리고 낚시를 하는 모습을 방영한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참으로 멋진 모습이다'라고 부러워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바다까지 가야만 할 수 있는 낚시다. 물론 그 집에 사는사람이야 언제나 낚시를 할 수 있지만.

 

그런데 바다를 가지 않고도 집안에서 낚시를 하는 곳이 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서원리에 가면 물맘 공방이 있다. 3대째 도공의 맥을 잇는 물맘 아우는 그동안 일본을 건너가 도공의 넋을 기리는 행사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은 제주도의 섭지코지에 빠져있지만, 최초로 일본 땅에 우리 장승을 깎아 세우는가 하면 현해탄에서는 막사발 수장제를 지내기도 했다. 


낚시를 유난히 좋아하는 물맘 아우는 시간이 나면 낚시를 한다. 그리고 잡은 물고기를 작업실 앞에 만들어 놓은 연못에 넣어둔다. 집에 손님들이 오면 가끔 작업실에서 직접 낚시를 해 대접을 하고는 했다.

 

작업실 앞에 있는 작은연못

낚시에 먹이를 끼우는 물맘 아우

요즈음은 이런 일을 하지 않지만 오랜만에 찾아가면 늘 매운탕을 끓여 소주나 한잔 하잖다. 매운탕꺼리는 있느냐고 했더니 바로 준비가 된다고 한다. 무슨 소리인가? 언제 낚시를 해 갖고 와서 매운탕을 끓인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런데 낚시가방에서 낚시대를 준비한다. 낚시대를 창밖으로 느리고 낚시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걸려 올라온다. 그것을 이용해 다시 낚시를 한다.

 

지루한 시간이 지난다. 낚시는 정신수양을 하는데 최고라고 한다. 한 곳만 집중하다보니 잡념도 사라진단다. 세상에 참 이런 일이 있을까? 집안에서 낚시를 하다니. 이렇게 살던 사람이 요즈음 들어서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하니, 거 참,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못가에 심어놓은 꽃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낚시를 하는 동안 연못가에 핀 꽃에 커다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자연은 늘 그렇게 인간과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간다. 인간이 자연을 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이 땅이기 때문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큰 녀석이 걸려들었다. 이렇게 집안에서 잡은 물고기를 이용해 손님접대를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월척을 낚았다. 물맘 아우는 답답할 때면 이렇게 작업실 앞에 있는 연못에서 물고기를 낚았다가 풀어주고는 했단다. 그리고 손님들이 오면 그 자리에서 낚시를 해 대접을 한다고. 잡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모두 즐겁다. 아마 이런 모습도 그가 예술가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난 날 이런모습을 보면서 참 별난 아우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젠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을 아는 사람. 그리고 최고의 한량이란 생각이다. 사람은 가끔 이렇게 변화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단 생각이다. 오랫동안 옛 자료들을 들쳐보다가 문득 물맘 아우 생각이 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술을 함께 한 기억이 가물하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을 하고 보내려는지. 두고두고 그리운 아우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 가면 단종임금이 지나갔다는 마을이 있다.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상구리와 상교리, 그리고 주암과 서원리 등이다. 1457년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이 되어,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명의 호송을 받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1457년 6월 22일, 단종은 한양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어린 단종은 상왕이 되었다가 다시 노산군이 되어 한양을 출발해 뱃길로 한강을 거슬려 이포나루에 도착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어린 단종은 어디로 길을 택해 영월로 향했을까?

눈물어린 길을 따라가 보다

여주군 상구리 블루헤런 골프장 안에 있는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

파사산성이 보이는 강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단종 일행은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위안골을 지나 무촌리 -옥촌리-장풍리를 거쳐 현재 골프장인 블루헤런 안에 있는 어수정에 도달했을 것이다. 어수정은 단종임금이 이곳에서 마른 목을 축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에야 길인들 제대로 있었을까? 겨우 사람 하나 지날만한 숲길을 헤치고 일행은 더딘 걸음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일행은 혜목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던 절로 ,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 시대에는 동봉원. 희양원과 함께 삼원의 하나로 역대 왕들이 비호를 하던 사찰이다.


어수정에서 물을 마신 단종은 안개가 자욱한 이 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는 고달사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단종 일행이 지나갈 때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 중에는 억울한 단종의 유배길에 눈물을 훔치는 백성들도 있엇을 것이다.

고달사에서 논둑 길을 따라 걷다가보면 좁은 산길이 나온다. 산길이라야 그저 낮은 마을 뒤 언덕이다. 이 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낭나무에 도착을 한다. 서낭나무는 지금은 옆으로 쓸어져 모진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아마 당시 이곳을 지나던 단종일행의 아픔을, 아직도 다 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하늘이 트인 곳이 나오고, 그 낮은 고개 위에는 서낭나무가 서 있다.

서낭나무 앞에서 잠시 숨을 들이쉰다. 서낭나무에서 20여m 앞에는 예전 서낭할머니가 살던 집이 있다. 이 곳에서 논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원리로 향했을 것이다. 서원리는 원이 있었던 곳으로 현 서원1리를 '원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공무를 보러 여행 길에 나선 관리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지금도 서원리에는 예전 원이 있던 집터가 있고,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집채만한 주추들이 있었다고 한다.
 
서원리 원골에서 하루를 묵은 단종일행은 북내면 석우리 선돌 앞을 지나 내룡리, 북내면 외룡리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마을이름이 내룔이나 외룡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왕과 관련된 지명이고, 단종이 지나갔기 때문에 '용'이란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고목이 되어버린 서낭나무와 그 앞 들판인 점말 고래들. 그리고 원골로 넘어가는 길

고달사지부터 길을 시작해 논길을 걸어 숲으로 접어든다. 한 여름 뙤약볕에도 숲길은 시원하다. 발밑에서는 비가 온후 자라난 풀들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마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나이 어린 폐왕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먼 길을 떠나 유배길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또 두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단 한 시간여를 걸어본 길도 힘이든대, 700리 길을 걸어 영월 청령포로 향한 어린 단종. 지금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 아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먼 세월이 가로막고 있다.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때도 이렇게 바람이 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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