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신등면 율곡사길 182(율현리)에 소대한 율곡사. 신라 경순왕 4년인 930년에 감악조사(感岳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절이다. 절과 관련된 사초 중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지만, 현재의 대웅전은 2003년 해체과정에서 어칸 종도리 하부에서 강희십팔년기미월일상량기(康熙十八年己未月日上樑記)”의 묵서명 기록이 나와, 조선 숙종 4년인 1679년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율곡사의 대웅전은 보물 제37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대웅전 앞쪽의 어간문을 비롯한 문의 문살은, 여러 문양으로 복잡하게 꾸며 건물에 더욱 다양한 느낌을 주고 있다.

 

 

화려한 닫집 밑에 아미타삼존불상 모셔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만들어 천장 속을 가리고 있고 불단 위쪽으로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놓았다. 율곡사 대웅전은 산 중에 자리한 건물치고는 비교적 큰 규모의 조선 중기 건물이다. 전체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웅장한 멋을 갖추고 있어 조선조의 건축문화 연구에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전 정면에 마련된 불단 위에는 닫집을 달아내고 그 밑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을 모셨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가운데 본존인 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삼존불의 크기는 1m 이상의 사람의 키만 한 불상으로서, 자세는 등을 세우고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의 반가부좌상으로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는 모습이다. 중앙에 좌정한 아미타여래상은 머리의 육계는 구분이 명확치 않으나 정상계주와 중앙계주를 표현하였다. 나발의 표현은 촘촘한 편으로, 얼굴은 방형에 가깝고 턱의 선은 비교적 둥글게 처리하였다.

 

아미타여래상은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서로 조화를 이룬다. 짧은 목 아래로 삼도를 뚜렷이 표현하였다. 삼도란 수행의 3단계인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를 말한다. 삼도는 성문과 보살 모두에게 해당하는 수행의 3단계이다. 아미타여래의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두꺼운 대의를 입었고, 가슴 아래로 수평의 군의자락이 보인다.

 

양손은 따로 만들어 끼웠으며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는데, 그 사이에 작은 구슬을 쥐고 있다. 오른팔은 구부려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한 채 어깨부위까지 들어 올린 상태이고, 왼손은 반가부좌한 오른발 위에 얹고 있다.

 

 

세분의 상이 흡사한 것이 같은 시기에 조성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자세, 손모양, 얼굴, 법의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본존인 아미타여래상과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 두 보살상은 장신구를 전혀 착용하지 않았으나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얼굴 표현은 아미타여래상과 같고, 다만 본존불에 비해 조금 길고 갸름한 편이다.

 

옷차림은 대체적으로 본존불과 같으나, 관음보살상은 오른쪽 어깨에 반쯤 걸친 소위 반단형식이며, 등 쪽에는 왼쪽 어깨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보이는데, 이러한 표현은 아미타여래상과 대세지보살상의 경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규모는 1m 이상의 비교적 큰 크기의 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전체적으로 균형적이고 안정감 있는 조형성을 지니고 있다. 삼존불의 특징이 거의 일치하여 같은 시기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복장 유물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조선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한다.

 

산청 율곡사에서 만난 대웅전과 아미타삼존불상. 문화재를 답사하면서도 이런 삼존불을 만나면 그 자리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만나는 부처마다 한 가지 원은 꼭 하는 편이다. 그저 우리나라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가 훼손이 되지 않기를 먼저 바란다. 그리고 아직도 제자리를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많은 문화재들의 조속한 귀환을 바라는 마음으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582에 소재한 지리산 내원사. 그 대웅전 옆에 서 있는 전각 안에는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보물 제1021호호로 지정된 이 석불은 지리산 중턱에 있던 석남암사지에 있다가, 현재 내원사로 옮겨 놓은 돌로 만든 비로자나불상이다.

8월 13일, 지리산 골짜기로 들어섰다. 비가 정신없이 내리기 시작하다. 내원사를 들어가는 길 곳곳이 공사중이다. 지난 번 비로 인해 수해를 입은 곳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내원사 삼층석탑 뒤편 전각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우리나라 비로자나불 중 제일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의 흔적이 보여

현 대원사에 소재한 석남암사지 석조 비로자나불상은 비바람에 의해 심하게 마멸이 되었기 때문에, 세부표현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외형만 보아도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는 높고 큼직한 편이나, 약간 파손이 되어있다.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는 얼굴은 부피감이 풍부하여, 그 형태가 균형이 잘 맞으며 8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석조 비로자나불의 상체는 건장한 모습이다. 자연스러운 가슴과 허리의 굴곡, 어깨나 팔의 균형미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얇아서 신체의 굴곡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옷주름 역시 촘촘하고 부드럽게 표현하여 8세기 불상의 옷주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제적으로 알맞은 체형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나 귀의 크기 등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가 되어있다. 수인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모습에서, 이 불상이 비로자나불임을 알려주고 있다. 앞에 수미단을 놓아 가려져 있는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졌는데, 8각의 하대에는 아래를 향한 큼직한 연꽃무늬를 새겼다.

중대는 8각의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상대에는 두 겹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0 광배는 신체 전체를 감싸고 있는 형태인데,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광배는 위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하단까지 깨져, 약 3분의 1정도가 없어져 버렸다.




가장 오래된 석조 비로자나불

대좌 중앙의 구멍에 있었던 사리호 표면에 기록된 글에는, 신라 혜공왕 2년인 766년에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석남암사에 모신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보아 이 불상은 1250년 정도가 지난 고불이다. 석남암사지 석조 비로자나불상은,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중에서 가장 빠른 조성 예로 기록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현재 이 석조 비로자나불상은 보물 제10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소중한 문화재, 그것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러한 책임을 나몰라라 하는 사람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 깨지고 훼손되어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문화재, 그리고 온통 낙서가 된 낙서판인 벽과 명승지. 그것이 과연 우리가 후손들에게 떳떳이 줄 수 있는 것일까? 오늘 깊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건물이다. 절집에 들어가면 먼저 대웅전에 들리는 버릇을 갖게 된 것도, 대웅전 안에 본존불을 모시기 때문이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율현리 1034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율곡사. 율곡사는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중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단성현에 있는 절로 기록되어 있다.

8월 13일, 가늘게 뿌리던 비가 율곡사에 도착할 때쯤에는 잠시 멎는 듯하다. 그것도 잠시, 다시 쏟아 붓는 비를 피해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꼭 비를 피해서라기보다는, 늘 하던 참례를 하기 위해서이다.



아름다운 율곡사 대웅전, 기품이 서린 듯

율곡사 대웅전은 보물 제374호로 1963년 1월 21일에 지정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건물인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그리 크지 않은 팔작지붕으로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그 크지 않은 건물이 주는 느낌은 사뭇 기품이 서린 듯하다. 산 밑에 자리한 대웅전은 흡사 수줍음을 타는 새색시가, 신방에 조용히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대웅전 뒤편 비탈에서는 잡풀을 깎아내느라 소음을 내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커다란 소나무들만 남겨 놓은 산비탈이 깨끗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율곡사 근처의 잡풀들은 모두 잘려나갔다. 정리가 잘 된 사찰의 대웅전. 그래서 더 기품이 있는 듯 보였던 것일까?



대웅전 현판을 따라 눈을 돌려본다. 3단으로 짜인 목조장식인 공포는 복잡하면서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단청이 한층 거들고 있는 듯하다. 이 목조장식들은 조선조 초기와 중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웅장함을 잃지 않은 멋, 아마도 전각 중에서도 그 태가 유난히 아름답다고 생각이 든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전각

대웅전의 주초는 모두 덤벙주초를 놓았다. 어디나 그렇듯, 자연을 떠나지 않는 것이 옛 절의 특징이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음은, 스스로가 자연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율곡사의 대웅전 역시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연 속에 묻혀, 스스로 자연이 되어가고 있다.



옛 고찰을 찾아다니면서 마음이 편안한 것은 바로 자연을 넘지 않는 절의 전각들이다. 물론 그 중에는 웅장함을 보이고 것들도 있지만, 산을 타고 오르는 절집들을 보면 자연 안에 숨어 있다. 밖에서는 겨우 그 지붕만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저런 모습들은 바로 그 절을 창건하고 중창한 스님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내부와 삼존불

대웅전의 창호들은 모두 아름답게 꽃창살을 달아냈다. 그도 율곡사 대웅전의 자태를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양편에 문을 내어 놓았다. 측면의 문이야 불자들이 드나드는 곳이지만, 이렇게 뒷벽 양편에 문을 낸 것은 아마도 시원한 산바람을 맞아들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안을 들여다본다. 복잡한 목조장식이 아름답다. 천정은 모난 우물모양으로 꾸몄으며, 심존불의 위로는 닫집을 달아냈다. 어디하나 부족함이 없는 율곡사 대웅전, 많은 전각을 보아왔지만, 이처럼 단아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전각은 드믄 듯하다.

수미단 위에 모셔놓은 삼존불은 목조아미타삼존불이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삼존불은 중앙에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상이 좌정을 하고 있으며, 왼편에는 관음보살상을, 오른편에는 대세지보살상을 놓고 있다. 삼존불의 크기는 1m 정도로 어른의 앉은키만 하다. 반가부좌상의 모습으로 앉아있는 모습은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있다.


삼존불은 특징이 거의 일치하고 있어, 동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수줍은 듯한 느낌을 주는 전각과, 그 안에 좌정한 삼존불. 대웅전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마 이 편한 느낌 때문에 절집을 찾아드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퍼붓던 비는 어느새 맑게 개었다. 또 다시 걸음을 옮기라는 것인지.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538에 소재한 내원사. 지리산 내원사라고 부르는 이 절은 양편으로 물이 흐르는 계곡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여름철 계곡에 물이라도 불어나면, 암반으로 된 계곡 바닥을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한 곳이다. 가끔은 천둥이 치듯 굴러 떨어지는 물소리에 막힌 가슴이 확 트이기도 하고.

지난 8월 13일 찾아간 내원사. 내원사로 들어가는 다리가 붕괴되어 있고, 아름답던 계곡은 여기저기 파여 나갔다. 내원사로 들어가는 마을의 길도 한편이 뭉툭 잘려나간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지난번 집중호우 때 지리산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하더니, 그 때 수마가 할퀴고 간 자국을 남겼는가 보다.



빗속에 찾아간 내원사, 삼층석탑을 보다

내원사에 도착 했을 때는 또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 하는 비 때문에 제대로 답사를 할 수가 없다. 경내로 들어서면 시원한 마당과 산 밑으로 나란히 선 전각들이 보인다. 내원사의 대웅전을 바라보면, 대웅전 앞에 역간 비켜 서 있는 삼층석탑이 있다.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신라 탑의 모습이다.

내원사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과 3층의 탑신, 그리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이며 높이는 4.8m이다. 이 석탑의 북쪽에는 옛 법당지가 있고, 주변에 석등부재와 석탑의 상륜부재, 각종 조각석의 파편 등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남향한 1탑 가람으로 현재 탑의 위치는 예전 그대로의 원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여기저기 손상이 된 삼층석탑, 그래도 당당함을 잃지 않아

내원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1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러나 이 탑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조금은 의아해 할 것 같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서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긴 것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불에 타서 심하게 손상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훼손이 된 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었을까 하고.

그러나 문화재를 지정할 때 조성 시기나 그 형태 등을 보아, 연대가 정확한 것은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한다. 이 내원사 삼층석탑은 신라 무열왕 때인 657년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1950년대에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그 후 부수어진 탑을 1961년에 내원사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을 한 것이다.



석탑은 지대석과 하층기단 면석은 같은 돌 4매로 구성되었는데, 하층 기단 각 면에는 두개의 우주와 두개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이 되었으며, 지붕돌인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씩이다.

옥개석 상면에는 2단의 받침으로 그 위층의 몸돌을 받고 있는 점과, 특히 기단부의 구성 및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하대의 석탑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깨지고 많은 훼손이 되기는 했지만,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내원사 삼층석탑. 석탑을 돌아보고 있노라니 비가 더욱 거세게 쏟아진다. 그 빗속에 견디기가 어려웠는지, 작은 동자상 하나가 엎드려 있다. 비를 맞으며 돌아 본 내원사 삼층석탑. 그 당당한 모습에서 신라인의 자태를 떠올려본다. 그 안에 삼국을 통일한 기개가 서려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는 가야 제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산청은 원래 돌이 많은 곳이다. 산청에서 나오는 수석을 제일로 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 돌무덤은 그동안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사지 설이 분분했던 곳이다. 이곳을 석탑으로 보는 이유는 층계로 되어 있고, 그 중간에 감실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또 하나 왕릉으로 보는 이유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어서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산청의 구형왕릉 무덤과(위) 구형왕릉 입구 정경


한 유생에 의해 확인된 구형왕릉

이 외에도 여러가지 기록에 의하여 이 돌무더기를 왕릉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조선조 정조 11년인 1798년 이 왕산사기를 읽은 산청유생 민경원이, 마을 사람들과 같이 왕산 기슭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중, 비를 만나 왕산사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가 나무상자 속에서 왕산사기 수정암기와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 녹슨 칼, 좀이 먹은 비단 옷, 활 등이 있어, 이 돌무덤이 수형왕릉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능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묵는 호능각을 들어가는 일각문과(위) 호능각


잡석을 이용해 쌓은 구형왕릉

현재 사적 제21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구형왕릉은 일반적인 봉토무덤이 아니다. 산청에서 많이 나는 돌을 이용해 비탈에 층단을 이용해 조성하였다. 석조무덤의 전체 높이는 7.15m로 비탈에 층단을 쌓고, 그 위에 둥글게 석조 봉분을 올린 형태이다.

이 구형왕의 릉 위로는 새가 날지 못하며, 나무뿌리와 심지어는 칡넝쿨도 뻗지 못한다고 한다. 8월 13일에 찾아간 구형왕릉. 관람객 몇 사람이 능에서 나온다. 능의 입구는 홍살문으로 하고 중간에 솟을삼문을 내었다. 그러나 그곳보다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들어가는 것이 더 운치가 있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귓전에 들으며 두 개의 무지개다리를 지나면, 왕능을 지키는 ‘호능각’이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누각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왕릉을 만난다.


능 앞에 서 있는 문무인석(반대쪽에도 서 있다)과 석비


잡석으로 쌓은 석조 능침 앞에는 ‘가락국 양왕릉’이라 새긴 비석과 양편에 문무인석, 그리고 상석과 장명등, 사자석이 있다. 이는 1957년과 1970년에 조성한 것이다. ‘양왕’이라는 이름은, 구형왕 12년 가락국 개국 491년 만에 신라의 침공을 받았을 때,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고 나라를 선양한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능 중간에 위치한 감실, 구형왕이 쉬어갔을까?

능 앞으로 가니, 그곳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안내판이 놓여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남들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 이런 것을 지키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능 중간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바로 커다란 돌을 이용해 만든 구멍이다. 이 구멍은 가로, 세로 40cm에 깊이가 68cm인 감실이라는 것이다.


잡석으로 비탈진 곳을 이용하여 층이지게 쌓은 구형왕능의 모습


이 감실의 용도는 신주를 모시거나, 등잔을 두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이 등잔이 현재 능 앞에 조성된 장명등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을 후손들은 ‘양왕의 영혼이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서 신성시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양왕의 능을 찾은 김유신이, 이곳에서 7년 동안이나 능침 곁에서 시능살이를 하며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증조부인 양왕의 서글픈 죽음을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능 윗부분의 둥근 봉분과 중간에 나 있는 영혼이 쉬어간다는 감실


한 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된 양왕. 그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곁으로 난 등산로를 오르는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가 않는다. 역사 속의 아픔은 그렇게 세월 속에 묻히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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