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의 서쪽에 위치한 사찰이다. 백제 의자왕 11년인 651년에 창건되었으며, 경내에서 백제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다. 신원사의 중악단은 삼국시대부터 산신사상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산신제는 신라 문무왕이 오악제를 올린 이후, 곳에 따라 현재까지 제사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신원사는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신원사의 사명을 새 나라의 시작을 의미하도록 신원사(神院寺)에서 신원사(新元寺)로 고쳤다. 신원사의 중악단은 조선왕조가 계룡산신에게 봄 ,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드리던 장소이다. 중악단은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궁중의 건물을 짓는 건축형태로 조성이 되었으며, 199932일 보물 제1293호로 지정이 되었다.

 

 

삼악 중 중앙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 중악단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산8 신원사 결내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1293호인 공주 계룡산 중악단. 중악단은 나라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중악단은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 중에서 그 중앙에 있다고 하여 중악단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중악단만이 남아있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는 오악의 한 곳으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인 1394에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인 1651년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인 1879년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난 가을이면 계룍산 신원사를 찾는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신원사의 가을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절은 온통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도배를 한다. 경내에 들어서면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온 듯하다. 중악단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게 되는 신원사의 단풍은, 매년 보아도 특별하다.

 

단묘의 건축법을 엄격히 지킨 중악단

 

공주 계룡산 구릉지에 마련한 중악단은 동북과 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했다. 중악단의 둘레에는 담장을 둘러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고 있다.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에 단묘(壇廟)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한다. 중악단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다.

 

 

중악단은 1.5m의 높은 돌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3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 장식하여 화려하고 위엄이 있다. 중악단은 국가에서 시행하는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있다.

 

각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잡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쓴 점도 특이하다. 지금은 조선시대에 산신제를 지내던 상악단과 하악단이 없어져 그 유적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중악단이 잘 보존되어 있어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으로 남아있는 소중한 전각이다.

음 10월 1일, 역마산 기슭서 영화동 당제 열려

 

2012년 11월 14일(음 10월 1일) 장안구 조원동, 경기도교육연구원 북쪽 주차장 뒷산인 역마산 자락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영화동 당제’가 열렸다. 오래도록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가내의 안과태평을 위해, 음력 10월 1일을 기해 지내오던 산신제가 한국전쟁 이후 20년까지 지내졌다고 한다.

 

이곳의 산신제는 조안말 사람들보다 영화동 주민들이 더 많이 참석을 했으나, 당이 유실되고 난 뒤 산신제도 그치고 말았다. 1997년 지역 어르신들의 모음인 삼오회가 주관이 되어, 다시 역마산 줄기에서 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는 수원시에서 지원을 받아, 영화동 당제추진위원회를 조성해 올 해로 3년 째 당제를 올리고 있다.

 

 

옛 ‘종교용지’가 역마산에 남아있어

 

역마산의 당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고 있다. 다만 지적도에 ‘종교용지’라고 표시된 부분이 있어, 그곳이 예전 당 터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의 전 보유자였던 고 오수복 선생은 살아생전, ‘역마산에 옛날에 도당굿을 하던 당집이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당이 소실된 것은 40여 년 전쯤으로 추정한다.

 

당제를 준비하고 있는 제장에서 만난 수원시의회 한규흠 의원은,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지내오던 당제를 복원했다고 하면서

 

“저희 영화동 당제는 전통이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또 당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에서는 당집 터를 찾아 당집을 복원하고, 주민들의 공동체를 창출할 수 있는 마을의 축제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

 

 

당제 전에 먼저 산신고사를 올려

 

제관들이 유교식 절차에 의해 올리는 당제가 시작되기 전에, 역마산 중턱에서는 영화동 통장협의회 진수진(남, 53세) 회장 등이 주관하는 산신제가 먼저 열렸다. 간단하게 포와 막걸리 등을 놓고 ‘올 한해 잘 보내고, 내년에도 영화동 주민들이 평안하게 하소서’라는 제관의 인사와 배례로 산신제를 마쳤다.

 

영화동 당제는 예정시간보다 조금 늦은 10시 10분께 시작이 되었는데, 간단한 국민의례와 내빈소개, 축사와 당제로 이어졌다. 당제에 참석을 한 라수홍 장안구청장은 축사를 통해

 

“역마산에는 지적도에 종교부지로 표기된 부분이 있어 당을 복원할 수가 있다. 이 당제로 인해 올 한해가 풍요롭고 내년에는 모두가 안과태평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영화동 당제의 당주는 영화동 통장협의회 진수진 회장이 맡았으며, 초헌관은 박정애 영화동장이, 아헌관은 박주복 영화동당제 추진위원장이 맡았다. 종헌관은 이순형 삼우회장이 맡아서 했으며, 특히 영화동 당제에는 영화동과 자매결연을 맺은 서산시 인지면의 장동규 면장 및 주민 20여명이 동참을 해 영화동 당제를 축하하기도 했다.

 

마을 공동체를 창출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날이 쌀쌀한 가운데 진행이 된 영화동 당제는, 250명 정도의 주민과 외지인이 참여를 했다. 제에 참석을 한 영화동이 거주한다는 이아무개(여, 45세)는

 

“종교를 떠나 이렇게 주민들이 모여, 서로 영화동의 안녕과 함께 가정마다 평안함을 기원하는 당제를 처음 보았다. 어찌 보면 우리 조상님들의 마음에는,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을 할 수 있도록 주변에 많이 알려야겠다.” 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위해 지내는 영화동 당제. 소실이 되었던 역마산 당제가 복원이 되었다는 것에, 관계자 여러분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또한 오래도록 이 당제가 주민들의 공동체를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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