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에서 59번 도로를 타고 월악산국립공원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에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 - 6에 소재한 이 고택은 청백리로 유명한 방촌 황희(1363~1452) 정승의 옛 집이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옥은 안채 및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가 있고 우측에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다. 도로변에 있어 찾기도 수월한 이 고택은, 문경지방 양반의 주거지로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부분이 서로 독립된 공간구성으로 마련되어 있다. 여느 고택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 장수황씨 종택은,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현감을 지낸, 칠봉 황시간(1588~1642)이 35세 때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가옥이다.

 

종택의 중후함이 느껴져

현재의 건물은 당시의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집이라는 것이 살다가보면 손을 보게 되고, 필요에 따라 증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400년 전의 집이 그대로 형태를 보존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4칸으로 구성 된 솟을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그 오른편에 안채가 있다. 그리고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반집의 어디나 그렇듯 사랑채 오른쪽으로 중문채가 있었으나, 화재로 중문과 마구부분이 소실되고 현재 일부만 남아있다.

사랑채는 전면에 툇간을 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좌측 2칸에 난간을 돌린 마루를 두고 2칸 온돌방과 연결시켰다. 우측 칸은 전면에 다락방을 설치하고 하부는 수장공간으로 활용한 점도 이 집의 특징이다. 뒤쪽으로는 반칸 정도의 감실을 두고 다시 온돌방을 설치한 3겹의 칸살로 구성되었다. 팔작집으로 마련한 사랑채는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나름 들어나지 않는 멋을 보이고 있다.




사랑채는 우측 한칸을 개방하여 누정식으로 사용을 하고
좌측의 다락방 아래는(맨 아랫사진) 수장고로 사용을 하고 있다.

안주인의 생활을 보호한 안채의 구성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ㄱ자형으로 구성된 평면공간이다. 안채는 사랑보다 조금 뒤쪽으로 물려서 구성을 했다. 안채의 꺾어진 부분에는 사랑과 유사한 안사랑공간을 만들었다. 사랑채 쪽으로 툇간을 두면서 뒤편으로 방을 배치하여 사랑과 연결을 하였으며, 전면으로 2칸 온돌방을 마련하여 앞쪽에서의 시선을 차단시켰다.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볼 때, 좌측부분은 안사랑 공간으로 마련하고 우측이 일반적인 안채의 기능을 하고 있다.

안채는 지금은 앞쪽이 훤히 트여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중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안채를 둘러 싼 안담이 있었을 것이다. 여지저기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는 안채는 창호지가 다 찢겨져 너덜거린다. 도로변에 자리한 종택은 지나는 사람들이 들렸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디를 가나 전각의 건물 대부분이 이렇게 창호지가 찢겨져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문화수준은 기대치 이하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꾸며 꺾인부분에 안사랑과 안방 , 윗방을 배치해
안채 여인들의 생활을 보호한 점이 특이하다. 

사랑과 안채를 연결하는 중문채는 중문 등이 사라져 버려 뭉텅 잘린 느낌이 든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으며, 문쪽으로 1칸의 마루를 놓고 방이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제대로 복원을 하면 양반가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장수황씨 종택. 집안을 돌아보면서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여기저기 부족한 부분이 집의 전체적인 구성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려는지. 못내 아쉬운 종택을 뒤로하면서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문경시에서 59번 도로를 따라 김룡사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라는 마을을 만나게 된다. 고갯길을 넘어서 내려가다가 보니 다리를 건너 삼거리가 나오고, 그 전 좌측에 정자가 서 있다. 주변은 숲이 울창하고 정자의 앞과 옆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지금은 도로가 발달하는 바람에 이 정자의 운치가 감소되었겠지만, 예전에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차에서 내려 내를 건너 정자 가까이 다가갔다. 정자 앞면에 붙인 현판에는 <석문정(石門亭)>이라고 적혀있다.



구곡원림에 서 있는 정자

문경의 구곡원림 가운데 하나인 ‘석문구곡’은 아름다운 경치를 지니고 있는 곳을 말한다. 그 중에서 가장 마지막인 제9곡은 도화동을 뜻하며 석문구곡의 옛 지명은 ‘문경 대도촌 아천 상류’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이 아천 상류가 바로 현재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 일원이라는 것이다.


내를 건너 석문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커다란 석비 한기가 서 있다. <이곡마을 숲>이라고 적힌 석비 앞으로는 맑은 냇물이 소리를 내고 흐르고 있다. 숲과 암벽이 어우러진 냇가는 일품이다. 정자로 올라가니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정자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정자는 비탈진 경사면에 지어 앞쪽으로는 밑기둥을 세워 올려놓았다. 높은 난간을 두르고 두 칸의 방을 마련했다. 방 앞과 옆면에는 누마루를 깔았으며, 팔작지붕으로 멋을 더했다. 정자 안에는 중수기를 비롯해 두어 개의 게판이 걸려있다.


길손 잃은 정자

방은 온돌을 놓을 것을 보니 정자는 사시사철 주인에 의해 이용이 되었을 것이다. 주변 경관으로 보나 정자의 형태로 보나 꽤 세월이 흐른 것 같은데, 아무런 설명을 한 간판이 서 있지 않다. 문경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아보아도 자료가 나오지를 않는다. 결국은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해 이렇게 방치를 한 것이려니 생각하니, 조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시 한수라도 읊었을만한 곳이다. 그런데 주인 잃은 정자 석문정은 찾아드는 길손도 없는 것일까? 정자 한 동을 지으려면 많은 예산이 들어야 하거늘, 이렇게 좋은 풍광에 자리한 정자가 점점 퇴락되어 간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처음 이 정자의 주인은 석문정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을까? 단청도 되지 않은 정자는 그 나름대로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건만, 이제는 시인도 나그네도 찾아들지 않는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은 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는 이러한 정자 하나쯤은 반드시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한 많은 정자와 누각들이 망가져 가고 있는 현실이 마음이 아프다. 오늘 석문정은 그렇게 길손마저 끊긴 채 외로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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