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란 옛 날에 절이 있던 곳을 말한다. 사지에는 많은 문화재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도 있지만. 흔적조차 없이 기록에만 존재하는 곳도 상당히 많다. 지난 5월 20일에 찾아간 사지 두 곳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사지였다. 한 곳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죽전리에 소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67호인 ‘원통사지(圓通寺址)’ 였다.

또 한 곳은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에 소재한, 현재는 전통사찰 제57호인 송계사가 서 있는 ‘송계사지(松溪寺址)’이다. 현재 원통사지에는 원통사라는 절이 서 있으며, 송계사지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해인사의 말사인 송계사가 서 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옛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어 안타깝다.


나라를 구한 의병의 요람 원통사

무주군 안성면 죽전리에 소재한 원통사지. 이 절은 1949년까지만 해도 원통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순사건 때 옛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985년 이후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통사는 신라 대 처음으로 짓고, 조선조 숙종 24년인 1698년에 고쳐지었다고 하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덕유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원통사. 가파른 길을 돌아 오른 절 마당에서 앞을 바라다보면, 덕유산에서 뻗은 산자락이 아름답다. 이 산 중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피를 흘린 것일까? 원통사지는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의병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싸웠다는 의병의 요람이라고 한다.



송계사 여기저기 널린 돌들이 옛 절터임을 알리는 것인지

원통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돌계단을 올라가니, 정면에 원통보전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명부전이 좌측으로는 요사가 있다. 이 세 전각은 모두 정면 세 칸씩이다. 그리고 원통보전 좌측 뒤편으로 한 칸의 산신각이 서 있다. 전각 모두를 다 합해도 열 칸 밖에 안되는 절이다. 옛 흔적은 찾을 길이 없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돌에서 그나마 이곳에 옛 절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과 1907년의 정미칠조약 때, 문태서. 신명선, 김동신 등의 의병장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하는 원통사. 이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다.

송계사에서 바라본 덕유산 자락이 아름답다

원효와 의상이 이룩한 송계사, 세월의 아픔만 남고

무주에서 도계(道界)를 넘어 경남 거창군으로 접어들었다. 덕유산 수리봉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송계사. 절을 올라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돌이 계곡을 덮고 있는데, 맑은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른다. 아마도 이러한 깊은 골에 찾아든 원효와 의상 두 분은, 이 맑은 물소리에 취했는가 보다.

 

송계사를 오르는 길에 만나는 약수터와 영취수를 해체하여 이루었다는 송계사 문각


신라 진덕여왕 6년인 652년에 원효와 의상 두 분의 고승이, 북상면 소정리에 영취사를 창건한 후 5개의 암자를 지었는데 그 중 하나가 송계암이라는 것이다. 그 뒤 영취사가 폐사가 되면서 송계사가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송계사는 조선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5개의 암자가 모두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폐허로 남아있던 송계사는 조선조 숙종 때 진명스님이 송계암을 복원했으나, 6.25 한국전쟁 때 또 다시 전소가 되고 말았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문각에는 종루가 있다. 대웅전은 신축을 한 것이다

계곡 물소리를 뒤로하고 송계사로 올랐다. 기울어진 영취루를 해체하여 복원한 문각이 저만큼 보인다. 문각으로 향하는 흙길 좌우에는 커다란 노송들이 가지를 아래로 처트리고 있다. 약수 한 그릇으로 목을 축인 후 송계사 경내로 들어갔다. 공양주인 듯한 여자분 한 분만 보일뿐 인적이라고는 없다.

안으로 들어가 삼성각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바람에 대나무 잎이 부딪치며 바스락거린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크지 않은 절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내려오다 보니 스님 한분이 나와 계신다. 송계암의 옛 흔적을 물으니 알 길이 없다는 대답이다. 하루에 두 곳의 사지를 돌았지만, 기록에만 전할 뿐,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세월은 그렇게 많은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그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두 곳 모두 마음에 멍울을 남겨놓는다. 그저 눈여겨 볼만한 것들만 돌아본 사지탐방. 어디 한 곳 흔적이라도 있지나 않을까 했지만, 남은 것은 바람소리와 물소리뿐. 가슴 한편이 허해져 온다.

사적 제349호인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고려 전기의 문종 때 지어진 절인 만복사. 『동국여지승람』 권지39, 남원도호부「불우조(佛宇條)」에는, 만복사는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 이 만복사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오층석탑과 석불입상 등 보물이 경내에 있다. 잘 정돈된 사지 중앙 쪽에는 보물 제31호 만복사 석좌가 자리한다. 돌로 만든 이 좌대는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이다.


만복사 사지 내에 있는 보물 제31호 석좌와 만복사지 전경

하나의 돌로 조각한 거대한 작품
 
이 석좌는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고려시대의 석조물에서 흔히 나타나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다.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중대는 낮고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더욱 넓어졌으며, 좌대의 윗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구망은 불상을 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이 되어 아름다운 석좌의 미를 반감시키고 있다. 이 석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으로 조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안상의 안에는 꽃을 장식했으며, 이러한 조각의 형태로 보아 이 석좌는 11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투박한 돌에서 느끼는 따스한 온기

이 돌로만든 좌대 위에는 어떤 부처님을 올렸을까? 만복사지에는 두 곳의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5층과 2층으로 된 전각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면, 그 좌대도 어마어마한 크기였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현재 보물 제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좌는, 2층의 전각 안에 모셨던 부처님의 좌대가 아니었을까 추정을 해본다.

더욱 5층으로 지어진 전각 안에 봉안된 불상은 그 높이가 10m 정도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석좌보다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좌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아름다움이 눈이 부시다. 고려시대의 석조물들이 조금은 투박하고 간결하게 처리를 하는 것에 비해, 이 석좌는 다양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마 통일신라의 유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처를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상면에 낸 구멍

상부는 많이 파손이 되었는데, 그 남은 일부를 살펴보면 꽃을 조각한 듯하다.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 중앙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일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많이 손상이 되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술이 보인다. 석좌 곁에는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그 상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또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닐런지. 남원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 그 중에서 이 석좌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찬 돌이지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가 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