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옛 탑 중에서 벽돌로 쌓은 탑을 ‘전탑’이라고 부른다. 이와는 달리 모전탑이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은 탑을 말한다. 대표적인 모전석탑은 분황사지 9층 석탑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음성군 읍성읍 읍내리 설성공원 경내에 있는, 향토자료전시관 앞에는 오층 모전석탑이 서 있다. 균형 있는 형태로 서 있는 모전석탑,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무엇인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부서진 채로 발견된 모전석탑

 

음성 오층 모전석탑은 본래 음성향교 앞 옛 절터에 무너진 상태로 있었던 것을, 1956년 수봉초등학교 이철세 교장이 학교 안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그 후 1995년 향토 민속자료전시관 앞으로 이전하여 현재의 모습대로 조성한 것이다.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가 있는데, 현재 2층과 5층의 탑신석이 사라졌다. 그리고 상륜부는 모두 사라져 조금은 정형화되지 않은 상태로 서 있다. 탑의 지대석은 4각 2매로 되어 있으나 한편이 훼손되어 있다. 기단은 단층으로 조성이 되어 있으며, 일석의 돌에 각 면에 양우주가 돌출이 되어있다. 갑석에는 부윤이 정연하며, 상면에 각형으로 1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1층 탑신 사면에는 감실을 음각해

 

1층 답신에는 각 면의 중앙에 장방형의 감실을 음각 하였다. 1층 탑신에는 직경 9cm, 깊이 10cm 의 사리공이 있다. 탑의 옥개석은 낙수면이 층단을 이루고 있어, 전탑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다. 이러한 모전석탑을 조성하면서도, 벽돌로 쌓은 전탑모양의 형태로 꾸몄다는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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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 몸돌 위에 올린 옥개석은 2매의 돌로 조성했으며, 옥개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다. 2층 이상의 옥개석은 모두 한 장의 돌로 조성을 했으며, 2층과 3층의 옥개받침은 3단이다. 2층과 3층 낙수면의 층도 3단으로 되어있다. 4층 옥개석은 옥개받침과 낙수면 층은 2단이며, 5층 옥개석은 옥개받침만 2단이다. 이렇게 위로 올라 갈수록 폭이 좁아지면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5층 옥개석의 중심에 찰구공이 있으며 그 위에 상륜부는 멸실되어 있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사라진 석재가 안타까워

 

우리나라에 모전석탑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더욱 전탑의 형태를 석탑으로 모방한 이 음성 5층 모전석탑의 경우에는, 그 형태도 안정감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각 층의 옥개석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있어, 처음 조성을 했을 때는 그 어떤 탑보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석탑이 언제 훼파가 되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이 모전석탑이 존재하던 절이 사라졌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이 모전석탑이 음성향교 앞 절터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일대에 고려시대까지 꽤 웅장한 사찰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아 모전석탑의 일부 부재가 사라진 것도, 그렇게 무너져 내려져 있었을 당시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석조물에 사용했던 부재들이, 어느 시기에 문화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채취가 되고 심지어는 집안의 주추나 축대, 디딤돌 등으로도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205호인 중원고구려비의 경우에도 그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마을입구에서 발견 당시 이 비를 빨래터의 빨래판으로 사용을 하여, 사면에 새겨진 비면이 마모가 심해졌다고 한다. 이 음성 모전석탑도 이와 같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석물의 일부가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낸다는 것은, 어느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깊이 느끼기를 바란다


김제 금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금산사 경내에는 국보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바로 대적광전 앞에 자리한,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이다. 이 다층석탑은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 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쉬움이다.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탑일까를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의 석탑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조성을 한데 비해, 이 탑은 기단은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은 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으로 조성한 다층석탑이다.


육각으로 조성한 탑, 놀라움으로 다가와

화강암이 아닌 점판암을 이용해 탑을 조성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기단부는 또 다른 색을 지닌 돌을 이용해 흑백의 조화를 이끌어 냈다는 것에 대해서도 경이롭기만 하다. 이 탑은 조선조 인조 1년인 1633년 금산사 재건 시에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원래의 층은 알지 못한다. 현재는 11층만이 남아있는데, 그 외형이 육각으로 되어있어 ‘육각다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각 단의 1변의 길이는 아래층부터 각각 80㎝, 70㎝, 65㎝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용과 풀, 사자상 등이 새겨져 있다. 이 위에 점판암으로 된 2개의 판석이 있는데 아래의 판석에는 복연이, 위의 판석에는 앙연이 각 면에 5변씩 양각되어 있다.



현재 11층이 남아있는 탑신부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현재 10층과 11층이 남아있는 몸돌은, 각 귀퉁이마다 기둥모양인 우주를 새겨 넣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을 선각으로 새겨 놓았다. 그 모습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 육각다층석탑의 조형이 얼마나 정성을 들인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상상만으로도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현재 남아있는 옥개석의 처마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보인다. 각층의 끝마다 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 것을 상상하면, 가히 그 아름다움을 어디에도 비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재 꼭대기의 머리장식인 싱륜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훗날 화강암으로 만든 연꽃봉우리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돌이다. 이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남은 옥개석은 각 층의 줄어드는 체감비례가 아름다우며,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1변의 길이가 1층부터 차례로 46㎝, 46㎝, 41.5㎝, 41㎝, 39㎝, 37㎝, 35㎝, 33㎝, 31㎝, 29㎝, 27㎝로 줄어들고 있으며, 현재 몸돌이 남아있는 10층과 11층은 각각 18cm와 17cm이다.

이렇게 줄어들고 있는 비율로 볼 때, 현재의 9층과 10층 사이에 또 다른 층이 있고, 몇 개 층의 옥개석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9층과 10층의 줄어듦의 차이가 급격하기 때문이다. 이 탑은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

벌써 몇 번이고 돌아본 육각다층석탑이다. 5월 28일 찾아 본 다층석탑 앞에서 눈을 감고 상상을 해본다. 사라진 몸돌의 각 면에도 선각으로 조각을 한 좌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층마다 다르게 새겨진 또 다른 형태의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찾아갈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그 원래의 모습이 어떤 형태였는지, 그리고 그 전체적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알 수가 없어, 늘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이렇게나마 남아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그 앞에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는 것은, 아직도 그 아름다움의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 경종 4년인 979년에 조형되었으니, 벌써 천년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경내에 세워진 보물 제152호인 현각선사탑비. 임진왜란 때 몸돌인 비는 파손되고 현재는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남아있다. 고려 전기의 승려인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이다.

사라진 비의 몸돌에는 현각선사의 일대기를 적었는데, 비문은 학사 왕융이 짓고, 장신원이 글을 썼다고 한다. 비는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손상을 입은 것이 풍화로 파손이 되고, 그 뒤에는 구한말에 의병항쟁 때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 등으로 더 손상이 된 것을, 1970년에 떨어진 조각들을 모아 붙여 놓았다고 한다. 천년 세월을 지켜 낸 비가 일제의 만행에 의해서 두 번이나 화를 당한 셈이다.


커다란 몸통의 현각선사 비

우선 현각선사탑비의 받침인 귀부를 보면 그 크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일반적인 귀부보다 상당히 크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여덟 마리의 용이, 앞면과 뒷면에 각 네 마리씩 새겨져 있다. 이 여덟 마리의 용은 구름 속에서 화염에 싸인 여의주를 다투는 것과, 바깥쪽을 향해 있는 것으로 나뉘어 있다.

거북의 몸통은 귀갑문을 등에 새긴 거북이의 형상이다 네 발은 사방으로 뻗쳐 납작하게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는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눈방울이 부리부리하다. 눈썹은 길게 위로 뻗쳐 있으며, 입 주위에는 수염이 길게 자라 목 뒤편까지 뻗어져 끝이 모여 있다. 두 개의 커다란 콧구멍은 금방이라도 강한 바람을 뿜어 낼 듯하다.



받침돌인 귀부의 열굴은 크고 웅장하다. 콧구멍은 바람이라도 나올 듯. 등에는 귀갑문이 새겨져 있는데 일제에 의해 판손이 된 것을 붙인 자국이 보인다.

이수에 조각한 여덟 마리의 용, 뿔이 없어 해괴한 모습

머릿돌인 이수에는 모두 여덟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서로가 여의주를 탐하기 위해 다투는 모습을 하고 있는 가운데의 용들은, 서로가 얽혀있어 힘이 넘치는 모습이다. 발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맹금류의 발을 닮았다. 밖으로 돌출이 된 용들은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었으나, 뿔이 없어 조금은 해괴한 모습이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용들을 표현한 이수는 흔하지가 않다.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몸통 위에 연결부분에는 안상과 귀꽃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빗물이 고이면 물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한 편에 배수구를 내 놓았다. 이렇게 세심하게 조각을 한 현각선사탑비의 비가 몸돌이 사라졌다는 것에 아쉬움이 더한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모두 여덟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밖을 바라보는 용들은 뿔이 없어 해괴한 모습이다. 용의 발은 맹금류의 발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다.

국보 2점과 함께 연곡사의 보물 중 하나인 현각선사의 탑비. 고려 초기에 형성이 된 이 거대한 조각품이 이렇게 몸돌을 잃은 체 서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우리 문화재의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해본다. 전국에 이렇게 비문이 사라진 문화재가 곳곳에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알게 모르게 문화재의 훼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도대체 반성이라고는 할 줄을 모르는 민족이란 생각이다.


 이질감에 의해서 부수어지고, 거기다가 행정당국에 의해서 나 몰라라 식의 훼파까지 이어진다. 언제까지 말로만 떠드는 문화재보호에 문화국가임을 주절거릴 것인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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