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용주사천보루 (龍珠寺天保樓)’.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정조 14년인1790년 정조의 명에 의해서 세운 절이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용주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그 전각의 배치나 규모 등이 다르다. 이것은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찰로사의 모습보다는 궁의 한 면을 옮겨놓은 듯한 형태로 꾸몄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기에 용주사는 절의 입구인 출입문도 일반적인 문이 아닌 삼문으로 조성하였다.

 

 

천보루는 절을 세울 당시인 1790년에 지은 누각으로 규모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천보루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새 날개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이다. 천보루의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의 쾌성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 영은사의 팔정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석조기둥으로 받친 천보루

 

천보루는 좌우에 있는 요사채인 동편의 나유타실과 서편의 만수리실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으며, 2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좌우 요사채 앞의 계단을 통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좌우의 요사채 건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대웅보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보루 아래를 통해야 한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이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용주사가 딴 사찰과는 다른 점이다.

 

이렇게 천보루를 받치고 있는 석주는, 용주사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준다.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회랑과 자연스럽게 연결해

 

천보루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다. 바로 동쪽에 나유타료(那由陀寮)’와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용주사의 창건당시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모습인데, 천보루는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중앙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천보루와 연결이 되어있는 회랑인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의 건물양식을 그대로 받아 조성한 것이다. 특이하게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대웅보전에서 바라보면 차우 김찬균의 글씨로 쓴 '홍제루(弘濟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조의 마음이 담긴 홍제루에서 배워라

 

밖에서 보면 천보루요, 안에서 보면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 진 것이다. 이 누각은 원래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홍제루란 이름을 붙인 것은 바로 정조의 호인 백성을 사랑하는 홍제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호인 홍제는 <논어>에 나오는 士不可以不弘毅에서 따온 것으로, 넓고 큰마음과 굳센 의지를 뜻한다.

 

 

용주사를 다녀온 지는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 새롭게 이 천보루를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세월호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어렵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실종자들을 향해 거북한 소리를 해대는 모자라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천보루를 지나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뭇 낮아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 이 땅의 모든 높은 자리라는데 앉아있는 사람들이 용주사를 찾아 홍제루를 지나면서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깊게 머리를 숙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화성. 그 안에 구조물 중 하나인 각루란 높은 위치에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각루는 비상시에는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에서 성의 안과 밖으로 가장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팔달문에서 남공심돈을 거쳐, 남수문을 지나며 갑자기 위로 솟아오르듯 가팔라지는 성 안에 자리한다. 이곳에 동남각루를 세운 것은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해, 남공심돈과 마주하면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구조물 ‘각루(角樓)

 

화성에는 모두 네 곳에 각루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북수문인 화홍문과 용연을 바라보고 있는 동북각루이다.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하여 화성이 시설물 중 가장 아름답게 지어졌다. 방화수류정은 별도로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아름답다. 또 하나는 용도의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서남각루로, ‘화양루’라고도 부른다.

 

서북각루는 가을 철 화성의 억새를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화서문의 남쪽 145보 정도 거리에 산 위로 성이 휘어져 굽어 오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각루들은 모두 정자와 같은 형태로 지어져, 나름의 풍취를 자랑하고 있다. ‘누(樓)’란 다락처럼 층이 지게 꾸민 것이니, 이름 하나를 지으면서도 세심하게 배려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화성은 단순한 성이 아닌, 정조의 강한 왕권을 상징

 

정조대왕의 효심이야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어린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임을 목격한 정조로서는, 아버지에 대한 효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묘를 정조 13년인 1789년에 양주 배봉산 밑(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경내)에서 이곳 화산(현 화성 융능)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여 효성을 다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이곳에 인근 부자들을 이주해 살게 하고, 친위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외영(壯勇外營)이라는 정예 군대를 배치했다. 당시 장용외영은 실로 막강한 당대 최고의 무사들이었다. 그 무사들이 47,000여명이나 되는 병력이 화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조가 화성에 많은 신경을 쓴 것은, 노론벽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양을 벗어나 강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실제로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많은 정사를 처리하였으며,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대대적으로 행궁에서 펼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또한 능 행차 시에 화성 행궁에서 머물며 과거시험을 치룬 것을 보아도, 정조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다.

 

동남각루에 보이는 정조의 애민(愛民) 정신

 

동남각루는 화성 내에 있는 군사시설물이다. 높은 곳에 세워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이곳에서 지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동남각루와 마주하며 남수문을 보호하던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서 훼파가 된 뒤 복원을 하지 못하였다. 동남각루가 짝을 잃은 채, 복원이 된 남수문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단지 화성의 군사 시설물 중 하나인 동남각루를 보고, 어떻게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아낼 수가 있을까? 동남각루는 중층 누각으로 마련하였다. 정면과 측면 두 칸으로 마련한 동남각루는,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도깨비 그림을 그려 위엄을 더했다. 한편으로 계단을 놓아 위로 오르게 하고, 밑으로는 삼면을 막고 한편에 문을 달아냈다.

 

그리고 서편으로 연도를 뽑아 굴뚝을 내었으며, 동편에는 이궁이가 보인다. 바로 이 동남각루의 아래층에 온돌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사들이 겨울에도 춥지 않게 하기위하여 온돌방을 드린 것이다. 화성이 시설물들을 보면 이렇게 온돌을 놓은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세심한 것 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성의 시설물을 조성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시설물 하나하나를 돌아보는 것은, 그 안에는 단순히 성으로서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심과 강한 왕권을 위한 노력, 그리고 부강한 나라의 건설과 애민정신 등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시설물인 동남각루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된 사적 제206호인 ‘화성 융릉과 건릉’은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소재한다. 융릉은 후에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사도세자)와, 역시 사후에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 능이다. 이 융릉은 합장 능이면서도 혼유석은 하나이다. 후에 의황제로 추존한 장헌세자의 능인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한 능이다.

 

융릉은 조선 후기의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융릉의 병풍석 / 사진자료 문화재청 

 

여러 번 명칭이 바뀐 융릉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의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년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년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년 11월 12일,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 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융릉으로 들어가는 길(위)과 가을빛이 물든 곤신지

 

뛰어난 융릉의 석물과 곤신지

 

지난 11월 10일(토), 융건릉을 찾아 나섰다. 융건릉을 다 돌아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융릉의 석물을 보면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를 기억해 내고 싶어서였다. 입구에서부터 융릉으로 들어가는 숲은 가을이 내려 앉아있었다. 발밑에서는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정겹다. 누군가 가을은 발밑에서 온다고 했던가. 숲을 벗어나면 곤신지가 나타난다. 곤신지는 원형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이 된 연못이다.

 

곤신지는 융릉의 남서방향을 뜻하는 ‘곤신방’에 조성을 한 연못으로, 묘지에서 처음 보인다는 물을 뜻하는 ‘생방’으로, 이곳이 길지이기에 조성을 했다고 한다. 원형의 곤신지에도 가을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융릉으로 향한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 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 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이다.

 

  융릉 전경

 

융릉 앞에 조성한 석인도 사실적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낸다. 효성이 깊은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당대의 최고 석공들을 데려다가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장부터 뒤틀리기 시작한 심사

 

11월 10일의 답사는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로거들과 동행을 한 답사였다. 그런데 곤신지를 지나 융릉의 홍살문 앞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심사가 영 불편하다. 홍살문 옆에는 ‘판위’라고 하는 조형물이 있다. 네모나게 조성을 한 판위는 임금이 능에 제사를 올리려고 찾아왔을 때, 능을 바라보고 절을 하던 곳이다.

 

  판위 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하는 사람

 

판위 앞에는 한 무리의 학생인 듯한 사람들이 서 있다. 문화재를 해설하는 분인지 학생을 인솔하고 온 선생님인지는 모르겠지만, 판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하고 있다. 적어도 남들에게 문화재를 안내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판위 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할 수 있을까? 이 분 제대로 문화재 해설을 할 수 있는 소양은 갖추었는지 궁금하다.

 

 융릉의 정자각과 비각

 

석물 보러 갔다가 숲만 보고 왔지요.

 

정자각을 돌아본 후 비각으로 향했다. 비문 등을 자세히 살펴보고 능으로 올라 석물을 보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능으로 오르는 것을 금지시킨다는 푯말이 붙어있다. 물론 출입통제를 하는 목책 울타리도 쳐놓았다. 어이가 없다. 조선 후기 가장 뛰어나게 조성을 했다는 융릉의 병풍석 등을 보러왔는데, 먼발치에서만 보아야 하다니.

 

그것도 능이 높아 윗부분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뒤틀린 심사가 급기야 울화로 변한다. 물론 문화재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시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능 근처에도 들어가 볼 수가 없게 만들다니. 여주 세종대왕 능에도 관람을 할 수 있는 관람통로를 내놓았다. 그렇다고 문화재가 훼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능이 높아 윗부분 밖에는 보이지 않는 융릉과 블로거들에게 설명을 하는 e수원뉴스 김우영 주간 앞으로 보이는 통제 목책

 

참으로 어이가 없다. 보호란 무조건 사람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만들어야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결국 융릉을 먼발치에서, 능위로 보이는 것만 보고 온 셈이다. 융릉을 보러갔다가 가을이 깊은 숲만 보고 왔다. 바람에 날려 땅을 구르는 낙엽처럼, 씁쓸한 마음만을 안고.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산2-2 등 40필지에 조성이 된,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수원고읍성 (水原古邑城)’은 최초로 조성한 시기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을 다져 쌓은 이 고읍성은 토성으로 조성을 하였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당시도 이곳이 수원부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토성으로 쌓은 수원고읍성

 

수원 고읍성은 본래 낮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아래는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의 넓이는 2∼2.5m이고 높이는 4∼5m, 경사면은 7~8m 정도이다. 이 토성에는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수원고읍성의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32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융릉의 뒤편까지 토성이 뻗어있기 때문에 4k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갖고 있다가, 수원 화성으로 읍치를 옮길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이 축성될 때까지 읍성의 기능을 가져

 

이 수원고읍성은 아래에 활석을 깔고 그 위에 판축을 하거나 적갈색 통양을 두텁게 쌓아서 조성하였다. 현재 토성의 성벽은 도로로 인하여 잘려있으며, 이곳을 마을사람들은 ‘고서문(古西門)’ 또는 ‘고자문(古字門)’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서문 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동북쪽 꼭대기에도 동문 터가 남아있다.

 

11월 10일(토) 오후에 찾아간 수원고읍성. 주변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안내판이 없었다면 읍성인지 아니면 그저 토축이 쌓인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질 않는다. 읍성 내에는 관아와 객사, 군영, 운금루 등의 건물지만 일부 발굴이 되었으며, 다른 건물들은 이미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자리조차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주변 정리부터 해야

 

성내에는 고려시재와 조선조의 기와와 자기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수 백년 동안 수원의 읍성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많은 전각과 군사들이 기거를 하였던 것 때문인 듯하다.

 

경사면을 밟고 올라가는데 쌓인 낙엽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그저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 하나로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외에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선뜻 알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석축 위로 길처럼 조성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옛 읍성의 성벽의 위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무슨 큰 역할을 하였겠느냐고 한다. 하지만 토성은 그 나름대로 지키는 방법이 있었다. 고려 때 쌓은 성이라면 당시의 전쟁을 할 때의 주 무기는 칼과 창, 활 등이다. 만일 적이 이 경사진 면을 기어오른다고 하면, 겨울에는 물을 뿌려 경사면을 얼리고, 여름에는 물을 부어 미끄럽고 발이 빠지도록 한다.

 

낮은 토성이긴 하지만, 이 토성은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을 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구간을 돌아보았지만, 주변이 엉망이다. 기념물이라고 해도 역시 문화재이다. 문화재 주변이 온통 정신이 사납다. 문화재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수원고읍성. 담당부서에서는 주변부터 정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안녕동)에는 사적 제206호인 융능과 건능이 자리한다. 문화재의 공식 명칭은 ‘화성 융능과 건능’이다. 융능은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후에 의황제와 의황후로 책봉되었다)의 능이고, 건능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11월 10일(토), 수원시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인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로거들과 함께 융건능을 찾았다. 미디어 다음에서 주관하는 블로거 팸투어로 찾아간 융건능. 아마도 십 수 년 전 이곳을 들린 후에 꽤나 오랜만에 찾아온 것 같다. 문화재란 늘 돌아보아야 한다고 열을 올리는 인사지만, 그 많은 문화재를 언제 다 돌아볼 것인가? 그저 지나는 길이 있으면 들려보고는 한다.

 

 

융능 재실 안에 숨은 천연기념물

 

융건능 입구에 보면 매표소가 있다. 그 매표소는 재실의 한편 벽에 붙여 조성을 했는데, 매표소 옆으로 작은 협문이 있다. 협문은 매표원들이 출입을 하므로, 늘 열려있어 안을 돌아보기가 수월하다. 그 재실 앞마당에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개비자나무’이다.

 

사람들은 비자나무라고 하면 알지만, 개비자라고 하면 의아해 한다.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나무이다. 개비자는 개비자나무과 개비자나무속에 속하는 약 7종의 교목과 관목을 말한다. 비자나무와 흡사하게 생겼다고 하여서 개비자나무란 명칭이 붙었는데, 얼핏 보면 그 생김새가 비자나무와 흡사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개비자나무

 

우리나라에는 개비자나무(C. koreana) 1종만이 북위 38°선 이남에서 자라고 있는데,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상록교목이다. 개비자나무는 보통 키가 3m 이내로 낮게 자라는데, 융건능 재실 앞마당에 서식하고 있는 이 나무는, 키가 4m에 이르고 줄기 둘레도 80cm에 이른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서식하는 개비자나무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조사가 되었으며, 융릉 재실 조성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존상태도 우수하여 우리나라 개비자나무를 대표하는 가치가 있다고 하며, 또한 융릉 재실과 관련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이유로 2009년 9월 16일자로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이 되었다.

 

 

문화재, 그렇게 관심이 없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돌 한개 풀 한포기도 놓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답사를 나가면 남들이 이렇게 표현을 한다. ‘미친 듯 돌아다닌다!’고. 그 말에 대해 부정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문화재를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시간에 문화재 하나라도 더 보아야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재실 안에 천연기념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곳을 들어가지를 않는다. 조금은 실망스럽다. 늘 우리 문화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을 하는 나이기에, 그래도 천연기념물이 있다고 하는데도 움직이지를 않다니. 어찌 보면 내가 잘못된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 융릉이 조성이 되었으니, 그 당시에 이 개비자나무를 심었다고 하면 벌써 수령이 220년이 넘었다. 그렇게 그 재실 앞뜰을 지키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504호인 개비자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무가 있다는 것을, 재실 안을 들어가 보아야만 알 수가 있다. 밖에다가 그 안에 천연기념물이 있다고 표시 하나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문화재는 그 가치를 계산할 수가 없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와 장인들의 정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지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문화재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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