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1.8개의 글. 참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11일부터 1130일까지 거의 날마다 2개씩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자료를 보거나 TV, 혹은 영화를 보면서 쓴 글이 아니기에 더욱 더 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나 기타 사람들 간의 인터뷰, 혹은 현장에서 취재한 글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라는 것은 절대로 집안에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현장을 나가 문화재를 보고 느껴야만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에 흠뻑 젖어도 보고, 눈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11달 만에 쓴 글이 자그마치 654개나 된다. 남들은 이런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한다. 남들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답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9월 한 달 5kg이 빠졌다.

 

9월 한 달 동안 수원은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렸다. 생태교통 수원2013은 수원시와 ICLEI(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유엔 HABITAT(유엔 인간주거계획) 등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미래 생태교통도시 재현을 통해 기후변화와 연료의 고갈 등에 대한 대응을 위한 새로운 교통부문의 대안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한 달 동안의 차 없는 거리를 몸으로 체험하면서 사람들은 앞으로 미래에 화석연료가 고갈되고 난 후, 우리의 자손들이 어떻게 이 난관을 풀어갈 것인가를 사전에 알아보는 국제적인 프로젝트였다. 9월 한 달 동안 행궁동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살았다. 9월은 연일 살인더위였다.

 

 생태교통 한 달동안 5kg이 줄었다. 80개의 기사를 썼다

 


한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거리에서 한 달간, 하루에도 몇 군데씩을 현장 취재를 하고 다녔다. 한 달간 쓴 기사만 해도 80개가 넘는다. 그동안 살이 무려 5kg이나 빠졌으니, 흘린 땀만 해도 어지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 년간의 활동을 뒤돌아보다

 

201311일부터 1130일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썼지만, 역시 나는 문화재 전문 블로거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러 나가기 전날이면 괜히 마음이 설렜다. 흡사 소풍날을 앞둔 아이처럼.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11개월 동안 답사를 한 날짜를 계산해보니 58일 정도가 된다. 58일 동안 답사로 소요된 경비만도 천여만 원.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길거리에 돈을 뿌렸다고 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발 목까지 눈이 쌓여도 그 핑계로 답사를 멈춘 적은 없다

 


지만 문화재 답사는 나에게는 내 일생을 걸고 하는 나만의 생활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 자료로 만들어 둔다. 언젠가는 그것들을 이용해 좋은 연작 자료집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내 바람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천만 원을 벌어도 시원치 않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 천여만 원을 투자해서 나에게 돌아 온 수입이란 고작 300여만 원이다. 밑져도 한참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투자한 금액보다 수백 배의 가치가 있는 자료들이 방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가 작성한 글의 90%는 모두 현장에서 취재를 한 기사이다


 

앞으로도 내 바람 따라 걷는 길은 영원할 것

 

눈이 온다고 해서 답사를 멈춘 적이 없다. 오히려 눈이 내리고 비가 오는 날은, 또 다른 정취를 풍기는 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늘 나는 스스로를 바람 같은 남자라고 표현을 한다. 그렇게 바람 부는 대로 길을 나서 문화재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일 년 동안 엄청 밑지는 장사를 했지만, 그보다 몇배 깂진 지료를 얻었다


 

우리나라처럼 문화재 관리가 허술한 나라도 없을 것만 같다. 사찰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들은 그나마 관리가 잘 되는 편이지만, 산속이나 들판 등에 자리를 한 문화재들은 언제 누구에게서 훼파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 위에 서 있는 것도 결국 나 하나만이라도 그 문화재를 눈 부릅뜨고 지키겠다는 마음에서이다.

 

2014, 2015, 혹은 그 이후.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다. 다리에 힘이 붙어 있는 한은, 내 문화재 답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서원은 고려 중기의 인물인 충숙공 문극겸 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8월 20일 비가 내리는 날 다녀온 답사에서, 가장 애를 먹고도 제대로 사진조차 찍지 못한 곳이다. 관리인도 없고, 관리사는 텅 비어 금방이라도 무엇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일각문은 새로 보수를 한 듯한데, 배부른 고양이가 뛰쳐나가는 바람에 덩달아 놀랐다. 담장 밖에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서원만 겨우 몇 장 사진을 찍고, 뒤편 사당은 아예 오를지조차 못했다. 비가 왔는데 잡풀이 발목을 넘게 자라, 온통 신발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 소재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인 송호서원. 계단에는 관리를 하지 않아 풀이 가득 자라나 있다.

문무를 겸비한 문극겸 선생

문극겸(1122 ~ 1189) 선생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병, 본관은 남평이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을 한 선생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정언으로 있을 때 의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백선연 등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가, 의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드라마 무인시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문극겸 선생은, 의종이 선생의 상소가 정당한 것임을 알고 복관시킨 뒤 벼슬을 올려주기도 했다. 1170년 정중부 등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명종을 왕위에 앉히고 문신들을 마구 처벌하였는데, 그는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방의 인척인 점으로 무사히 살아났다. 선생은 이의방과 가까운 점을 활용하여 이때 이공승 등 많은 문신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갔는데 서원 앞마당에는 풀이 발목을 덮어 물이 신 안에 가득고였다(위) 문이 잠겨져 있어 담 밖에서 촬영을 하였다.

원래 문신인 선생은 무신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져, 문무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후에는 최세보 등과 함께 고려 『의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의방의 사돈인 선생은,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 이거의 장인이기도 하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7대 외조부이기도 하다.

두 번이나 퇴락한 송호서원,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본다. 원래 송호서원은 1777년에 삼가현 역평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가 되었다가, 1957년에 사우 등이 복원되었다. 그런 송호서원은 합천댐의 공사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이건한 것이다.



일각문과 담장을 새로 보수를 하였다.(위) 그러나 관리동은 비어있고,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깨져 있다. 말벌이 즐비하게 죽어있다. 

두 번이나 새롭게 자리를 튼 송호서원. 계단을 올라 솟을삼문을 촬영하려고 하는데, 마당에는 풀이 가득하다. 계단을 올라가니 문은 굳게 닫혀있다. 비에 젖어가면서 옆으로 돌아가니 관리사인 듯한 집이 있다. 그러나 퇴락한 집은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튀어 나올 것만 같다. 마루에는 말벌집이 떨어져 으깨어져 있다.

죽어있는 말벌들을 보니, 누군가 약으로 말벌을 죽인 듯하다. 이왕 말벌 집을 떼었으면 청소라도 좀 해 놓던지. 질퍽거리는 땅, 그리고 자라난 잡풀들. 송호서원은 그렇게 또 한 번의 퇴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뒤돌아 나오려는데 배부른 고양이 한 마리가 울어댄다. 아마도 갈 곳 없어 이곳에 묵는 녀석이지만, 녀석도 이렇게 퇴락해 가고만 있는 서원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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