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 떠나는 답사 길은 아무래도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든다고 해도 답사를 멈출 수는 없으니, 내친 김에 몇 곳을 둘러보고는 한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에 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남하리 3구 염실마을 뒤편의 남대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찾기가 힘들어

 

도로변에 적혀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의 표지를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입구에만 안내판이 있는 경우에는 온 마을을 샅샅이 뒤져야만 한다. 한 시간 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다가 마을주민들에게 길을 물었다. 우리가 찾는 곳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마애불상군이 있다는 것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차를 놓고 걸어 올라간다. 눈길에 발목까지 빠지고 길도 질척거린다. 그래도 전각이 보이는 곳에 마애불이 있다는 생각에 힘이 드는 것도 모른다. 앞에 전각 안에는 마애불이 있고, 그 옆에는 바위 위에 선 삼층석탑이 보인다. 발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간다. 이렇게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은 늘 가슴이 뛴다. 어떠한 모습으로 나를 반길 것인가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마애불상군에 반하다

 

남하리 사지로 밝혀진 이곳에는 1954년 까지도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절은 폐사가 되어 없어지고 충북 유형문화재 제197호인 마애불상군과, 유형문화재 제141호인 삼층석탑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 바위를 바라보고 좌측에는 크게 부처를 새기고, 우측으로 작은 보살을 입상으로 새겼다. 처음에는 이 마애삼존불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 후 정밀 조사를 하면서 삼존불 좌우로 여래입상과 반가사유상이 밝혀졌다.

 

 

모두 두 덩이의 바위에 새겨진 5구의 마애불. 중앙 정면에 삼존불이 있고, 그 우측으로 돌아서 여래입상 1기가 새겨져있다. 그리고 좌측의 떨어진 바위에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으나, 흐릿해서 구별조차 하기가 어렵다. 중앙 3기의 삼존불은 형태를 알아볼 수 있으나, 좌우에 새긴 반가사유상과 여래입상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당당의 체구로 새겨진 점과 목에 삼도가 생략된 것 등으로 보아서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5기의 마애불상군은 거의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여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바위 위로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전각이 서 있다. 삼존불이 새겨진 뒤로는 작은 통로가 보인다. 통로는 바위를 돌아 나올 수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삼존불과 반가사유상 앞을 보니 누군가 초를 켰던 흔적이 보인다. 많은 초들이 타다 남은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누군가 치성을 드렸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아래는 발을 표현하느라 움푹 양편을 파 놓았다. 전체적인 모습은 당당하다. 늘 여기저기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지만, 보는 것마다 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 증평읍 남하리 사지에서 만난 5기의 마애불상군. 그 당당한 모습이 반갑다. 그리고 눈길에 발을 빠트리며 몇 번인가 미끄러졌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지방 장인의 손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남하리 사지의 마애불상군. 오늘 답사 길에 만난 마애불상군은 천년 지난 세월 그렇게 서 있었다. 그 당당함에 반하다.

마애불을 새기기에 적합하지도 않은 바위. 온통 울퉁불퉁하여 조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 들듯하다. 거기다가 마애불을 조성한 아래로는 가파른 수직에 가까운 비탈이다. 그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그것도 한 두 구가 아닌 30여구에 이르는 마애불을.

경남 유형문화재 제20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은,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 ‘부처덤’이라 불리는 구릉 남쪽의 자연석 암벽에 새겨진 것이다. 현재 약 29구가 남아 있으며, 이들은 울퉁불퉁한 암벽에 4층으로 줄을 지어 새겨놓았다. 1층 14구, 2층 9구, 3층 3구, 4층 3구 등으로 배치되었고 크기는 30㎝ 내외의 소불 형태이다.


뛰어난 조각술, 그 많은 것들을 어느 세월에

소불로 조각된 마애불군은 그 크기가 한자 남짓이다. 대개 연꽃이 새겨진 대좌위에 앉아 있는 소불군은, 선각으로 결가부좌를 한 좌불로 조각을 하였다. 마애불군의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지만, 눈, 코, 입의 마멸이 심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된 듯하다. 전체적으로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정하게 앉은 모습이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가렸는데, 이런 형태는 신라말기와 고려 초에서 보이는 법의의 형태이다. 아마도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마애불이 조성된 시기도,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좌불들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법의의 모습이나 수인 등 세부표현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수인은 다양하여 선정인과 시무외인, 보주를 받쳐 든 손 등, 다양하게 표현을 하고 있다.

놀라운 모습의 마애불상군

비가 오는 날 찾아간 도전리 마애불상군. 8월 13일의 날씨는 한 마디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비가 내리 붓다가도 금방 햇볕에 따갑기도 했으니 말이다. 우산을 받치고 마애불이 자리한 곳으로 갔다. 나무 통로를 조성해, 마애불상군을 보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마애불이 있을만한 바위가 보이지를 않는다.




통로 끝까지 가보니, 이럴 수가 있나. 울퉁불퉁한 바위 암벽에 작은 소불들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도저히 조각을 할 수 없을 듯한, 움푹 파인 곳에도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소불들을 조각을 하였을까? 그것도 조각을 하기에 적합하지도 않은 바위 면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서원불로 보이는 마애불상군

작은 마애불 옆에 글씨들이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김○자’. '○○先生'이란 명문들이다. 이 명분들을 보면 각각 소불 옆에 적어 놓았는데, 이런 글이 과연 처음부터 적힌 것인지가 의아스럽다.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에 조각된 마애불상군이라면 이런 류의 이름이 보인다는 것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마애불상군을 발견한 누군가 이 소불군을 서원불로 삼아 후대에 이름을 음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여기저기 무엇인가 파려고 했던 흔적들도 보이는 듯하다. 전문적인 연구가 더 되어야만할 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 비가 오는데도 그 앞을 떠날 수가 없다. 선각으로 음각한 좌불 하나하나가, 모두 내 발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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