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한 그루가 나에게 주는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한 두 번 본 나무가 아니지만, 그 나무 앞에만 서면 난 늘 작아지고는 한다. 그 나무의 위용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그 나무의 연륜 때문이다. 1100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서 지난 세월의 역사를 보고 있었던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한다. 그만큼 오랜 수령을 지니고 있는 나무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은행나무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라고 한다. 은행나무는 여러 가지 약재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다. 또한 열매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로움을 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나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 최고령의 은행나무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1100년 정도로 추정한다. 나무의 수고는 42m, 밑동의 둘레는 15.2m 정도이다.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는 많은 은행나무 가운데 수령과 수고에 있어서 이 나무를 따를 것이 없다. 또한 줄기 아래에는 커다란 혹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다섯 번째인가 만난 것은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8월이었다. 용문사 진입로 앞에 차를 대놓고 천천히 빗길을 걸어 들어간다. 차로 들어가도 되겠지만, 용문사는 굳이 그럴 생각이 없다. 그저 걷기만 해도 주변 경관이 뛰어나 즐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굳이 차로 가도 될 것 아니냐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 그리 넓지도 않은데 차로 이동을 한다면 죄스럽기 때문이다.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일설에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난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설에 무게를 둔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수많은 전설 가운데는, 고승들이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라나 나무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말은 그리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고승이 지팡이를 꽂았다고 하지만, 그 지팡이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나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것이 나무가 되었다는 설은 조금은 황당하기 때문이다.

 

당상관 품계를 받은 은행나무

 

그밖에도 용문사 은행나무에 대한 설화는 많다. 누군가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며, 1907년에 일어난 정미의병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 은행나무가 소리를 내어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은행나무가 나라에 변고가 일어나면 울었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충남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도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울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우리나라 곳곳에 전하고 있다. 하기야 1000년이란 세월을 한 자리에 지키고 있는 나무들이니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을 수밖에.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 때 정3품 벼슬인 당상관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졌다. 나무가 이렇게 벼슬아치가 된 것은 보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서 있는 정이품 소나무도 있다. 나무도 벼슬을 줄 수 있었던 우리의 선조들. 이런 것만 보아도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정리하면서 올해는 나도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진설명 1. 비오는 날 만난 용문사 은행나무

2. 용문사 경내에서 바라 본 은행나무

3. 은행나무의 밑동

4. 중간 갈래로 뻗은 즐기

5. 가을철 단풍이 든 은행나무(문화재청 사진)

옛 풍습에 ‘매향(埋香)’이란 의식이 있었다. 이 의식은 하늘과 땅의 신을 모시기 위한 의식으로, 향나무를 땅에 묻거나 피우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의식을 행하는 과정과 시기, 그리고 관련된 집단이나 사람들을 기록한 돌을 <매향비>라고 한다. 매향비는 다듬은 돌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커다란 바위에 기록을 해 놓는 형태이다.

 

미륵의 세계를 그린 민초들의 염원

 

매향의식은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향을 땅에 묻는데, 매향 의식은 고려 때도 성행하였으나, 그 후 불교에 대한 억제가 강화되던 조선조 초기에 극락정토로 갈 것을 기원하면서 비를 세우던 비밀 종교행위의 하나이기도 하다. 매향은 주로 민초들이 즐겨했으며, 순수한 민간신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로는 1309년 8월에 세운 고성삼일포 매향비를 비롯하여, 1335년 3월에 세운 정주 매향비, 1387년에 세운 사천 매향비, 1405년에 세운 암태도 매향비, 1427년에 세운 해미 매향비 등이 있다.

 

보물 제614호 사천 매향비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산48 소재한 보물 제614호 사천매향비는 보호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다. 사천 매향비를 답사한 해가 2005년이었으니, 벌써 4년이 훌쩍 지났다. 하기야 벌써 20여 년을 전국을 돌아다녔다. 꽤 오랜 시간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마음은 조급하고, 그 수많은 경비며 시간이 점차 부담스럽다.

 

자연석에 15줄 202자를 썼다. 매향은 민간들이 행한 의식이다

 

그래도 그동안 현장에서 담아 온 것을 정리하여 이렇게 소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퍽이나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사천 매향비는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표면의 굴곡이 심하다. 그저 바라보면 글자를 제대로 판독하기도 어려운 글자가 많은 듯하다. 글자 크기도 각자가 다르고 종횡도 잘 맞지 않아 보기가 힘들다.

 

전체 15줄 202자를 각인한 사천 매향비의 판독된 내용에 보면, 고려 후기 사회가 혼란하던 때에 불교 승려들을 중심으로 4,100여 명이 계를 조직하여, 왕의 만수무강, 나라의 부강, 백성의 평안 등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매향의식을 치렀다는 것을 기록했다. 당시 매향의 주도집단은 주로 보(寶)·결계(結契)·향도(香徒)였다.

 

소중한 민간신앙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있는 문화재로 가치가 높다

 

비문은 승려 달공이 짓고, 수안이 썼으며, 김용이 새긴 것으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세워졌다. 건립목적과 세운 연대가 확실한 비로, 잊혀진 우리의 옛 민속을 알려주고 고려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에 맞는 매향의식이 필요해

 

매향의식을 거행할 때 땅에 묻는 향은 주로 침향이란 희귀약재로 쓰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가의 향을 땅에 묻는다는 것은 그만큼 민초들의 절박한 마음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흔치 않은 문화재인 매향비. 사천 매향비를 답사한 지 오래 전이지만, 지금도 그 매향비 안에 깃든 민초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만 같다. 어차피 민초들이야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자들과 함께는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보물 제614호 사천 매향비

 

갑자기 사천매향비가 생각이 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 너무 절박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굳이 매향의식이 아니라고 해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정작 국민들을 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잔치에 빠져 있는 것이 요즈음의 현실이다. 과연 이네들을 믿고 살아야만 할까?  이제는 이 시대에 ‘매향의식’이 필요한 때일 것이란 생각이다.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1756번지에 소재한 <충주조동리지석묘>.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이 지석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이 되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흔히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러한 고인돌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고인돌이 충주 조동리에 소재하고 있다.


불교와의 접목으로 탑과 같은 형태

충주 조동리의 지석묘는, 조동리 탑평마을 중심부에 위치하며 민가에 둘러싸여 있다. 이 고인돌은 3층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여러 개의 자연석을 고임돌로 사용하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조동리 고인돌은 인근에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조동리 선사시대 생활유적과 인접하고 있어, 중원지방의 청동기시대 생활문화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그런데 이 고인돌이 처음부터 이렇게 3층으로 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이런 형태의 모습은 후에 어떤 계기에 의해서 또 디른 모습으로 변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지방의 고인돌과 달리 덮개돌 위에 평면 타원형의 돌을 올려놓아 3층의 탑과 같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조동리 지적묘.



아랫단의 덮개석은 그 크기가 450×350×100cm의 커다란 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를 굄돌을 이용하고 또 다시 2층을 더 올려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은 본래 고인돌 축조와는 시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불교 전래 이후 탑의 모습을 모방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고인돌과 불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양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희한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워

조동리 지석묘가 언제 이렇게 변형된 모습으로 바뀌었는가는 정확히 시기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마을을 ‘탑골’ 또는 ‘탑평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마을의 이름도 이 고인돌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바둑판식 고인돌로서 3층 구조의 특이한 외부구조를 갖추고 있는 조동리 고인돌.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며, 청동기시대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학술 자료가 되고 있는 이 고인돌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처럼 3층으로 올려쌓은 특이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탑골마을 고인돌. 문화재답사는 이런 재미가 있어, 늘 설레게 만든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습니다. 쪽지가 하나 날아왔습니다. 전화번호가 적혀있어 통화를 했는데, 문화재를 꾸준히 답사하고 글을 쓰다가보니, 불교단체인 태고종에서 발행하는 <원간 불교>에서 1년 ~ 2년 정도 매달 원고를 보내달라는 청탁을 해왔습니다. 그동안 가끔 원고 청탁을 받아 글을 써주기도 하고 가뭄에 콩나 듯 강의를 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년간 문화재에 대한 원고를 써 달라는 부탁은 처음인 듯합니다.

그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그간 문화재를 답사한 자료CD가 3,000장이 넘을 정도이니, 꽤 많은 문화재를 만난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고 늘 이야기를 합니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답사를 하고, 글을 쓸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쓸 것입니다.


끊임없는 답사의 결과란 생각을...

 

내년이나 후년 쯤에는 마애불이나 정자에 관한 책을 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학술적인 책이 아닌, 문화재를 만나서 느끼는 나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내려고 합니다. 글이 제대로 쓰여질지도 걱정입니다. 요즈음은 그저 연습을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적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도 모두 이웃 블로거님들의 덕택이라 생각합니다. 졸필이지만 그래도 찾아와 보아주시고, 따듯한 격려의 말씀을 들려주어, 힘을 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을 함께 기뻐해 주십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늘 함께해서 힘이되고 즐거운 블로거 여러분에게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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