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191931일에 일어난 기미년 3,1만세운동 때, 수원 곳곳에서 한 달간이나 계속되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329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은 건강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기생 33명이 주도를 하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당시 기생들은 교방청 등에 속해있던 예인들이 기생단속령으로 인해 관기 등으로 전락하자, 기생조합을 설립하고 조직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시 중심에 솟아있는 팔달산. 팔달산은 화성이 위치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팔달산은 수원시민은 물론, 전국 각처에서 수원을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다. 이 팔달산에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서 있다. 이 기념탑은 196931일 세운 것으로 40년 세월이 지나면서 풍화에 많은 부분이 훼손이 되어 있다.

 

팔달산 3,1운동 기념탑 정비한다.

 

팔달문에서 화성 성벽을 따라 위로 오르면 서남암문이 나온다. 암문을 통해서 용도로 나갈 수가 있으며, 암문에서 우측방향으로 10m를 가면 3,1운동 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21일 오후 5시 경 수원시장을 위시한 몇 사람이 이곳을 찾았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이 된 기념탑을 새로 정비를 하기 위함이다.

 

이번에 새로 정비가 되는 기념탑은 좌우에 새겨져 있는 부조를 청동으로 교체한다. 기념탑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3,1운동 당시 거기로 나와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우측에는 유토피아를 표현한 부조이다. 또한 탑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상석은 비례가 안 맞아 한편으로 치우쳐 있는데, 이것을 고흥석 재질로 조금 크게 조성한다.

 

 

기념탑 가운데 3,1독립운동 기념탑이라고 쓴 게판도 글씨가 다 지워질 정도로 훼손이 된 것을 새로 제작을 하기로 했다. 또한 기념탑 우측에 마련한 기념탑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구도 브론즈 재질로 선명한 글씨로 교체한다. 탑 주변에 마련한 긴 의자도 샌딩 및 오일 스테인 도장으로 교체한다.

 

중포산에서 옮겨 온 기념탑

 

원래 3,1독립운동 기념탑은 196931일 우리 선열들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쟁한 성업을 빛내고 선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최초로 기념탑을 세운 자리는 일제치하의 수원경찰서 사범계 주임인 노구찌소위의 순국비를 허문 자리에 세운 것이다. 그것을 3,1동지회가 그 해 1015일 팔달산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탑의 뒤편에 보면 196931일 이 탑을 세울 때 이병희가 지은 <삼일독립운동 기념탑비문>이 적혀있다.

191931. 한국 민족의 울분과 감개가 멍울진 독립선언은 반만년 역사를 이어 온 배달겨레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만방에 선양한 바 있으니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원한의 함성은 지축을 뒤흔들고 자유와 그것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민족의 피맺힌 절규는 온 누리에 자유의 횃불을 밝힌 것이다.(중략)

 

나뭇잎 바람결 한 소리에도 영원한 민족의 생명이 천고의 기가 차오리다. 3,1은 민족의 얼이요 피요 구원의 샘터로 가리어지고 가꾸어지리니 정의의 채찍을 들고 길을 밝힌 그 드높은 3,1의 얼은 자유와 평화, 영광과 번영을 향한 줄기찬 민족의 전진 속에 살아서 움직이며 굳건히 다지어 지리다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지금까지도 망언을 일삼고 있는 일본. 그리고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며, 역사마저 왜곡하는 반인륜적인 도덕 불감증인 나라. 이러한 시기에 3,1독립운동 기념탑을 정비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정비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들려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산139에 소재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인 영월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영월군 수주면의 주천강(酒泉江)이 흐르는 곳에 요선정이라는 정자 옆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한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은 요선정 동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높이 3.5m의 여래좌상이다.

 

마애불 옆에 지은 요선정(邀僊亭)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15년에 무릉리에 거주하는 요선계 회원들이 지은 이 정자는, 앞으로는 저 아래 계곡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자 앞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고, 석탑 1기가 있어 이 정자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박진감이 넘치는 마애여래좌상

 

하나의 바위에 부조로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타원형의 얼굴에 양감이 풍부하여 박진감이 넘치고 있다. 법의는 묵직하게 표현을 하였는데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간략한 옷 주름을 선각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두 손은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가슴까지 올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왼손은 오른손과 평행하게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바위에 3.5m나 되는 크기로 돋을새김과 선각으로 처리를 한 마애여래좌상은 주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태로 새겨져 있다. , , 입 등이 큼직하게 표현이 되어, 상당히 힘이 넘치지만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아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진 머리광배와, 두줄의 선으로 표현된 몸 광배를 갖추고 있다. 하체는 지나치게 크게 표현하여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으며, 불상이 앉아 있는 좌대에는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상체의 표현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넘쳐나지만, 지나치게 커진 무릎이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고려시대 영월지방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으로 보인다.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요선정

 

어제시란 임금님의 시를 말한다. 조선조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정자인 요선정.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주천강이 흐르는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있고, 작은 정자에는 요선정이란 현판과 함께, 모성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임금을 그린다는 뜻인가 보다.

 

 

요선정은 조선 19대 숙종임금이 쓴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가치를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은 정자가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요선정에 걸린 어제시는 숙종 임금이 직접 하사한 것이다. 원래는 주천면 서북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淸虛樓)’에 봉안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었다.

그 후 숙종의 어제시 현판을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선계 회원들은 일본인이 숙종대왕의 어제시 현판을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요선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일개 촌부들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나라사랑과 역사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자칫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소중한 어제시 현판이, 수주면에 거주하는 원씨(元氏이씨(李氏곽씨(郭氏)3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에 의해 지켜진 것이다.

충북 괴산군 불정면에 있는 마애불을 찾기 위해 삼방리를 찾았다. 삼층석탑과는 달리 같은 삼방리인데도 그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중간에 마땅한 안내판이 서 있지를 않으면, 문화재를 찾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든다. 삼방리 마애불을 찾을 때도 몇 번이고 이리저리 길을 찾아다녔다.

 

마을에서 안내를 받을 수도 없는 것이 시골이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없지만,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어물어 찾아간 삼방리 마애불. 밑에다가 차를 대고 올라가라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길이 보이기에 그냥 따라갔던 것이 화근이다. 올라가니 길도 없고, 차를 돌릴 만한 곳도 없다. 산길이라 눈은 쌓였는데 후진으로 내려오려니, 가슴이 다 서늘하다. 자칫 조금만 실수만 있어도 계곡으로 처박을 판이니. 

 

바위에 새간 마애여래좌상   

  

엷은 부조로 조각한 마야여래좌상.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엷은 부조로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의 선각수준이다.


삼방리 마애여래좌상은 높이 3.7m, 폭 4.1m, 두께 2.4m 정도의 바위의 한쪽 면에 새긴, 높이 3.5m의 마애여래불이다. 낮은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이 마애불은, 앞에 선 안내판이 없다면 주의 깊게 보아야만 한다. 그냥 지나치면서 이 마애불을 보면 거의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 깊은 산속에 이런 마애불을 새겼을까?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마애불마다 궁금증이 일어난다. 왜 옛 선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 이렇게 산중에 있는 바위만 보면, 마애불을 새기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수도 없이 많은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길도 없고,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는, 이런 깊은 산중 암벽에 새긴 마애불을 보면서 늘 갖는 의문이다.

 

고려시대에 조각을 한 수많은 마애불들을 보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던가를 가늠할 수 있다. 부처를 새길 만한 바위만 보이면 어김없이 새겨진 마애불들. 이렇게 수많은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무엇을 기원했던 것일까? 아마 고구려의 후손들이기에 잃어버린 북녘 땅을 되찾으려는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삼방리마애불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어깨는 당당하게 표현을 하였다.

수인이나 법의는 희미하게 남아있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이 들 정도다.

 낮은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충북지역의 마애불을 보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들이 상당수가 있다. 이 마애불들은 모두가 거대마애불로 조성이 되어있으며, 비교적 간결한 선각으로 처리가 되어있다. 삼방리 마애여래좌상은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왼손은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놓은 독특한 수인을 보이고 있다.

 

신체는 굴곡이 거의 없는 사각형이다. 수인이나 법의는 희미하게 남아있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이 들 정도다. 몇 가닥으로 간략하게 표현한 옷 주름의 선과, 도식적인 꽃잎의 형태에서는 조각기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마애불들의 대체적인 모습들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은 이 지역의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단아한 체구와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는 어딘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어깨는 당당하게 표현을 하였다. 고려 초기 지방의 마애불치고는 수준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얼굴부분은 대체로 양각이라기보다는 선각에 가깝다. 앞에서 보기에는 선각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조금 도드라지게 조각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에는 군의대의 매듭이 보인다.

 

전각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방치가 되어 비바람에 씻긴다면, 이런 형태도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만 같다. 마애불을 뒤로하고 떠나면서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덕분에 얼음판에 미끄러지지는 않았으니 고맙습니다.'라고. 

사람이 살다가 보면 무엇인가에 간절한 바람을 빌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각자가 마음속에 믿는 종교적 대상을 찾아간다. 나도 인간이기에 다를 바가 없는 것이, 힘이 들 때면 무엇인가 마음을 정리할 곳을 찾아 길을 나선다. 그저 문화재를 답사하다 보니 많은 신앙의 대상을 만나게 되고,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마음속 간구를 해보기 위함이다.

 

양평에 있는 정자와 문화재를 답사 중에 전화를 받았다. 아는 분이 갑자기 사망을 했다는 것이다. 지인이라고는 해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분이다. 그저 풍문으로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 늘 친근한 사람인양 착각을 하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한창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다니.

 

 

우리나라 최대의 지장보살입상이 있는 미타사

 

아침에 가방을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찾아가,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다. 마침 멀지 않은 곳인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미타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지장보살입상이 있는 곳이라서 그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절집에서 지장보살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미타사를 오르는 입구에 장엄하게 서 있는 지장보살입상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잠시 마음속으로 간구를 한다. 그저 혼자 가야하는 길이니 부디 편안하시라고. 그리고 다음 세상일랑 아무쪼록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자고.

 

 

갑자기 찾아 온 발가락통증

 

잠시 미타사로 오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비탈길의 좌측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지은 곳이 있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곳이다. 현재 충북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은, 화강암 자연석에 동쪽으로 향하여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전각을 지어놓아 조금은 어두운 듯하지만, 주변을 모두 석축으로 조성을 해 말끔하게 정리를 해 놓았다. 그런데 이 마애불을 찾아 돌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발가락에 심한 통증이 온다. 갑자기 통증이 밀려오니 걸음도 편하게 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아직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이제 슬슬 몸에 ‘늙어간다’는 신호인 듯하다.

 

 

발을 절룩거리며 계단 위로 오르니, 장엄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마애여래입상 앞, 나무로 만든 곳에 털썩 주저 않는다. 발가락에 찾아온 통증은 숨이 막힐 정도다. 답사를 한다고 산길 등을 무리하게 오래 걷다가 보면, 가끔 허벅지 등에 아픔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고려 후기의 마애여래입상을 만나다

 

잠시 앉아 발가락을 주무르며 마애불을 올려다본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은 머리와 어깨 부분을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는 모두 선각으로 처리를 하였다. 양 옆으로는 누군가 돌을 길게 쪼아낸 흔적이 있다. 처음에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생긴 작업의 흔적은 아니다. 후에 누군가 마애불을 더 정확하게 보일 수 있도록, 돌을 긁어낸 듯하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은 소발인 머리에, 상호는 넓적하고 둥근 편이다. 원만하게 표현이 된 얼굴 부분은 눈, 코, 입 등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하게 알아볼 수가 없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전체적으로는 자비로운 얼굴이다. 어깨는 수평으로 돋을새김을 해 당당하다.

 

이 마애여래입상의 수인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미타불 수인의 한 종류인 듯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우견편단으로 조성했다. 양편의 팔에 늘어진 옷자락은 V자를 그리고 있으며, 주름이 사선으로 그려져 있다. 발 부분은 생략이 된 듯하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도식화한 것으로 보아, 이 마애여래입상의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 후반기로 보인다.

 

 

 

그래도 답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마애불 촬영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른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진다. 이왕 나선 길이다. 몇 군데를 더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마애불을 올려다보는 순간, 이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은 왜 이런 산골짜기에 들어와, 그 오랜 시간 바위를 쪼개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장인도 나처럼 누군가의 평안을 위해 이렇게 바위를 쪼개고 다듬어 마애불을 조상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먼 길 떠나는 고인의 마지막 길이 평안하기를 다시 한 번 빌고 뒤돌아선다.

 

 

 

발가락의 통증은 참기가 어려울 정도다. 마침 고인을 모신 곳이 병원이라, 진찰을 받아보았다. 발을 너무 무리하게 많이 사용해 통증이 왔다는 것이다. 약을 복용하고 편히 쉬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이 된다. 답사를 떠나는 길은,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니다. 하지만 그 먼 길을 가는 분도 있기에, 통증이 조금만 갈아 앉는다면, 또 길을 나서리라 마음을 먹는다.

신라 말과 고려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한 기.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지평리 지평초등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좌측 담장 앞에 자리하고 있다. 삼층석탑의 주변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나름대로 이 탑 주변의 조경에 애를 쓴 듯하다. 이 탑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지평의 한 야산에 있었던 것을, 1945년 현 위치로 옮겨 2001년에 복원을 하였다고 한다.

발견 당시 석탑의 부재는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는 탑신석 1개와 옥개석 2개만 남았던 것을 새로이 조성하면서, 이층과 삼층의 탑신석을 새로 만들고, 삼층의 옥개석도 새롭게 조형했다. 맨 위에는 부도의 상륜부로 추정되는 팔각노반석을 놀려 놓았는데, 이 노반석은 이 탑의 것은 아니다.



뛰어난 조각, 대단한 석탑

삼층석탑의 1층 몸돌에는 사면으로 여래상이 부조되어 있다. 여래상은 사면 모두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형태로 앉아있는 좌불상이다. 이 부조로 조각한 불상을 자세히 보면, 그 조각을 한 솜씨가 뛰어남을 알 수 있다. 몸돌 위에 높인 옥개석은 밑을 4단으로, 위로는 2단으로 층을 만들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면서도 날렵하게 표현을 하여, 이 삼층석탑이 제대로 형체가 있었다면 뛰어난 문화재였을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부분을 보아 이 석탑의 원 모습을 그려본다. 아마도 처음 이 석탑을 축조했을 때에는 상당히 뛰어난 석탑이란 생각이다. 석탑을 보면서, 이렇게 제대로 간수가 되지 않은 수많은 문화재들로 인해 마음이 씁쓸해 진다.



사면의 여래상은 부조의 극치

몸돌에 새겨진 사면불은 모두 머리 부분에 두광을 표현하였다. 육계가 뚜렷하고 나발의 머리에 목에는 삼도를 표현했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배 부분에는 모두 띠 매듭으로 처리를 하였다. 수인도 각각 달라 이 탑을 조성할 때, 어떤 염원을 갖고 조성된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탑이 서 있는 방위로 보아, 남쪽면의 여래상은 왼손은 내려 단전 부근에 두었고,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 올렸는데 손에 기물을 지녔다. 서쪽면의 여래상은 남쪽과 수인의 형태는 같지만 기물을 들지 않았다. 북쪽면의 여래상은 왼손은 단전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에 두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별인인 항마촉지인을 표현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이란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앤다는 수인이다. 동쪽면의 여래상은 왼손과 오른손을 모두 들어 가슴께에 두고 있다. 이렇게 사면에 여래불을 조성한 형태나 옥개석의 받침의 모습 등으로 보아,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사라진 우리의 문화재들, 마음 아파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탑의 높이는 2m 70cm 정도이다. 하지만 이 탑에서 보이는 현재의 1층의 몸돌은 기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삼층석탑을 조성하면 기단을 이층으로 쌓아, 이층 기단부에 조각을 하는 것이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의 석탑에서 보이는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 탑에서 사라진 것은 3층의 몸돌 전체와 2개의 옥개석이 없어진 것이다. 우선 기단과 옥개석이 발견이 되었는데, 나머지 몸돌과 옥개석, 노반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 문화재는 일제에 의해 수없이 찬탈을 당했다. 양평지역의 많은 문화재들이 일제에 의해 찬탈이 되었다는 것을, 양평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많은 분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양평의 많은 문화재들이 사라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양평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양평은 강을 이용한 수로의 운송수단이 원활했던 지역이다. 양평의 많은 문화재들을 배로 옮겨 일본으로 가져갔을 것이란 생각이다.

수없이 일제에 의해 찬탈되고 사라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 그 많은 문화재들이 제 자리로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