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99-6에 소재한 양평 용문사. 스령 1200년이 넘은 천연기념물인 용문사 은행나무로 유명한 절이다. 용문사 경내에서 동편으로 약 300m 정도를 가면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 및 비를 만날 수가 있다. 이곳을 찾은 시기가 여름철 비가 내리는 날인 듯하다.

 

이 탑과 비는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작은 물길을 건너야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비는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오직 수행에만 힘을 써

 

정지국사 축원은 고려 말의 고승으로 충숙왕 11년인 1324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장수산 현암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 2년인 135330세에 자초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연경에 들어가 법원사의 지공을 찾아보고, 그에게 법을 이어 받은 혜근, 나옹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뒤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각지로 다니며 수도하다가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귀국하였다. 벼슬이 싫어 몸을 숨기고 수행에만 힘쓰다가 조선조 태조 4년에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다비를 거행할 때 수많은 사리가 나와 정지국사라는 별호를 태조가 내렸다고 전한다.

 

 

단아한 자태의 정지국사 탑

 

탑과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탑은 조안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의 몸돌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 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의 몸돌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사리탑에서 보이는 화려함이 없이 단아한 형태로 조성이 된 정지국사 탑. 아마도 생전 정지국사의 오직 구도에만 애를 쓴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빗길에 찾아 들어간 골짜기에 그저 찾는 이 하나 없이 서 있는 탑을 보면서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다. 요즈음처럼 호의호식하면서 수행자인체 한다는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지국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은 비도 소중한 보물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탑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탑과 비가 일괄로 보물로 지정된 정지국사 탑과 비.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양평 용문사에서 소로 길로 접어들어 탑을 찾아가던 길에 물웅덩이에도 빠지고, 수렁에도 빠져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이랴. 소중한 문화재를 만났다는 기쁨은 그 몇배나 행복인 것을. 아마도 문화재 답사를 그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소재한 사나사. 사나사 경내에는 경기도도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탑과 도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소재한다. 원증국사는 사나사를 중창했던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우(13011382)를 말한다. 보우의 호는 태고이며, 시호는 원증이고, 탑의 이름은 보월승공이다.

 

양평 용문산 계곡을 끼고 자리한 천년고찰인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사나사를 다녀온 지가 오늘로 꼭 한 달이 되었다. 915일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바람도 쏘일 겸 다녀온 사나사이다.

 

 

특이한 형태의 원증국사 석종비

 

원증국사 석종비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대석인 받침돌 윗면에 비를 꽂아둘 네모난 홈을 파서 비몸을 세웠는데, 그 양 옆에 길고 네모난 기둥을 세워 비를 받치고 있다. 위에는 밑이 둥글고 위는 평평한 지붕돌을 얹어 몸체를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1379년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비와 흡사하나 형식이 그보다 간결하다.

 

이 석종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 보우의 제자 달심이 세운 비로, 비문은 정도전이 짓고 재림사의 주지인 선사훤문이 글씨를 썼다. 비 뒷면에는 비를 세울 때 도움을 준 신도들의 명단을 적었다. 비는 머릿돌인 옥개석과 몸돌인 비신, 그리고 받침돌인 비좌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1.67m이며 한국전쟁 때 파손되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비는 여기저기 수난을 당한 흔적이 보인다. 비 몸돌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보기에도 안타깝다. 머릿돌 위에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원하면서 던졌는지, 동전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석종비의 내용만 제대로 판독을 했어도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면, 문화재 하나를 소중하게 보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를 깨닫게 한다.

 

 

소설암에서 입적한 원증국사의 부도탑

 

원증국사 석종비 옆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사나사원증국사탑이 자리한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태고화상 보우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원증국사는 13세에 회암사 광지선사에 의해 출가를 하였고, 고려 충목왕 2년인 1346년에 원으로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 받았다. 충목왕 4년인 1348년에 귀국하여 소설암이라는 암자에서 수도를 하고, 왕사와 국사가 되었으며 이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부도는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석종형태를 띠고 있다. 높직하고 네모진 기단 윗면에는 연꽃을 새겼고, 둥글고 길쭉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꼭대기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솟아 있다. 부도를 세운 시기는 가까이에 서 있는 탑비의 기록에, 고려 우왕 9년인 1383년에 문인 달심이 이 부도와 탑비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잠시 틈을 내어 다녀온 사나사. 그리고 사나사에서 만난 원증국사의 부도탑과 탑비. 간결하고 화려한 장식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서 원증국사의 품성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요즈음 잘 나가는 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 하나 있다.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태고사에 소재한 보물 제611호인 태고사원증국사탑비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다.

 

무자년 봄 귀국하여 미원현의 소설산에 들어가 직접 경작하면서, 4년간 부모를 시양하였다. 임진년 여름 현릉께서 스님을 왕도로 맞이하여 모시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재차 사신을 보내오므로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나아가서 잠시 있다가 그 해 가을 고사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병신년 3월 나라에서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전국의 선사와 강사가 함께 수없이 모였다.’

한 때는 수많은 승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구도자의 글을 모색하며, 사시사철 변하는 구룡령의 모습을 눈 안에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속초에서 옛 속초비행장 앞을 지나 구룡령을 향해서 가다가보면 구룡령 초입 못 미쳐 좌측으로 선림원지 이정표가 보인다.

 

사람들에게는 ‘미천골’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곳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속한다. 미천골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가족들이 휴양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여름과 가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하루를 즐기고는 한다. 미천골에는 선림원이 있던 사지가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 흥성한 선림원

 

선림원지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의 발굴에서 나타난 많은 유물유적들 발견이 된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선림원은 804년경에 순응법사 등이 창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대에는 선림원에서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씻은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하류까지 흘러 미천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선림원이 10세기를 전후해 산사태와 대홍수로 매몰되었다고 추정한다. 요즈음 강원도에 내린 집중호우로 근동이 홍수와 산사태가 나서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것으로 보아도 선림원의 산사태의 매몰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선림원지에는 현재 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4점이 남아있어, 9세기 후반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돋을새김한 팔부중상은 곧 걸어 나올 듯

 

선림원지에서는 1948년에 명문이 적힌 신라 범종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선림원이 얼마나 큰 절이었나는 가늠할 수가 없다. 다만 지금 남아있는 문화재를 보고 유추할 뿐이다. 축대를 쌓은 계단을 오르면 보물 제444호로 지정이 된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법당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2층으로 되어있는 기단은,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2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두기씩 8부중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장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며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5단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화려한 장식을 한 석등, 특별한 미를 지녀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 보물 제445호 석등은 선림원지 안의 서쪽 언덕 위에 놓여있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 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파편이 된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 탑비 귀부 및 이수는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이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의 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와 몸돌, 이수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비머리가 올려져있다. 비문이 새겨지는 몸돌은 파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파편을 본을 삼아 재현된 몸돌이라도 현장에 있었다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귀부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면서 보이는 기법이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몸돌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이수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은 용

 

보물 제447호인 선림원 부도는 일제시대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신라의 전형적인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정사각형으로 조성된 받침돌 위로 기단의 하단, 중단, 상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도는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적인 부도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쌀뜨물이 계곡을 메웠다는 선림원. 그런 이야기로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대웅전의 초석으로는 상상이 가질 않는 이야기다. 이곳을 벗어난 인근 어디에 또 수많은 유물이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맑은 물이 흐르는 미천골 계곡. 도대체 얼마나 쌀을 씻어야 저 계곡을 다 뿌옇게 물들일 수 있을까? 지난 역사 속의 선림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역사는 그렇게 스러져가도, 그 역사의 흔적은 이리 남아있는 것을.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자리하고 있는 옛 절터인 회암사지. 사적 제128호인 회암사지는 요즈음 한창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원래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전에는 회암사지에 수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회암사지에서 보이는 것은 전각들이 서 있던 곳의 축대와 주춧돌, 그리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부도탑 등이다.

2월 25일, 회암사지를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가려고 했던 곳이다. 멀리서 보아도 발굴을 하고 있는 회암사지의 모습은 장관이다. 회암사지에는 보물 제387호 회암사지선각왕사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비, 그리고 회암사지부도탑 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하나 그 이전에 이미 절이 있었다고도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그러나 일설에는 보우선사의 원증국사탑비에 의해, 충숙왕 즉위년인 1313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다고도 추정한다. 회암사는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회암사지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석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옹은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삼산양수지기의 비기(秘記)에서 이곳이 인도 나란타사와 지형이 같으므로, 이곳에 절을 일으키면 불법이 크게 흥한다고 하여 절을 중창했다는 것이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

회암사지는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회암사는, 발굴된 터만 보아도 대가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종 6년인 1424년에 행해진 ‘선교양종(禪敎兩宗)’ 폐합 때의 기록으로도, 그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회암사는 성종 3년인 1472년에는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을 하였으며,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다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탄핵으로 보우는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기옥을 보면 선조 때까지는 간간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만, 1818년 재건한 무학대사비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날 꼭 비워야 하나

발굴을 한다는 안내판에는 2012년까지로 기록이 되어있다. 문화재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고 하여,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으니 대답이 없다. 아마도 일요일이라고 쉬는 모양이다. 그런데 소중한 문화재를 발굴을 한다고 해서, 이전을 한다는 것이 영 미덥지가 않다. 혹 이전을 하면서 훼손이라도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안내판을 보니 절터 위에 전망대가 있고, 그 곳에 가면 문화관광 해설사가 있다고 하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해설사가 있다는 컨테이너는 굳게 닫혀 있다. 요즈음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가족들이 나들이를 하면서 문화재를 둘러보고는 한다. 자녀들과 함께 온 가족인 듯한데, ‘꼭 일요일에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한다.

물론 일요일은 모두가 쉬는 날이기 때문에, 그들보고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딴 지역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주말과 일요일은 근무를 하고 평일에 쉬는 곳이 많다. 관광객들이 찾아들기 때문에, 쉬는 날을 변경해 사람들에게 문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대를 하고 찾아간 회암사지. 결국은 발굴중인 사지에 즐비하게 늘어선 석물만 보고 온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 갖고도 회암사지가 과거 얼마나 대가람이었는가는 충분히 가늠할 수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수밖에.

한 마디로 충격이였습니다. 20여 년간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나름 꽤 많이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주 고달사지에서 만난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탑을 보는 순간, 내 20년간의 답사가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적기 위해 오랫만에 집을 찾아들었습니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늘 시간에 쫒긴 것이 화근이라는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공부를 하고, 더 꼼꼼히 답사를 하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정말 마음을 놓고 문화재를 만나고, 글을 쓸 수 있게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입적한 고승이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3번지 혜목산 고달사지 안에 소재하고 있는 이 탑의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면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으로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종대사탑은 넓은 고달사지 절터 안에 있는 석조 유물들 가운데, 탑비의 귀부, 이수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몸돌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귀꽃을 이중으로 새긴 지붕돌

탑의 맨 위에 있는 상륜부인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약간 위로 향하고 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끝에는 꽃장식인 귀꽃을 큼지막하게 새겨 넣어 아름답게 하였으며, 그 위에도 지붕돌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인 복발 위에 작은 보개와 보주가 놓여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탑신은 4면에는 문 모양을 새겨 넣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구름 위에 올려놓은 사천왕상은 힘이 있게 조각이 되어, 탑 안에 있는 복장물을 지키는 듯하다. 이 탑은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 탑으로 높이는 2.5m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하지만,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화려한 기단부의 조각이 뛰어나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의 지대석 위에 3단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올려놓았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인 앙화가 새겨져 있으며, 중대석에는 용과 구름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 중대석에는 윗부분에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용의 머리를 한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한 조각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들이. 그 사이에 가득 새겨 넣은 구름 속에서 날고 있는 형상이다. 위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조각수법이다.



기단부에 들어있는 귀부, 무지의 극치인 나

그동안 전국을 돌면서 숱한 문화재와 만났다. 그렇게 세월이 한 20여 년이 지났으니, 이제 문화재를 보는 안목도 조금은 높아진 듯도 하다. 스스로도 문화재에 대해 ‘수박 겉핥기’는 조금 지났다고 생각을 했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우리 문화재에 미친 사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렇다는 것에 반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종대사탑을 보면서 조금 이상한 것이 보인다. 한 면에 세 마리의 용머리가 보이는데, 중간에 용머리가 크고 한편으로 돌려져 있다. 벌써 몇 번인가 본 원종대사탑이다. 한 번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만큼 부끄럽다. 그 가운데 목을 비튼 용두는 바로 귀부의 머리였던 것이다.



그 용머리 밑으로는 거북의 등이 조각이 되어있고, 양편으로는 앞발이 힘차게 표현이 되어있다. 한 마디로 놀라움이다. 왜 아직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까? 바로 귀부의 앞부분이 조각이 되어있다. 탑의 뒤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곳에는 귀부의 뒷부분인 꼬리와 귀갑을 선명하게 표현을 해 놓은 것이다. 탑의 기단부에 귀부를 넣어 놓은 것이다.

정말 부끄럽다. 몇 번을 보았으면서도 이런 대단한 조각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니. 그동안 나름대로 문화재를 보면서 조금은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문화재의 구석구석을 다시 살펴야겠다. 20년간의 답사가 이렇게 부끄럽게 무지를 보이다니. 하지만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더 늦지는 않았으니. 첫걸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몇 년을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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