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지방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여러 가지 생활의 지혜가 주거문화에 반영되어 있다. 아무래도 남쪽보다는 한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인시 소재 한국민속촌의 7호 집은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읍 운학리에서 이건을 한 집이다. 한국민속촌의 집들은 대개 전국 각처에서 이건을 했거나, 해체해 옮겨온 후 복원을 한 집들이다.

7호 집은 민속촌 안으로 들어가 초가로 된 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대장간이 보인다. 그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집이 바로 7호 집이다. 이 집은 여러 채의 집을 특이한 형태로 배치를 하였는데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 광채 등이 합해져 ㅁ자 형태로 배치를 하였다. 이는 겨울에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비늘이엉을 엮은 낮은 집

4칸의 대문채는 가운데 출입문을 내고 양편에 광을 드렸다. 대문채에는 마구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문채와 마주하고 있는 안채는 4칸이다. 그런데 이 집의 특징은 처마가 낮고 방이 좁다는 것이다. 또한 기둥과 기둥사이를 좁히고, 전 공간에 온돌을 설치해 실내 난방의 효율을 높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은 비교적 낮게 만들고 이엉의 밑동을 아래로 내린다. 이는 거친 바람에도 지붕의 이엉이 뒤집히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조형한 이엉을 ‘비늘이엉’이라고 하며, 보온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지붕을 낮게 조성을 하거나, 방을 작게 만드는 것은 모두 겨울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함이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에 넓은 부엌을 두고, 연이어 방 3칸을 드렸다. 방을 이어 드리는 것도 모두 난방을 위함이다. 즉 마루방인 대청을 별도로 두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방 앞에도 우리의 전통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루를 놓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겨울에 눈보라가 치면 마루라고 해도 제 기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채와 별채도 특이해

이 7호 집의 건물을 놓은 형태는 특이하다. 많은 건물들을 이리저리 벌려놓았다. 문간채 끝에 - 자 형태로 늘어선 사랑채에는 안채 쪽으로 부엌을 두고, 방을 드린 후 마루를 한 칸 드렸다. 이 마루는 대문채에 가려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마루를 대문채에 가려 놓은 것도 눈보라와 함께 치는 찬 겨울바람을 막기 위함이다.




안채 동편으로는 비스듬히 놓은 별당채가 있다. 방은 세 칸을 달아냈지만, 그 방들이 낮고 좁게 조성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지역의 기후를 이겨내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집들의 구조를 보면서, 추운지방에서 나름대로 그 기후를 이기내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수가 있다. 대문채와 안채 사이에 두 칸으로 조성한 광채 역시, 맞바람을 피하기 위한 건물이다.

여러 채의 건물을 이한 형태로 펼쳐놓아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한 칸으로 된 측간과, 그 옆에 또 한 칸의 광채가 자리한다. 이렇게 특이한 형태로 집안의 여기저기에 벌려 놓은 건물들. 아마도 이런 곳에서도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가 있다. 측간을 사랑채의 담벼락에 가깝게 문을 달아냈다. 이는 용변을 볼 때 바람을 조금이라도 덜 받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화장실을 문이 없는 사랑채의 뒤편에 조성을 해, 냄새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집안의 구성 하나하나가 살아가는데 편리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갈 수조차 없는 평안도의 집이라는 것에도, 이 집은 눈길을 끈다. 이 7호 집은 민속촌에 있는 이북지역의 집 5채 중 한 채이다


낙산사 일주문을 지나 원통보전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돌로 만든 문이 나온다. 이 문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이 홍예문은 전각이 없이 세웠던  것을, 1963년도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전각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아서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조가 조성할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재는 화강암 장대석으로 꾸며졌으며, 2단의 기대석을 놓고 그 위에 두 줄로 조성을 하였다.


아픔을 간직한 낙산사 홍예문

낙산사의 홍예문은 2005년 양양지역에 난 산불로 인해서 홍예문 위에 세운 누각이 소실이 되었다. 화마는 낙산사 일대를 뒤덮어 홍예문은 물론, 원통보전과 종각 등을 모두 한줌 재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TV를 통해 불이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만큼 낙산사는 동해를 바라보며 선 해수관음을 비롯하여 아름답게 자리잡은 절이었다.

이번 양양답사를 하면서 일부러 낙산사를 일정에 집어 넣었다. 숙소도 해돋이도 볼 겸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잡았으나, 정작 아침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날씨 탓에 해돋이는 보질 못하고 낙산사로 향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길에 늘어선 노송숲을 보면서, 더 마음이 아픈 낙산사의 정경이다. 저렇게 울창하던 해송 숲이 거의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홍예문은 26개 고을에서 가져 온 26개의 장대석을 두 줄로 쌓아 올렸다.

다시 조성된 홍예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일주문을 지나 차를 놓고, 조금 걸어올라가니 홍예문이 보인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홍예문이다. 새롭게 조성을 한 홍예문은 마치 새단장을 한 신부처럼 말끔하게 보인다. 천천히 걸어 홍예문 앞으로 다가서니, 문 위에 올린 누각이 보인다. 예전에는 문루 주변을 강돌로 조형을 하였던 것을, 불이 난 후에 다시 복원을 하면서 산돌로 꾸몄다고 한다.

문루는 처음과 같은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문루 앙편에 용의 머리가 돌출이 되어 위엄을 보인다. 홍예문은 두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두 줄로 나란히 올렸다. 장대석을 다듬은 것도 일정한 규격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만든 홍예문은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한다. 아픔이 있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낙산사 홍예문. 


문루는 2005년에 난 산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복구하였다.

사람들은 그 아픔을 알고 있기에 문을 들어서면서 멈칫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런 아름다운 문화재들이 수도없이 소실 된 재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역사의 아픔속에서 그래도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재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낙산사의 홍예문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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