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도. 이 섬에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데 따라 여러 나라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9년인 1018년에는 수주(수원)의 속군이 되었다가, 인주(인천)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지금의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통합됨에 따라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의 명칭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 정착하면서 살면서 고려가 다시 부흥할 것을 신령께 기원하기 위해 국사봉에 올라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영흥도(靈興島)’라 불리게 되었다.

 

 

십리포를 찾아가다

 

영흥도에는 십리포 해수욕장이 있다. 이 십리포 해수욕장을 들어가는 길 좌우에는 소사나무라고 하는 숲이 있다. 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활엽 소교목으로 잎은 달걀형이고 길이 2~5cm 정도이다. 잎의 끝은 뾰족하고 겹 톱니가 있으며 뒷면 맥 위에 털이 많다. 측맥은 10 ~ 12쌍으로 햇가지와 잎자루에 털이 많고 턱잎은 줄모양이다.

 

소사나무는 온대지방으로부터 난대지방에 걸펴 자생하며, 1,000m이하의 해변 산기슭의 암석이 많은 건조한 곳에 자란다. 내한성이 강하여 내륙지방에서 겨울나기가 잘되고 양지에서 생장한다. 한국에는 전남, 충남, 경기, 황해, 강원 등지에 분포한다. 5월에 단성화가 암수한그루에서 피고 열매는 견과로 10월에 익는다. 목재는 가구재나 땔감으로 쓰고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영흥도의 소사나무 숲은 1997년에 산림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이 되었다. 이 숲은 수령 130년 정도의 소사나무가 350본 정도가 자라고 있으며, 나무의 수고는 3~5m에 나무의 둘레는 0.5~1m 정도이다. 이 나무는 해풍을 막기 위해 심었다고 전한다. 해풍을 맞아서인지 이 곳의 소사나무들은 가지가 옆으로 누워서 자라고 있다.

 

물 빠진 갯벌에 아낙네들 노랫소리가

 

평일이라 그런지 십리포 해수욕장 인근이 한산하다. 주차장에도 차가 몇 대밖에 보이지 않는다. 바람까지 불어 썰렁하기만 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소사나무 촬영을 하기 위해 백사장 쪽으로 옮겨가니 물이 빠진 갯벌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열심히 잡고 있다.

 

이곳은 물이 빠지고 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굴도 캐고 조개와 낙지도 잡을 수 있어요. 이 굴이 자연산인에 좀 사가지 그래요

 

 

소사나무 진입로에서 깐 굴을 조금씩 담아놓고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한적한 십리포에 노래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갯벌에서 좋은 것이라도 잡았는지 절로 노래가 나오는가 보다. 하긴 우리민족만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그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노래 한 자락 부를 수 있으니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신발을 벗고 갯벌로 들어가고 싶지만, 답사 일정을 빡빡하게 잡아 놓았으니 어쩌랴. 그저 아낙네의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수밖에. 한 겨울에 만나는 잎이 없는 소사나무의 가지들이, 무슨 옛 이야기라도 해줄 듯 신비롭다. 답사를 하러 다니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그런 재미들이.


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는 양편으로 내가 싸고 흐르는 숲이 있다. 이 숲을 ‘갈계숲’이라고 하는데, 원래의 이름은 은사의 정원을 이르는 ‘임정(林亭)’이라고 한다. 거창의 절경 중 제3경에 해당하는 갈계숲은 수고 22m 정도의 2~3백년이 된 소나무와 물오리나무, 느티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거창군의 천연보호림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숲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동서로 나뉘어져 흐르고 있어 마치 섬과도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조선조 명종 때 유현 석천 임득번과 그의 아들 효간공 갈천 임헌 등 삼형제와 문인들이 이 숲에 들어와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가선숲’안에 ‘가선정’이라니

이 숲 안에는 갈천 임헌의 호를 따서 지은 가선정이 있어 ‘가선림’이라고도 부르며, 청학교를 놓은 뒤에는 ‘청학림’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마을 이름을 따서 ‘치내숲’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는 갈계숲으로 통칭하고 있다.

다리를 건너 숲 안으로 들어가면 몇 채의 전각이 보인다. 그 중 가장 고풍스런 전각이 바로 가선정이다. 가선정은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중층 누각으로 지어졌다. 갈천 임훈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이 갈계숲은 갈천 임훈 선생이 태어나 자라고 묻힌 곳이기도 하다.




고풍스런 가선정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확실치가 않다. 주변에는 조선 명종 때 육현신의 한 사람으로, 광주목사를 지낸 갈천 임훈이 후학 양성을 위하여 그의 아우 임운과 함께 1573년에 건립한 갈천서당이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가선정도 그 당시나 1878년 후손들이 각천서당을 중건할 때 짓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누각에 오르니 절경이로다

가선정 위로 올라본다. 여기저기 글을 적은 게판들이 걸려있다. 그리고 천정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바둑을 두는 신선들과 한 편에는 다구 등이 보이다. 학도 몇 마리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이 갈계숲의 가선정이 이들에게는 바로 신선의 세계였으리라는 생각이다.




중층으로 된 가선정은 자연석 주초에 치목을 하지 않은 목재를 사용해 기둥을 삼았다. 자연의 형태를 무너트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들이 있어, 이렇게 무성한 갈계숲이 남아있을 것이다. 나무계단을 밟고 누각위로 오르면, 난간을 사방에 두른 누마루 끝편으로 활주가 걸려있다.

누가 이런 곳에서 살고 싶지 않겠는가? 갈천 선생 당시나 지금이나 자연을 좋아하고 그것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가선정이나 갈계숲보다 적합한 곳은 없을 것이다. 심호흡을 해본다. 숲의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빨려드는 듯하다. 도심에서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진다. 아마도 이런 즐거움이 있어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오늘 가선정 누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옛 문인들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이 갈계숲에서 시간을 버려두고 싶다. 5월 20일의 늦은 오후, 길을 재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 이곳에서 자리를 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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