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인구는 현재 123만 명입니다. 기초지자체 중에는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죠. 수원에는 모두 22개소의 전통시장이 있습니다. 이 전통시장들은 수원시 지역경제과에서 관리를 하고 있으며, 전통시장의 모든 일은 수원시상인연합회에서 일괄적으로 의논하여 모든 사업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5일 오전 11. 충청남도 보령시의회 의원과 보령시의회 직원, 보령시 직원 등이 수원 팔달문시장 벤치마킹에 나섰다. 이들 보령시의원들은 남문고객센터를 찾아와 팔달문시장 조정호 상인회장에게 수원의 전통시장과 남문시장, 그리고 팔달문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조정호 상인회장은 팔달문 시장 상인회를 맡은 지 16년이 지났다면서, 수원의 전통시장은 경기도와 수원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렇게 활성화가 되었다고 말했다.

 

보령시의회 한동인 부의장을 비롯해 시의원들은 조정호 상인회장의 설명을 들은 후 궁금한 사항들을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보령시 의원들은 123만 명의 시민이 거주하는 수원시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인구 103천여 명의 보령시와는 모든 것이 차원이 다르다면서 전통시장에 대한 궁금증을 질문했다.

 

 

청년상인들과 각 시장 상인회에 대한 궁금증 질문

 

조정호 회장은 수원의 전통시장들은 단합이 잘됩니다.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이 지역에 들어오려면 상생자금을 전통시장에 주어야하는데, 지방 전통시장들은 고작 몇 억을 받는 것으로 해결합니다. 하지만 수원은 차원이 다릅니다. 지역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올 때도 전체 상인들이 모두 힘을 합해 그만한 상생자금을 받아냈고요라고 설명했다.

 

조정호 회장은 수원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올 때 각 시장들이 얼마나 손해를 보게 되는지 그런 자료를 충분히 준비해 대형쇼핑몰 등에게 제출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모든 전통시장을 주식회사로 만들고 회계사 등을 고용해 체계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손해를 적게보는 편으로 상생자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그 돈도 상인회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고용된 회계사들이 처리했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보령시의회 의원 한 사람은 보령시의 경우 대형마트가 들어와도 보령시에 주소를 둔 것이 아니고 인근 부여시 등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 설명한 후 수원시 상인들이 그렇게 체계적으로 대기업과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수원시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보령시의회 의원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한 것은 청년상인들이 운영하는 푸드트레일러였다. 어느 지자체나 청년실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에 청년상인들에 대한 문제는 더 많은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조정호 회장은 수원시 청년상인들이 운영하는 푸드트레일러는 경기도의 전폭적인 지원과 상인회의 자부담으로 마련했다면서 남문 한개 시장이 푸드트레일러를 두 대씩 소유하고 있다. 처음에 창년상인들을 모집할 때 레시피 등을 검토한 후 배정했지만 시행착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정호 회장은 지금 이곳을 방문한 보령시의회 의원님들 연세가 되면 살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겠지만 청년들은 다르다면서 요즘 젊은 청년들은 힘든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푸드트레일러 운영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정호 회장은 앞으로 그런 실패를 감안해 제대로 된 청년상인들의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남문방송센터 등도 돌아봐

 

수원전통시장, 남문시장, 팔달문시장 등과 청년상인들의 푸드트레일러 등에 대한 질문을 한 후 보령시의회 의원들과 관계자들은 조정호 상인회장의 안내로 남문고객센터 3층에 소재한 수원남문방센터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조정호 회장은 전국의 전통시장 중에서 생방송 200회 특집을 여는 것은 수원남문방송이 최초리고 설명한 후 방송 스튜디오를 꼼꼼하게 돌아보라고 권유했다.

 

방송국을 돌아본 보령시의회 의원 일행은 남문방송센터 밖에서 보이는 남문시장을 바라보면서 원도심에 이렇게 큰 전통시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또한 고객센터 옥상에서 보이는 수원화성을 연신촬영하면서 수원시는 전통시장과 세계문화유산 등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도시라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에 소재한 성주사지. 이곳 금당 터로 추측되는 뒤편에 자리한 3기의 석탑 중 중앙에 위치한 보물 제20호인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 석탑’.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인 몸돌을 올리고 있다.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사세를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단아한 형태로 서 있는 3층 석탑

 

중앙 3층 석탑의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양 우주와 중앙 탱주를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 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 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이 문짝 모양 안에는 자물쇠 모양을 가운데에 조각을 하고,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다. 나머지 공간을 못의 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훼손은 되었어도 기품은 그대로

 

1층 탑 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의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10월 초에 성주사지를 다녀왔으니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이렇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급할 것이 없는 것은,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느긋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10월 초라고는 해도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어 쌀쌀한 날씨에 찾아간 상주사지.

 

신라는 3국을 통일하고 난 뒤 강력한 국가를 상징하기 위해, 통일신라 초기에는 튼튼하고 높은 이층 기단을 가진 3층 석탑을 세웠다.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로 가면서 3층 석탑의 규모는 점차로 작아지는 느낌이다. 이 성주사지 중앙 3층 석탑은 규모는 좀 작아지기는 했어도, 이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탑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기품이 엿보이는 탑이다. 한 마디로 신라의 강력한 국권을 상징하려는 듯, 짜임새가 돋보이는 탑이다. 반려암으로 조성한 3층 석탑은 높이는 410cm이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갈 때마다 한숨만 내 쉬는 성주사지

 

몸돌의 위에 올려진 지붕돌은 끝이 날카롭게 표현을 하였다. 3층 석탑은 부도탑으로도 추정이 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정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 하나로 적혀졌다. 이 성주사지 중앙 3층 석탑은 이곳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고, 딴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성주사지, 국보와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하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찰 터. 성주사지를 찾으면 늘 마음이 아프다. 한 때는 백제의 사찰로써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던 오합사가, 백제가 신라에 망하고 난 뒤 통일신라의 강력한 국권을 상징하기 위한 절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벌써 성주사지를 5회 이상을 찾아가 보았지만, 갈 때마다 이곳은 사람들의 인적이 없었다. 그것은 대천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보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 성주사지를 찾아오는 발길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극히 저조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을 갈 때마다 깊은 한숨만 나온다.

 

지금은 한가한 포구의 모습만 보이고 있다. 이곳이 예전에는 수군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한 때는 충청도 수군의 총 사령부가 있었다는 곳. 충청수영성은 경관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천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충청수영성. 벌써 몇 번째 찾아온 충청수영성.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 일대에 소재한 사적 제501호인 보령 충청수영성을 찾은 것은 106일이다.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인 1896년에 폐영이 되었다. 충청수영성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 142척에 수군 수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몰 즈음에 만난 오천항의 장관

 

10월의 해는 짧다. 더구나 잔뜩 흐린날이라 그런지 오후 5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어둑하다. 차를 달려 찾아간 보령시 오천면 충청수영성. 지금은 아치로 조성한 서문의 석문과 진휼청만이 남아있다. 서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바닷가로 삐죽 얼굴을 내민 성벽 위에 진휼청이 서 있다.

 

진휼청은 흉년이 들면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했던 곳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진휼청은 충청수영이 폐지된 후 민가로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을 하고 있다. 진휼청은 정면 5, 측면 2칸의 집이다. 진휼청은 그리 크지 않은 집으로 대청과 부엌, 온돌방, 툇마루 등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진휼청을 돌아본 후 성벽 위에 올라서 오천항을 내려다본다. 저 오천항에 수많은 어선들이 묶여있는 곳에, 예전에는 모두 군선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충청수영은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의 침탈을 방지했다고 한다.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는 충청수영성. 해질녘 내려다보는 오천항은 숨을 죽인 듯 고요하기만 하다.

 

충청지역 해로의 요충지 충청수영성

 

선조 29년인 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인 15977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충청수영은 서해안을 지켜내는 요충지였지만, 많은 아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다. 서해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는 성내의 정자인 영보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전한다. 서문 밖의 갈마진두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성을 한 바퀴 돌아보다.

 

해가 설핏하다. 서둘러 성벽 위를 걸어 한 바퀴 돌아본다. 근래 들어 도로개설이나 해변의 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872년에 그려진 충청수영성의 고지도에 보면 세 곳의 성문을 비롯해. 한 곳의 서소문과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

 

 

현재는 객사와 내삼문이 남아있지만, 한때는 충청도 수군 전체를 관리하던 성이다.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인 충청수영성은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 요해처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인 성지이다. 귀중한 유적인 충청수영성의 영보정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서해. 잔뜩 검게 낀 구름으로 인해 서해로 떨어지는 일몰의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서울에 자료조사를 할 일이 있어 이틀간이나 서울을 오가다가 보니, 문화재답사를 떠나기로 한 예정시간을 지나버렸다. 바쁘게 여장을 차리고 떠난 답사길.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하지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하다. 고속도로를 달려 찾아간 충남 보령시. 사람들은 보령이라고 하기보다는, 대천이라고 말을 해야 더 빨리 알아듣는다.

 

보령시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사적인 성주사지에는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다수의 지방 문화재가 있다. 성주사지에서 가까운 곳에는 석탄박물관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하루 만에 돌아본 문화재와 유적만 해도 상당하다. 고성(固城) 세 곳에, 석조물과 사찰, 고택과 문화재로 지정된 노송, 그리고 도미부인의 사당 등을 돌아보았다.

 

 

문화재답사, 쉽지 않은 일이다.

 

문화재답사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만 한다. 어디를 돌아볼 것인지, 또 동선을 어떻게 잡아야 가장 빠른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 문화재를 만나면 무엇을 중심으로 촬영을 한 것인지 등을 세세하게 파악을 해두어야 한다.

 

또한 문화재 답사를 할 때는 가급적이면 한 지역을 중점적으로 답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지역을 답사를 하려고 생각을 했다면, 그 지자체를 먼저 찾아간 자료(문화재 장소와 지도 등)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료를 기본으로 동선을 정해 답사를 시작해야 한다.

 

 

답사를 할 때는 어느 것 하나 빠트려서는 안된다. 답사지역을 들어가 문화재를 만나면 가장 먼저 볼 것은 바로 안내판이다. 그 안내판에는 문화재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기 때문에, 어떻게 접근을 할 것인가를 사전에 파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문화재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촬영을 해두어야만 한다.

 

문화재 답사의 또 다른 즐거움

 

문화재 답사를 할 때 가급적이면 국도를 이용한다, 대개 문화재는 국도나 지방도 변에 이정표가 걸려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처음에 예정하지 않았던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다. 그럴 때의 기분이란 바로 보물 하나를 얻은 듯하다. 답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설명만으로 그 기분을 느낀다는 것은 어렵다.

   

 

문화재 답사의 즐거움이란 것이 어디 그것뿐인가? 처음으로 접하는 문화재에서 느끼는 수많은 상념들. 수천 년을 그 자리에서서 역사를 지켜 본 문화재와의 말 없는 대화. 그것은 오래도록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나만의 버릇이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가 보면, 문화재의 깊은 내면 속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문화재를 오래도록 답사를 하다가 보면, 남들은 찾을 수 없는 것들을 찾아 낼 수가 있다. 학술적인 것이 아닌, 그 문화재에 얽힌 전설 등 이야기이다. 그런 이야기는 주변 마을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낸다는 즐거움. 그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비록 바쁜 일정으로 인해 힘들게 돌아본 답사 길이었으나, 그 안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수많은 역사속의 진실. 이런 것을 찾아다니는 것이 문화재 답사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문화재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더 가까이 다가가 많은 이야기를 할 때라야, 그 자리를 굳에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표현기법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인해 그 형체조차 식별이 어려운 까닭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괜히 마음 한편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충남 보령시 내항동 767-10에 소재한 충남 문화재자료 제317호인 ‘대천 왕대사 마애불’은 그렇게 바위 암벽에 오랜 시간 서 있었다.


바위 암벽에 음각을 한 왕대사 마애불은 조성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왕대사가 있는 산을 ‘왕대산’이라고 부르는데,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절의 이름도 ‘왕대사’라 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미륵정토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더운 날씨에 답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땀도 땀이지만 걸음걸음이 천군만근이기 때문이다. 미쳐 물이라도 준비하지 못하면, 이것은 답사가 아닌 극기훈련에 속한다. 그 정도로 한 여름철의 답사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왕대사 마애불은 왕대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 바위에 조성하였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 형체조차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저 단순하게 절집을 찾았다고 하면, 마애불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바위에 새겨진 거대마애불이 속하는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선각으로 조성한 왕대사 마애불


왕대사 마애불은 선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커다란 바위암벽의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전체에 차게 조성을 하였는데, 안면의 윤곽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미륵불로 조성을 한 이 왕대사 마애불은 법의의 형태와 몸의 뒤에 새겨진 신광 등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용화세상의 기원하는 민초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미륵불로 알려진 왕대사 마애불. 나발과 두광, 상호 등은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목에는 희미하지만 투박하게 표현한 삼도가 보이고, 광배는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배로 보인다.


이 왕대사 마애불은 경순왕과의 관계로 인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거대마애불인 점 등으로 볼 때, 오히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대사 경내에서 한 숨을 돌리다.


 

 

마애불을 돌아보고 난 뒤, 왕대사 경내를 찬찬히 돌아본다.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 날 대웅전에 들어가 참례라도 한다면, 대웅전 마루에 땀방울로 흥건히 젖을 듯하다. 그저 어간문 앞에서 잠시 목례를 하고, 낮은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앞을 바라본다.


잘 조성이 된 논에는 한 여름의 열기에도 벼들이 파랗게 자라있다. 아마도 저 논에도 부지런한 농부들의 땀이 물이 되어 흘렸을 것이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땀을 식힌다. 그저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남들은 피서를 간다고 난리들인데, 어쩌자고 이 무더위에 답사를 하는 것인지. 그것도 팔자려니 하면, 무엇이 더 행복할 것인가? 바람 길을 따라 또 길을 나서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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