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괴신읍 검승리에 가면 ‘애한정(愛閑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정자는, 박지겸(1549~1623)이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지은 정자 겸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인 박지겸은 본관은 함양으로 자는 익경, 호는 애한정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모시기도 했으나,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애한정이라 하였다. 애한정은 그 뒤 원 정자 뒤에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

 

 

몇 차례 중수를 한 애한정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옮겨지었고, 숙종 38년인 1712년과 44년인 1716년에 중수를 하였다. 그 후 1979년에 크게 보수를 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애한정은 새롭게 축조한 현재의 애한정 앞에, 예전의 애한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애한정을 오르려는데 앞에 작은 전각 하나가 풀숲에 가려져 있다. 계단은 있으나 풀들이 자라 가리고 있다.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고종 28년인 1891년에 건립한 박상진의 효자문이다. 박상진은 애한정을 창건한 박지겸의 9대손이다. 낙향한 선비가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 테니, 그 9대손인 박상진 또한 생활이 궁핍했는가 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박상진은 품을 팔아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부친이 술을 즐겨했으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계속 술을 드실 수 있도록 하였단다.

 

 

피를 내어 부친을 간구한 효자 박상진

 

후에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부친의 병 구환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을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피눈물로써 3년 상을 마쳤으며, 그의 나이 85세에 이르렀어도 부모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심을 충청도 선비들이 예조에 보고하자, 나라에서는 그의 효행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동몽교관조봉대부>란 벼슬을 추증하고, 효자 정문을 세웠다. 애한정을 오르다 보면 계단 우측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녹음을 자랑한다. 위로 오르면 담장에 둘러싸인 원래의 애한정이 있다. 보수를 하여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뒤편에는 현재 애한정의 현판을 단 정자가 있는데, 아마 이곳에 걸렸던 현판을 옮겨간 듯하다. 원 애한정과 옮겨지은 애한정을 잘 보존해 놓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애한정이 역사 속에서 변화한 형태를 알 수가 있다. 바람직한 문화재의 보존이란 생각이 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던가? 오늘 갑자기 애한정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홀연히 마음을 비우고 낙향을 하여,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 등을 쓴 박지겸과, 부친의 병환을 고치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낸 효자 박상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다.

 

없는 살림 가운데서도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애한정의 주인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요즈음 세태가 하도 어이없게 돌아가서인가 보다. 어린 생명을 다치게 하는가 하면, 나라 살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돈 버는 일에 눈이 벌게,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신의 배만 채우겠다는 생각들로 온통 나라가 검어지는 듯해서다.

 

대선이 2일 남았다. 대선 도전하는 사람들, 우선 이곳부터 가서 마음을 내려 놓고 오기를 바란다. 그 자신들이 과연 이 애한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이 가서도 깨닫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미 이 나라의 국민을 이끌고 갈 아무런 자질도 없다는 것일게다. 요즈음에는 윗물은 맑아도 아랫물이 똥물일 때가 비일비재한데, 윗물까지 맑지 않다면 그 아랫물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작은 시골 정자 하나가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오늘 이곳 애한정을 가슴속에 담는 것도, 나리들께서 꼭 이 시골의 작은 정자 애한정과 효자문을 찾아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괴산의 애한정은 정자 중에서도 그 의미나 경계가 남다른 곳이다. 괴강 삼거리 가까이 있는 애한정은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앞으로는 괴강이 흐르고 있다.

 

애한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호위를 하여 그 공으로 별좌에 올랐다가, 광해군 때 낙향한 박지겸이 광해군 6년인 1614에 지은 정자 겸 아이들을 가르치던 학당이다. 원래의 애한정은 현재의 애한정 앞에 서 있다.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는 애한정

 

애한정으로 오르다가 보면 현 애한정 앞에 흙 담으로 둘러 친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의집이 있다. 앞으로는 느티나무 보호수들이 둘러친 이 전각이 바로 박지겸이 처음에 지은 애한정이다. 이 구 애한정은 지금은 퇴락하여 여기저기 담에 흙이 떨어져 있다. 애한정을 바라보고 좌측 한 칸은 마루를 만들고, 우측 두 칸은 방을 드렸는데, 툇마루와 대청마루를 연결해 전체를 놓았다.

 


예전 처음으로 지었던 애한정. 주변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빼어난 풍취를 자랑하고 있다.

 

위로 오르면 솟을대문이 있는 애한정이 보인다. 솟을대문 앞에는 처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솟을대문과 어우러진다. 솟을대문은 양반가의 대문처럼 우측에 쪽문을 내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이면서도 하나의 독립된 가옥으로서의 구조를 하고 있는 애한정, 아마 학동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구조로 정자를 꾸민 것 같다. 솟을대문은 좌측에는 방을 드려 놓았다.  

 

이 새로운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박지겸의 손자인 박연준이 군수 황세구의 도움을 받아 새로 짓고, 그 후 숙종 38년인 1712년, 숙종 44년인 1718년, 영조 51년인 1775년에 중수를 하였다. 최근에는 1979년에 중수하였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꾸몄다.

 


양반가의 집들처럼 솟을대문 우측에 쪽문을 내었다.

 

 
후일 새롭게 조성을 한 애한정. 정면 6칸으로 꾸며진 애한정은 뒤편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있다.

 

팔각의 주춧돌을 사용한 정자

 

정자에는 애한정(愛閑亭)이라는 현판이 대청 우측으로 걸려있고, 안에는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박지겸이 지은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등 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애한정이창기'와 '제애한정기첩후'이다. 그리고 몇 개의 편액이 더 걸려있다.

 

정면 6칸으로 된 애한정은 정자를 바라보면서 좌측의 한 칸은 누정 형태로 높게 꾸몄다. 그리고 앞을 문양으로 내어 마감을 했으며, 방안으로 들어가면 다락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중앙에는 두 칸 대청이 있으며, 우측의 두 칸도 방으로 꾸몄다. 중앙 대청의 앞 창호는 모두 올려서 위로 걸어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애한정의 대청에는 박지겸, 송시열 등이 쓴 글의 편액이 걸려있다.


누정과 같은 형태로 만든 끝방은 대청 옆방에서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애한정의 특징은 주춧돌이다. 특이한 형태로 주춧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일석을 이용해 맡에는 사각형으로 조성하고, 그 위를 깎아내어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양편 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대청과 연결을 하였다.

 


팔각으로 조형된 주축돌. 일석을 이용해 아래는 네모나게 다듬고, 위를 팔각으로 다듬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애한정

 

애한정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괴강이 흐르고 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이 정자 앞으로는 다리를 놓기 위해, 몇 년째 교각 공사를 하고 있다. 정자의 뒤편으로 돌아가니 아직 체 녹지 않은 고드름이 처마 끝에 달려있다. 소나무 숲에서 나는 솔향이 싱그럽다.

 

애한정을 내려 괴강 쪽으로 걸어본다. 주변에 여러 가지 소중한 것들이 모여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백의로 선조 어가를 모시고 그 어려운 길을 다녀 온 박지겸. 아마 그 마음이 닮아 저렇게 높이 하늘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괴강 위로 놓인 다리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시끄럽다. 역사는 그렇게 주변 환경을 바꾸고, 사람들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것인지. 바람 한 점이 몸을 감싸고 계곡으로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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