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척 좋아서

밝은 빛의 이 밤이 기이하네

강에 비추어 물결이 움직이고

메뿌리에 닿으니 그림자가 들쑥날쑥하네

터럭이 희니 더럽힘이 없음을 알겠고

마음이 참되려면 속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네

나그네의 넋은 늙을수록 느끼기 쉬우니

시 읊고 휘파람 부는 것이 스스로 많을 때이네

 

용인시 기흥읍 지곡동에 있는 음애 이자 고택의 담 밖에 세운 문학비에 적힌 시다. <추월(秋月)>이라는 이 시는 민족문화추진위원 이필구 역으로 적혀있다. 음애 이자(李자)는 성종 11년인 1480년에 출생하여, 중종 28년인 1533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자는 정치가며 도학자였다. 그리고 뛰어난 시인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5대손으로,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이자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이조좌랑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홀연히 관직을 사직하고 초야에 묻혔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다시 조정에 나아가 우승지,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판이 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정치개혁에 선봉에 섰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낙향한 이자는 음성, 충주, 용인 등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용인 지곡리에는 고택과 유택이 있고, 조광조 등과 함께 노후를 생각해 지은 사은정이 있다.

 

음애 이자의 시문은 3656편이라는 대단한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유실되었으며, 현재는 120여 편의 시문이 실린 음애집이 남아있다. 1533년 54세로 운명하니, 중종은 이자를 관직에 복위시키고, 1577년 선조 시에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팔각형의 기둥이 있는 사랑채

 

이자 고택은 부와산을 마주하는 낮은 야산을 뒤로하고 동향으로 앉아 있다. 처음의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가 부엌으로 연결이 되어 ㄷ자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앞에 -자형의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튼 ㅁ자 형의 집이었던 것이 지금은 행랑채는 없어지고, ㄷ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좌측 남서쪽 모서리에 마루로 놓은 신주를 모시는 청방을 두었다. 이 방이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이 아닌 것은 창호에서 나타난다.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의 경우 정면과 측면을 모두 창호로 내는데 비해, 이자 고택의 마루방 측면의 문은 판자문으로 만들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방이 사당 역할을 하는 청방임을 알 수 있다. 과거 집의 규모가 크지 않은 중류 주택에서는 사당을 별도로 짓지 않고, 사랑채나 안채에 일부를 사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돌출이 된 청방의 옆으로는 두 칸 사랑방이 있다. 이 사랑방은 두 칸으로 넓게 트여 있으며, 청방과 사랑방의 사이는 전체를 문으로 해달았다. 사랑채의 우측 맨 끝에는 부엌을 들였는데, 위는 다락방이다. 그리고 사랑방의 우측 끝에는 문을 달아 높은 다락을 만들었다. 이 다락은 사랑방 앞에 놓은 툇마루를 통해서만 출입이 기능하다. 이자 고택의 사랑방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랑방 전면에 있는 기둥이다. 네모기둥의 모서리를 긁어 팔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이런 팔각기둥은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이자 고택만이 갖고 있는 멋이다.

 

간결한 안채의 꾸밈이 돋보여

 

이자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공간을 별도로 했으며, 이어지는 부분에 부엌을 두었다. 사랑채에서 꺾이는 부분에 부엌을 두고 한 칸 건넌방이 있다. 이어서 두 칸의 대청이 있고, 꺾인 부분에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다시 두 칸의 부엌을 두었다. 한 칸의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연결을 했다.

 

 

안방은 길게 두 칸으로 만들었으며, 부엌 위 한 칸은 다락을 꾸몄다. 그런데 그 다락을 올려다보면 굽은 목재를 이용하여 집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굽은 목재를 이용했다는 것은, 집을 지은 목수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이자 고택은 치목 수법이 뛰어나며, 평면과 입면의 짜임새가 도드라진다. 조선조 후기 경기도 지역 중류주택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안채 대청의 뒤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 툇마루가 또한 일품이다. 길게 마루를 놓은 것이 아니고, 두터운 통나무를 그대로 툇마루로 이용을 하였다. 그 옆에 연도를 놓아 올린 굴뚝도 낮게 만들어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이자 고택을 돌면 주춧돌에 눈길이 간다. 다듬지 않은 네모난 돌을 이용해 집안의 주추를 놓았는데, 그러한 흐트러짐이 이 집의 여유로움이다. 그 하나하나가 다 다르면서도 어우러짐의 미학이라니. 우리 고택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이런 데 있다.

 

 

이자 고택의 안채 부엌에는 아궁이 옆에 광을 두고 있다. 이렇게 아궁이 곁에 광을 둔 것도 이자 고택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집안의 여인들이 생활을 하기에 편리하게 꾸며졌다. 안채의 부엌과 사랑채의 부엌 사이에 놓인 우물을 보아도, 이 가옥이 여인네들의 동선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 나타난다. 

 

흰 눈이 녹지 않아 설원으로 변한 이자고택. 현재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자 고택은 운치가 있다. 눈을 밟고 집안 구서구석을 돌아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크지 않으면서도 멋이 있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짜임새가 돋보인다. 대문으로 사용하는 일각문을 나서면 담장 모서리 위에 올린 기와가 눈길을 끈다. 눈이 덮인 담장의 기와는 모두 감추어졌는데, 한 장의 기와가 밖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그 또한 아름다움이라. 이자 고택이 주는 즐거움이다.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집을 짓다가 보니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두게 되었겠지만, 우리들의 집을 짓는 방법으로 따지면 조금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 하나가 오히려 이 집을 더욱 기억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아마 전체적인 분위기가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고택과는 무엇인가가 다른 면이 있다. 양평군 용문면 오촌리 18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5호인 김병호 고가. 용문면소재지에서 용문사가 있는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오천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 좌측 샛말로 들어가면, 마을의 중앙 언덕 위에 자리한 김병호 고가가 있다. 조선조 말기인 고종 30년인 1893년에 지어진 집으로, 전체적인 집의 형태는 튼 ㅁ 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건넌방을 경계로 삼은 안채

 

이 집은 조선조 말 내시가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연못을 3년간이나 터를 닦아 지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99칸의 큰 집이었으나 모두 타 버리고, 현재는 안채만 원래의 집이라고 한다. 김병호 고가를 돌아보면 그 말에 수긍이 간다. 그만큼 집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김병호 고가의 안채는 남서향을 하고 있다. 마루문을 달아낸 두 칸의 대청이 있고,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는 안방과 날개로 꺾어 달아낸 두 칸의 부엌이 있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건넌방이 있는데, 이 고가의 특징은 바로 건넌방이다. 건넌방이 앞으로 돌출이 되어, 그 다음에 달아낸 두 칸의 방과 안방의 경계로 삼고 있다.

 

덧달아 낸 두 칸의 방은 한 칸은 마루방으로 문을 달아내고, 그 다음은 온돌방을 놓아 그 북측에 감실을 만들어 조상의 위폐를 모셔놓았다. 앞으로는 반 칸의 툇마루를 놓아 사랑방의 구성을 한 것이다.

 

결국 이 건넌방을 앞으로 돌출을 시킨 것은, 안방과 사랑방의 경계를 건넌방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일반 고가에서는 보기가 힘든 구성인데, 조선조 말에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중인계급이 신분상승을 하면서, 나름 안채와 사랑채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택한 가옥의 구조이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건넌방이 돌출이 되어 안방과 사랑방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넌방을 지나 두 칸으로 꾸며진 사랑은 한 칸은 마루방으로 하고, 끝의 방은 북쪽에 감실을 낸 사당으로 사용한다.

부엌에 벽에 낸 쪽문은 냉수문

 

김병호 고가를 주의 깊게 보면 두 칸 부엌의 위로는, 두 칸의 다락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엌은 전면은 판자벽으로 했으나 옆으로 돌아가면 심벽으로 구성하였다. 나름대로 전체적인 집의 구성을 사대부가의 집에 걸맞게 꾸몄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엌의 까치구멍 위에 판자로 문양을 내고 쪽문을 하나 내었다. 이 집을 소개하신 어르신의 말은, 이 쪽문이 '냉수문'이라는 것이다. 즉 안방에서 부엌을 드나들 때, 번거로움을 피해 이 구멍을 통해 냉수그릇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 용도로만 꼭 사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나름대로 멋을 더하고 생활의 편리를 생각한 쪽문이다.

 

안방에서 날개채로 달아 낸 두 칸의 부엌은 위에 다락을 두었다. 앞은 판바벽으로 막고 옆과 뒤는 심벽으로 꾸몄다.

부엌의 까치구멍 위에 낸 쪽문. 이런 것 하나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대문 밖 아궁이를 둔 대문채

 

김병호 고가의 특징은 대문채의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6·25 동란으로 불이 타버린 대문채는 다시 복원을 하였다고 하는데, 대문채와 행랑채가 붙은 ㄱ 자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은 행랑채로 구성해, 길가로 툇마루를 냈으며, 우측으로는 대문채를 두었다. 대문채는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광, 그리고 한 칸의 헛간으로 구성이 되었다.

 

대문채의 밖으로 한데아궁이를 내고, 그 위로 다락을 둔 점도 특이하다. 원래 이렇게 밖으로 아궁이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으로 자리를 잡은 김병호 고가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도 이곳에서 음식을 하고 행랑채의 툇마루를 이용하여 급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문채를 사랑채라고 하기도 하지만, 아마 후에 이곳을 사랑으로 사용했기 때문인가 보다.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면 사랑채가 별도로 있었을 텐데, 안채에 건넌방을 막아 사랑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이 구조는 대문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문의 우측에는 한데 부엌을 내고 그 위에 다락을 꾸몄다. 그리고 좌측의 행랑채는 밖으로 툇마루를 내었다.

뒤태가 아름다운 김병호 고가

 

김병호 고가를 둘러보다가 보면, 이 고가의 뒤태가 참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대문채의 밖을 판자벽으로 둘렀는데, 기단의 돌이 일반적인 화강암이 아니다. 장대석으로 놓은 기단이 무늬가 있는 돌로 사용을 했으며, 주추는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집을 소개하신 분께 이 돌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잘 모르시겠단다. 

 

기단을 모두 이렇게 무늬가 있는 돌로 꾸민 것으로 보면, 김병호 고가의 처음 모습은 범상치가 않았을 것 같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이 용문사를 지은 대목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보아도 그렇다.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나 툇마루 등에 목재를 사용한 치목도 뛰어나 보인다.

 

김병호 고가 안채의 뒤로 돌아가니 기와를 교체하면서 내린 흙 기와를 담장에 붙여 쌓아 놓았다. 기와의 형태로 보아 가마에서 구운 기와다. 이러한 기와는 적어도 100년 이상 된 것들이다. 이 뒤뜰이 이 가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뒷벽과 굴뚝의 조화다. 굴뚝을 강돌로 쌓아 담벼락과 쌍으로 조화를 이루게 만들었다.

 

벽과 강돌로 조형한 굴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담장에는 오래된 기와가 가득 쌓여있다.

대문채에 붙은 광과 헛간의 뒤는 모두 판자벽으로 처리해 멋을 더했다. 그리고 기단은 무늬가 있는 장대석을 사용했다.

고가를 돌면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만난다. 후일 이 특별한 부분만 따로 모아 책으로 쓴다고 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우리 고택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한 과부가 있었다. 이 과부는 날마다 홀로 지새우는 밤이 너무나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커다란 남근석을 두 개 만들었다. 그리고 치마폭에 싸서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집으로 옮겨오는데, 너무나 무거워 한 개의 남근석은 창덕리에 두고 왔다.

 

산동리 남근석을 답사하는 날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퍼붓는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거기다가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카메라 렌즈에 빗방울이 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남근석은 참으로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었다. 아랫부분은 연꽃문양을 둘렀으며, 1500년 대에 세웠다고 하니 벌써 500년 동안 이 마을에 서 있었다. 남근석은 다산이나 득남을 위해 세운다. 그동안 이 산동리 남근석을 찾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성을 드렸을까? 마을에서는 정월 보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이야기를 한다.

 

  
비바람이 몰아쳐 촬영이 힘든 날에 찾아갔다

  
산동리 팔왕마을 이정표

산동리 팔왕마을에 서 있는 남근석은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남근석을 들고 오던 과부가 힘이 들어 버리고 왔다는, 또 하나의 남근석을 찾으러 팔덕면 창덕리를 찾아갔다. 길가 낮은 둔덕에 서 있는 또 하나의 남근석. 생김새나 크기가 산동리의 남근석과 흡사하다. 그러고 보면 산동리에 전하는 이야기가 수긍이 간다. 산동리에 살고 있던 과부가 두개를 만들어 오다가 무거워서 하나를 버렸다는.

 

  
팔덕면 창덕리에 서 있는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5

현재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창덕리 남근석. 산동리의 남근석과 재질이나 크기, 그리고 조각을 한 모습이 유사하다. 이 남근석도 1500년 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산동리의 남근석과 같은 연대다.

 

산동리에 사는 과부는 도대체 왜 남근석을 두개씩이나 만들었을까?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만든 이 남근석은 대담하게도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였다. 나무로 만든 해학적인 것들은 무수하다. 그러나 돌로 만들어진 것들 중에도 이렇게 사실적으로 제작된 것은 드물다.

 

  
창덕리에 소재한 남근석. 좁은 길가에 서있다

도대체 이 과부가 남근석을 만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외로움에 지쳐서 밤마다 이 성기석을 보고 마음속에 둔 남정네를 그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 성기석을 신표로 삼아 이런 장대한 남성을 얻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비는 쏟아지는데 이 남근석을 보면서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남근석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표현을 한 순창 팔덕면의 남근석. 비를 맞은 남근석은 조각이 선명하게 나타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비가 쏟아지는데 남근석 곁을 서성이면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 저런 강한 남자가 되고 싶음인가 보다.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에는 윤씨 일가가 집단으로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살던 마을이다. 이곳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를 비롯하여 윤일선 가옥, 윤승구 가옥, 윤제형 가옥 등이 남아 있다.

 

이중 윤일선, 윤승구, 윤제형 가옥은 하나의 커다란 솟을대문을 통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공동으로 이용하는 솟을대문을 통해, 마을로 출입을 하게 꾸며진 곳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살아야 집도 살아'

 


이 중에서 공동 솟을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제일 끝에 있는 집이 윤제형 가옥이며, 네 채의 윤씨 고택 중 유일하게 사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집이다. 윤제형 고택은 1900년경 윤제선이 건립한 한옥으로, 현재 충남 민속문화재 제1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집은  ㄱ자 형의안채와 ㄴ자 형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튼 ㅁ자 형의 평면구조로 중부지방 주택의 특징을잘 보여준다.

 

집을 촬영하고 있는데 마을 분인 듯 어르신 한 분이, 무엇을 그리 열심히 찍느냐고 물어 보신다. 신문에 소개를 하려고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집은 사람이 살아야 집도 사는 법이여. 이렇게 좋은 집들이 많은데 그 집만 사람이 살아. 여기저기 물건을 늘어놓아도, 사람이 살면 집도 숨을 쉬지. 저렇게 좋은 집들도 비워 놓으면 온기를 잃어서 결국엔 폐허가 되는 법인데..."

 

혀를 차시고 가시는 어르신의 말씀대로 사람이 살고 있는 윤제형 가옥은 온기가 느껴지지만, 굳게 문이 닫힌 딴 가옥들은 무엇인가 찬바람이 이는 듯하다.

 


잡석 기단 위에 올린 사랑채. 사랑채의 창호가 재미있다.

잡석 기단위에 세운 사랑채, 소재도 빈약해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대문을 사이로 문간채와 구분하고 있다. 사랑채는 막돌로 기단을 쌓고, 전면 왼쪽 세 칸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툇마루가 끝나는 담장과 이어지는 곳에는 일각문을 두어 안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에는 또 하나의 안담을 치고 그곳에도 일각문을 두어, 안채의 출입을 제한했다.

 

사랑채는 네모난 기둥을 썼는데, 소재가 모두 가늘고 사이가 넓어, 전체적으로 사랑채의 구성이 빈약해 보인다. 사랑채의 앞으로는 지금도 밭이 있어 전면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구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서 재미있는 것은 대문과 잇닿은 방서부터 방문을 낸 것이 칸마다 두 배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창호를 하나를 내고, 가운데는 두 개, 그리고 세 칸 째는 네 개의 창호를 사용했다.     

 


사랑채와 대문을 사이에 두고 꾸민 행랑채. 사랑채의 뒷벽이 돌출이 되아 ㄱ 자형으로 구성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헛간과 광, 그리고 방을 들인 행랑채가 있다. 행랑방은 한 칸으로 되어 있으며 헛간과 광보다 측면이 반 칸이 좁다. 안으로 들어가면 사랑채가 정면 세 칸에 측면이 두 칸이나 되는 ㅁ자로 꾸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랑채와 행랑채를 합해 ㄴ자 형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안채의 끝을 활용한 가옥

 

윤제형가옥의 안채는 ㄱ자 집이다. 사랑채와 튼 ㅁ자로 마주하고 있는 안채는 ㄱ자로 꺾어지는 넓은 툇마루를 두어 방을 연결하고 있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맨 우측 끝에 있는 방을 높임 툇마루를 놓고 그 아래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툇마루의 끝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 방은 난간을 두른 것으로 보아 별당이나 누정의 용도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안채의 끝에 높임마루를 놓고 , 측면 앞으로는 넓은 툇마루를 놓았다. 높임마루 앞에는 난간을 둘러 누정으로 삼았다.

측면으로 돌아가면 방문 앞에 넓은 툇마루를 놓았는데, 양 벽을 바람벽과 벽장으로 막아 아늑하게 만들었다. 측면 방문의 위에는 '송죽헌(松竹軒)'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니 재미있는 것이 있다. 안방 뒤편에 있는 굴뚝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고, 그대로 벽을 타고 올라, 기와를 올린 추녀 안으로 솟았다는 점이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도 쉽게 보지 못한 굴뚝의 처리다.

 


안채 끝방의 측먄 방문 위에 걸린 송죽헌이라고 쓴 현판



안채 뒤편의 굴뚝은 지붕 끝 밖으로 나가지 않고 벽을 타고 올라 처마 안으로 솟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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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간채와 별채

 

헛간채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지나 서 있다. 나무 판자문을 달은 헛간채는 네 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헛간채는 사랑채와 안채와 이루는 ㅁ자형 구획 바깥에 서 있다. 안채와 행랑채의 사이로 보이는 또 하나의 건물은 별채로 보인다. 가운데 두 칸으로 된 방을 드리고,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이 별채는 바깥 담장 모서리에 붙여지었다.

 

사람이 살고 있어 조심스럽게 집안을 다니면서 촬영을 해야만 했던 아산 윤제형 가옥. 마을 어르신의 말씀처럼 사람이 살고 있어야 집이 함께 산다는 이야기가 공감이 간다. 많은 고택을 보고 다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이 난해하기는 해도, 그 안에 따스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안채와 행랑채 뒤로는 담방 모서리에 붙인 건물이 있다. 별채인 듯 하다.


외곽 담장 모서리에 놓인 집. 윤제형 가옥의 별채인 듯하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소재지에서 592번 도로를 이용해 부흥, 청천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느티나무들이 서 있는 문당리 오리목 마을 입구가 나온다. 이 느티나무 밑에는 돌무더기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막돌을 쌓아올린 이것이 바로 문당리 성황단이다. 안내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막돌로 쌓은 돌 제단

 

여름에 나뭇잎이 무성할 때는 돌무더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뭇잎이 무성하기 전의 성황단은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 놓고 있다. 성황단은 앞쪽 길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기점으로 해서, 뒤 산 능선을 향해 쌓아 올렸다. 철책을 돌아 돌무지 위로 올라가니, 길가 쪽에 폭 3m, 길이 5m 정도로 편편하게 돌을 놓아뒀다. 이곳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그리고 뒤편에는 제물을 차릴 수 있도록 단을 만들고 그 뒤로는 돌을 수북이 쌓아 능선을 향하게 하였다. 능선을 향해 놓은 돌무더기는, 산의 정기를 받아 마을이 잘 되고, 주민들 중에서 큰 인물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제단은 마을을 둘러싼 능선 하단의 경사지에 막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아래 제단의 높이는 2.5m 정도가 된다. 제단의 위로 올라가니 넓이가 꽤 되어, 10여명은 족히 올라설 만하다. 뒤편으로 10여m 정도 길게 만들어 주산과 연결을 해놓았다. 좌, 우에는 높이 1.5m 정도에 지름 3m 정도의 원추형 돌탑이 서있다. 마을에서는 이것이 남녀를 상징하는 탑이라고 한다.

 

 

 

성황단의 다양한 형태

 

성황단은 일반적으로'서낭'이라고 부른다. 서낭은 오랜 옛날부터 마을제의 신위로 모셔지면서, 우리민족의 토착신앙 대상이 되어왔다. 서낭의 형태는 대개 돌무더기를 쌓은 누석총(累石塚)이나, 고목을 지정해 만든 서낭목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가하면 장승과 솟대를 세워놓고 서낭제를 지내는 곳도 있다. 일부 마을에서는 성황당이라는 당집을 짓고, 그 안에 위폐를 모시거나 화분을 그려 모시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성황은 보편적인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위함을 받는 성황신 외에도, 지역의 방백이 직접 성황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성 안 높은 곳에 성황사를 짓고, 그 안에 위폐를 모신다. 성황사의 집제는 고을의 방백이 주관을 한다. 또한 길거리에 지나는 길손들의 안위를 위한 서낭도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성황은, 우리민족의 마을신앙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문당리 성황단은 독특한 제단으로 가치가 높아

 

문당리 성황단은 앞에 열거한 일반적인 성황제의 신표와는 다르다. 우선은 누석총을 양편에 쌓아 남녀를 상징하는 것도 그렇지만, 돌을 쌓아올려 제단을 조성하였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리고 그 뒤쪽을 높이 층이 나게 쌓아, 음식을 차리는 진설대를 만든 것도 그렇다. 또한 그 뒤편을 길게 늘어놓아, 산의 능선과 연결을 시도한 것도 이 마을 성황단의 특징이다.

 

 

현재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문당리 성황단은, 조선 중기에 마을이 형성 된 후 오랜 시간 마을의 수호신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 지내왔다. 전국적으로 많은 마을제의 신표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즈음에, 문당리 성황단의 가치는 더욱 높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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